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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리 2600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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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집]
하드웨어 특징[편집]
아타리 2800[편집]
사양[편집]
각 모델의 특징[편집]
서드 파티 주변 기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
아타리 2600 10306 | 레고® ICONS™ | LEGO® Shop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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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아타리 2600 10306 | 레고® ICONS™ | LEGO® Shop KR 아타리 2600 · 게임 한판 할래요? “아타리®의 50주년에 맞춰 레고® 아타리 프로젝트를 선보이게 되다니, 꿈만 같아요.” – 레고 디자이너 크리스 맥베이 · 레트로한 느낌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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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 1 입장하시죠
게임 한판 할래요
레트로한 느낌의 정교한 구성 요소
딱 5분만 더 안돼요
“4050 취향 저격” 아타리2600 게임기 레고로 부활 – IT조선 > 게임·라이프 > 키덜트·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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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추억의 게임기, ‘아타리 2600’ 레고 세트가 출시된다 | HYPEBEAST.KR | 하입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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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가격은 31만9천9백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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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리] 추억의 게임기 아타리 2600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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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게임기 ‘아타리’는 왜 망했을까 [임주형의 테크토크] –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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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세계 최초 게임기 ‘아타리’는 왜 망했을까 [임주형의 테크토크] – 아시아경제 아타리 2600은 본체와 게임 조작용 패드, 그리고 게임 소프트웨어가 담긴 ‘카트리지’라는 메모리 카드로 구성됩니다. 카트리지를 게임기에 꽂으면, … 최근 국내서도 가정용 게임기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비대면 시대를 맞이하면서, 닌텐도 게임기 ‘스위치’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지요. 이 외에도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마이크로소프트 ‘엑스박스’ 등은 게임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한 번쯤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이들 가정용 게임기는 바닥에 게임기를 거치한 후, TV나 컴퓨터 모니터 등에 케게임기,아타리,ET,닌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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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타리 2600(Atari 2600)은 1977년 10월 발매된 가정용 게임기로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카트리지 방식을 사용하였다. 원래는 아타리 VCS(Video Computer System)로 불렸으나 나중에 아타리 2600으로 변경되었다. 아타리 2600은 1982년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아타리라는 이름은 이 모델의 별명이 되었다. 2600은 2개의 조이스틱, 패들 컨트롤러와 함께 컴뱃(Combat) 게임 카트리지를 번들로 주었으나[4] 나중에 팩맨(Pac-Man)으로 변경되었다.[5]
역사 [ 편집 ]
개발 [ 편집 ]
1973년 아타리의 사이앤 엔지니어링(Cyan Engineering) 연구팀은 차세대 비디오 게임기로 스텔라라는 시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개발을 처음할 당시 소형 컴퓨터의 프로그램은 보통 카셋트 테이프나 디스크, 종이 테이프에 저장되었는데 1970년대초 휴렛 팩커드가 판매한 데스크톱 컴퓨터인 HP 9830은 롬 카트리지로 프로그램을 추가할 수 있었으며 이를 게임기에 사용하려고 생각했다. 1976년 8월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에서 자사의 CPU를 사용한 비디오 엔터테인먼트 시스템(VES: Video Entertainment System)을 발매하였는데 최초로 롬 카트리지를 이용해 게임을 교체, 실행할 수 있는 게임기였다. 당시 아타리는 퐁 시스템의 판매 둔화로 자금 압박을 받고 있었는데 놀런 부슈널은 스텔라의 완성을 위해 1976년 아타리를 워너 커뮤니케이션에게 2,800만달러에 매각했다. 성공의 열쇠는 TIA 칩의 개발을 맡고 있던 제이 마이너의 손에 달려 있었는데 발매전까지 칩의 완성과 오류 수정을 한번에 끝내야했다. 1977년 발매되기 전까지 총 개발 비용은 1억 달러 가까이 투입되었다.
발매와 성공 [ 편집 ]
2600의 초기 가격은 199달러로 9개의 게임과 같이 발매되었다. 페어차일드의 VES와 경쟁하게 된 2600은 VES에 대항해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VCS: Video Computer System)이라 이름 붙였는데 페어차일드는 게임기 이름을 채널 F(Channel F)로 바꾸었다. 2600은 시어스(Sears, Roebuck and Company) 상점에서 시어즈 비디오 아케이드(Sears Video Arcade)라는 이름으로도 판매되었다.
1977년 한 해 동안 아타리는 25만대의 VCS를 판매하였으며 발매 첫 해 동안 캘리포니아 서니베일에서 제조하였는데 두꺼운 내부 RF 실드와 함께 두꺼운 프라스틱 케이스로 무게를 가중시켰다. 1년 후 제조 공장을 홍콩으로 옮겨 이전보다 얇은 RF 실드와 플라스틱 케이스로 변경되었다. 1978년에는 55만대 만이 판매되어 아타리의 이러한 적자는 경영자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게 되었고 아타리 창립자인 놀런 부슈널은 회사를 떠나게 된다.
1979년 아타리 2600은 전용 게임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00만 대가 판매되었다. 또 아타리는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타이토의 아케이드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s)를 1980년 1월 발매해 2백만대의 게임기를 판매하였다. 2600과 카트리지는 1980년 한 해 동안 아타리에게 20억 달러의 수익을 안겨주었으며 판매량은 매년 2배씩 증가해 1982년에는 800만 대의 2600이 판매되었다.
아타리 2600 다스 베이더
1980년 아타리는 이전의 6 스위치 모델과 거의 동일한 모양의 전면에 4개의 스위치를 가진 개량판을 출시했다. 1982년 나무 무늬가 없는 다른 4 스위치 모델도 출시했는데 검은색 외장으로 다스 베이더(Darth Vader)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정식 명칭은 같은해 발매된 아타리 5200과 같이 아타리 2600으로 변경되었다.
아타리는 무선 버전인 아타리 2700과 4개의 컨트롤러 포트와 패들과 조이스틱을 하나로 합친 새로운 컨트롤러를 가진 아타리 2800을 개발했는데 2700은 설계 결함으로 판매되지 않았고[6] 2800은 1983년 일본에 판매했으나 닌텐도 패미컴의 발매로 밀려나게 되었다.
시어즈 텔레게임즈 2600 시리즈 [ 편집 ]
시어즈 텔레게임즈 2600
아타리는 1975년 퐁 게임기 시절부터 시어즈에 텔레게임즈라는 상표로 OEM 판매를 지속해 나갔다. 시어즈는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시어즈 비디오 아케이드 시리즈로 여러 버전의 2600을 판매하였는데 1977년에는 Rev. A의 헤비 식서 모델, 1980년에는 Rev. B의 4 스위치 모델, 1983년에는 아타리 2800을 시어즈 비디오 아케이드 II로 판매하였다.[7] 또 시어즈는 아타리의 게임을 텔레게임즈 상표로 판매하였는데 스티플체이스(Steeplechase), 스텔라 트랙(Stellar Track), 서브마린 커맨더(Submarine Commander)는 시어즈에서만 독점 판매되었다.[8]
내리막 [ 편집 ]
아타리가 성장을 계속하던 당시 아타리는 실리콘 밸리에 거대한 연구소를 운영했는데 비디오 게임 회사와는 걸맞지 않는 프로젝트에 많은 연구비를 사용했으며 그 중 대부분은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차세대 게임기 개발은 계속 실패하고 있었지만 워너는 2600의 판매가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고 아타리가 워너 수익의 반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관하고 있었다.
아타리는 팩맨(Pac-Man)과 이티(E.T.) 같은 재고 게임을 대량으로 출하하였고 서드파티의 질 낮은 게임들은 1983년 비디오 시장 붕괴의 원인이 됐다. 아타리의 규모에 비례해 손실도 컸는데 붕괴 기간 동안 하루에 10,000달러의 손실이 있었으며 워너는 1984년 아타리의 인수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회생 [ 편집 ]
아타리 2600 주니어
1984년 워너는 아타리를 코모도어 비즈니스 머신스(Commodore Business Machines)의 창업자인 잭 트래미얼(Jack Tramiel)에게 매각하였다. 트래미얼은 가정용 컴퓨터에 집중하기 위해 2600용 가필드(Garfield)와 5200용 슈퍼 팩맨(Super Pac-Man)을 포함한 모든 게임기용 게임 개발을 중지시켰다. 1986년 2600 주니어라는 새로운 디자인의 2600이 발매되었는데 이 기기는 2년 전 발매할 계획에 있었던 것으로 약간의 생산비 절감을 이루었다. 2600 주니어는 저렴한 가격과 많은 고전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광고했으며 아타리와 액티비전이나 프로고(Froggo), 에픽(Epyx), 앱솔루트 엔터테인먼트(Absolute Entertainment), 익서스(Exus) 같은 다른 서드 파티들이 다시 게임을 제작하게 되었다. 아타리 2600은 1990년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판매되었으며 아시아에서는 1990년대초까지 판매가 계속되었다. 마지막 아타리 라이선스 게임은 클락스(KLAX)로 1990년 발매되었다. 1992년 1월 1일 단종될때까지 대략 4,000만대가 판매되었으며 발매 게임수도 9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아타리 2600은 단종되었지만 홈브루 게임들이 계속 개발되고 있으며 TV 보이같은 복제 게임기들도 판매되고 있다. 그리고 2005년 40개의 게임을 내장하고 있으며 오리지널 2600 게임 카트리지와 컨트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아타리 플래시백 2(Atari Flashback 2)가 발매되었다.
하드웨어 특징 [ 편집 ]
아타리 2600
아타리 2600 조이스틱
아타리 2600 패들
2600의 CPU는 MOS 6502의 저가형 버전인 MOS 6507로 1.19MHz로 동작한다. 6507은 메모리 어드레스 라인을 16개에서 13개로 줄이고 외부 인터럽트를 없애 28핀 패키지로 축소하였다. 당시 메모리는 가격이 아주 비쌌는데 6507은 최대 메모리 8KB의 메모리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4KB이상의 메모리를 사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24핀의 카트리지 소켓에서 13비트의 어드레스 라인 중 1개를 칩 셀렉트 용도로 사용하고 나머지 12비트인 4KB만이 게임 저장용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후기 게임에서는 이런 한계를 뱅크 스위칭으로 극복했다.
2600은 콜 스택과 게임의 상태를 포함한 런타임 데이터를 위해 128바이트의 램이 있었다.
2600의 그래픽 칩인 TIA는 당시 램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에 그래픽 램이 없이 한번에 하나의 비디오 라인을 생성했는데 레지스터의 비트 패턴으로 만든 배경에 8픽셀로 이루어진 2개의 비트맵 스프라이트와 2개의 미사일, 하나의 볼 같은 5개의 단색 오브젝트를 겹쳐 한 개의 라인을 그려냈다. 그리고 VBLANK 기간 동안 모든 오브젝트의 충돌 감지와 위치 변경, 색상 조정등과 함께 입력 작업을 실행한다.
2600은 두개의 조이스틱과 패들이 동봉되어 있었다. 조이스틱은 버튼 하나와 디지털 4방향 스틱으로 구성되어 있다. 패들은 아날로그로 동작하며 양방향으로만 움직일 수 있으며 퐁, 브레이크아웃 (비디오 게임), 서커스 아타리 등에 사용할 수 있다.
컨트롤러의 연결단자는 MSX와 세가 마스터 시스템, 또 메가드라이브와 같은 규격으로 호환이 가능하다. 이 외에 무선으로 조작하는 컨트롤러와 발로 조작하는 컨트롤러도 출시되었다.
아타리 2800 [ 편집 ]
아타리 2800
아타리 2800은 1983년 5월에 출시된 일본판 아타리 2600이다. 2800은 일본 시장에서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당시 일본의 비디오 게임 시장을 닌텐도의 패밀리 컴퓨터가 2달 뒤에 나와 일본 시장을 선점했었기 때문이다.
코드네임은 ‘신디(Cindy)’이며 아타리의 엔지니어인 조 틸리(Joe Tilly)가 설계하였다. 2800은 이름만 바뀐 것 외에 여러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는데, 4개의 컨트롤러 포트 대신 본체와 합쳐진 두가지 컨트롤러가 있다. 8방향 디지털 조이스틱과 270도 패들은 존 앰버(John Amber)가 디자인하였다.[9]
2800의 케이스 디자인은 기존 2600의 케이스와 다른 디자인이며 2600와 달리 겉면이 평평하며 스위치도 비돌출 형태로 되어 있다.
2800에는 약 30여개의 게임이 출시되었다. 패키지에는 2600 게임의 패키지와 닮은 실버/레드 색상이며 롬 카트리지는 2600과 동일한 라벨이 붙여있다. 대신, 언어가 일본어로 되어 있는 차이가 있다.
사양 [ 편집 ]
CPU : MOS 6507 1.19MHz
비디오/오디오 : TIA 해상도 160 * 192, 128색 팔레트 중 한 라인에 최대 4색 표시 색상 팔레트는 TV 방식에 따라 다른데 NTSC는 128색, PAL은 104색, SECAM은 8색 팔레트였다. [10] 2 채널 모노 사운드, 1 정현파(square wave), 1 화이트 노이즈
RAM : MOS 6532 128바이트 (게임 카트리지 내부에 추가 가능)
ROM : 카트리지 최대 용량 4KB (뱅크스위칭으로 32KB이상 지원)
입력 : MOS 6532 컨트롤러 2개의 DE-9 컨트롤러 포트, 한 개의 버튼을 가진 조이스틱, 패들, 트랙볼 , 드라이빙 컨트롤러 , 12키(0–9, #, *) 키보드 컨트롤러 본체의 6개 스위치: 파워 온/오프, TV 신호(흑백/컬러) 선택, 각 플레이어의 난이도(A/B) 선택, 셀렉트, 리셋 스위치 파워 스위치를 제외하고 나머지 스위치는 게임에서 다른 용도로 설정 가능 4 스위치 모델에서는 난이도 선택 스위치가 본체 뒷면으로 이동
출력 : RCA 커넥터 (흑백 및 컬러 텔레비전의 그래픽과 사운드를 전송한다. 각 나라별로 NTSC, PAL, SECAM 방식을 지원한다.)
각 모델의 특징 [ 편집 ]
CX2600 Sunnyvale 1977년 발매된 첫 모델, 묵직한 알루미늄 RF 실드와 케이스 밑부분이 1/2인치의 두꺼운 플라스틱으로 곡선 형태로 되어 있어 다른 모델과 구분이 쉽다. 별명은 헤비 식서(Heavy Sixer)[11] CX2600 1978년 판매된 모델로 2년 동안 판매되었다. 이전 모델 보다 케이스 아래 부분이 얇고 각이 져 있다. 또 본체 밑부분 오른쪽에 TV 채널 선택 스위치가 추가되었다. 별명은 라이트 식서(Light Sixer)[11] CX2600-A 1980년 판매된 모델, 난이도 선택 스위치가 축소되어 본체 뒷면으로 이동되었다. 아타리 2600 1982년 판매된 모델로 2600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했다. 나무 무늬없는 올 블랙 케이스로 다스 베이더(Darth Vader)라는 별명을 얻었다.[11]
서드 파티 주변 기기 [ 편집 ]
스타패쓰 슈퍼차저(Starpath Supercharger) 카트리지에 6KB의 추가 램과 카셋트 플레이어와 연결하는 커넥터가 있어 게임을 카셋트 테이프에 저장할 수 있으며 추가 램을 활용한 게임도 발매되었다. 게임라인 마스터 모듈(Gameline Master Module) 전화선을 사용하여 1달러에 게임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모뎀 카트리지로 일정 시간 동안 다운로드 받은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었다. 요코 게임 복사기(Yoko Game Copier) 빈 카트리지에 게임을 복사하는 장치, 유럽의 C.K.B.에서 발매되었다
참고 자료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4050 취향 저격” 아타리2600 게임기 레고로 부활
레고그룹은 26일 게임업계 발판을 구축한 비디오 게임기 ‘아타리 2600(Atari 2600)’을 레고 브릭으로 구현한 세트를 8월 1일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시장에 선보인다고 밝혔다. 국내 가격은 31만9900원으로 책정됐다.
레고 아타리 2600. / 레고코리아
‘레고 아타리 2600’(제품번호 10306)’는 아타리 50주년을 기념해 제작됐다. 1977년 출시된 ‘아타리 2600’ 게임기의 1980년형 모델을 총 2532개 브릭으로 재현했다. 조이스틱과 게임기 본체, 게임 카트리지 등 고전 게임의 향수를 자극하는 주요 구성품을 레고 브릭으로 완성시킬 수 있다.
게임 카트리지는 아타리 3대 인기 게임으로 손꼽히는 ‘아스테로이즈’, ‘어드벤처’, ‘지네잡기’의 클래식 카트리지를 제공한다. 카트리지는 실제 게임기와 마찬가지로 레고 아타리 2600 게임기 본체 슬롯에 삽입하거나 홀더에 넣어 보관할 수 있다.
레고 아타리 2600 세트에 포함된 게임 카트리지 모형. / 레고코리아
‘레고 아타리 2600’은 방 안에서 아스테로이즈 게임을 즐기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을 미니 디오라마로 만들어 함께 전시할 수 있다. 클래식 TV와 붐박스, 구형 전화기와 레트로 포스터 등 1980년대를 연출할 수 있는 소품도 세트에 포함했다.
레고 아타리 2600 세트에 포함된 미니 디오라마. / 레고코리아
아타리 2600
홈 비디오 게임 콘솔
“Atari VCS” 리디렉션 2021 콘솔의 경우 Atari VCS(2021 콘솔)를 참조하십시오.
1982년 11월까지 아타리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Atari VCS)으로 낙인찍힌 아타리 2600은 주식회사 아타리가 개발하고 제작한 홈 비디오 게임기다. 1977년 9월에 출시되었으며, 1976년 Fairchild Channel F와 함께 처음 사용된 포맷인 스왑 가능한 ROM 카트리지에 저장된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반의 하드웨어와 게임을 대중화하였다. VCS에는 조이스틱 컨트롤러 2개, 결합된 패들 컨트롤러 쌍, 게임 카트리지 1개(초기 컴뱃[3] 및 이후 Pac-Man)가 함께 제공되었다.[4]
아타리는 아케이드 비디오 게임 제작에 성공했지만, 개발 비용과 제한된 수명으로 인해 CEO 놀란 부쉬넬은 프로그램 가능한 홈 시스템을 찾게 되었다. 1975년 말 MOS Technology의 첫 번째 값싼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 콘솔은 아타리 자회사 시안엔지니어링에 의해 코드네임 스텔라라는 프로토타입으로 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완성할 자금이 부족했던 부쉬넬은 1976년 아타리를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 매각했다.
아타리 VCS는 1977년 2KB 카트리지에 9개의 간단하고 저해상도 게임을 탑재해 출시했다. 이 시스템의 첫 번째 킬러 앱은 1980년 타이토의 아케이드 게임 스페이스 인데버의 홈 전환이었다. VCS는 널리 성공하여 액티비전을 비롯한 타사 게임 개발자들의 설립과 콘솔 제조업체인 마텔과 콜코와의 경쟁으로 이어졌다. 1983–84년 1차 라이프사이클이 끝날 무렵, 2600용 게임은 시스템이 설계한 것보다 훨씬 더 진보된 비주얼과 게임 플레이로 출시 게임의[5] 4배 이상의 스토리지 크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액티비전의 Pitfall!
1982년 아타리 2600은 지배적인 게임 시스템이었다. 새로운 콘솔과 게임 개발자 모두의 경쟁 속에서, 아타리 경영진의 수많은 부실한 결정이 회사와 업계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가장 대중적인 것은 Pac-Man과 Extra-Terrealth를 포함한 2600년대의 허가된 게임에 대한 극단적인 투자였다. Pac-Man은 이 시스템의 가장 큰 판매 게임이 되었지만, 변환의 낮은 품질은 콘솔에 대한 소비자 신뢰를 잠식했다. E.T.는 휴일 쇼핑 시즌에 시장에 서둘러 출시되었고 비판적인 팬과 상업적인 실패를 겪었다. 두 게임 모두, 그리고 제3의 삽기 공급 과잉은 콘솔 시장에서 아타리의 관련성을 종식시키는 요인이었다. 아타리의 몰락은 1983년의 비디오 게임 추락으로 인한 업계에 울려 퍼졌다.
워너는 1984년 아타리의 홈 사업부를 전 코모도어 CEO 잭 트래미엘에게 매각했다. 1986년, 트라미엘 산하의 새로운 아타리 코퍼레이션은 2600과 역호환성 아타리 7800의 저가 버전을 출시했지만, 1985년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출시로 업계 회복을 이끈 것은 닌텐도였다. 아타리 2600의 생산은 1992년 1월 1일에 끝났으며, 평생에 걸쳐 약 3,000만 대가 팔렸다.
역사
주식회사 아타리는 1972년 놀란 부쉬넬과 테드 다브니가 설립했다. 첫 번째 주요 제품은 1972년에 출시된 퐁으로, 최초의 성공적인 동전 작동 비디오 게임이다.[6] 아타리가 다음 해에 새로운 아케이드 게임을 계속 개발하는 동안, 퐁은 성장하는 아케이드 게임 시장에 많은 경쟁자들을 낳았다. 아타리의 다른 실수와 함께 경쟁은 1974년에 재정적인 문제로 이어졌지만 연말까지는 회복되었다.[7] 1975년까지 아타리는 Pong 홈 콘솔을 출시하여 당시 홈 콘솔의 유일한 주요 생산국인 Magnavox와 경쟁하였다. 그러나 아타리 엔지니어들은 회로판에 통합된 맞춤 로직의 한계를 인식하여 전체 콘솔을 영구적으로 한 게임에 국한시켰다.[8] 아타리가 과거 아케이드 게임과 전용 홈 콘솔을 통해 다시 찾아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리스크가 커졌다. 두 플랫폼 모두 메인프레임 컴퓨터에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니라 분리된 전자 기계 부품을 회로에 통합하여 구축된다. 따라서 콘솔 개발에는 최소 10만 달러(2020년 약 48만 1천 달러에 상당)의 비용이 들었지만, 최종 제품은 경쟁으로 구식이 될 때까지 약 3개월의 유통기한만 남겨두고 있었다.[7]
1974년까지 아타리는 아타리의 아케이드 게임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준 에이펙스 출신의 부쉬넬과 다브니의 전 동료인 스티브 메이어와 래리 에몬스가 설립한 그래스밸리 전자 회사인 시안엔지니어링을 인수했다. 퐁의 홈 버전이 출시되기 전부터 메이어와 론 밀너가 이끄는 시안의 엔지니어들은 아타리의 현재 아케이드 오퍼링을 재생할 수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 가능한 마이크로프로세서로 구동되는 홈 콘솔을 구상했었다. 프로그램 가능한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전용 단일 게임 장치보다 훨씬 간단하고 강력한 콘솔 설계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9] 그러나 그러한 칩의 가격은 100~300달러로 시장이 지원할 범위를 훨씬 벗어났다.[8] 아타리는 모토로라의 새로운 6800을 미래 시스템에 사용하기 위한 협상을 개시했었다.[10]
MOS Technology 6502/6507
1975년 9월, MOS Technology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웨스콘 무역 박람회에서 6502 마이크로프로세서를 25달러에 선보였다.[11][9] 메이어와 밀너는 이 칩을 만든 팀의 리더 척 페들(Chuck Peddle)을 만나 게임기에서 6502의 사용을 제안했고, 쇼가 끝난 후 시안의 시설에서 더 논의하자고 제안했다.[10]
이틀에 걸쳐 MOS와 시안 엔지니어들은 마이어와 밀너 사양의 6502 기반 콘솔 디자인을 스케치했다.[12] 금융 모델들은 25달러가 되더라도 6502는 너무 비쌀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페들은 그들에게 6502의 비용 절감형 버전인 6507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입출력용 MOS의 LIUT 칩을 제공했다. 시안과 모스는 6507과 라이엇 칩을 한 켤레에 12달러로 협상했다.[10][13] MOS는 또 MOS용 디버깅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별도로 개발해온 마이크로컴퓨터 어소시에이츠에 소개했고, 6502를 시험하기 위해 JOLT 컴퓨터를 개발했는데, 아타리와 시안이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사용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고 페들이 제안했다.[9] 밀너는 아타리의 자회사 키게임즈의 아케이드 게임인 탱크를 JOLT에 구현함으로써 프로그램 가능한 콘솔의 개념 증명서를 보여줄 수 있었다.[9]
그 거래의 일환으로, 아타리는 칩셋의 두 번째 소스를 원했다. Peddle과 Paivinen은 공동 설립자인 Bob Schreiner가 Peddle의 친구인 Synertek에게 제안했다.[8] 1975년 10월, 아타리는 MOS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시장에 알렸다. 모토로라 영업팀은 이미 경영진에게 아타리 계약이 확정됐다고 말한 뒤 모토로라 경영진은 발끈했다. 그들은 다음 주에 MOS를 상대로 한 소송을 발표했다.[10]
시스템 구축
1975년 12월, 아타리는 6502년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를 졸업한 조 데쿠아르를 고용했다. 데쿠아르는 메이어와 밀너가 디자인한 최초의 프로토타입을 디버깅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제품은 데쿠아르의 자전거 브랜드에 이어 코드명 ‘스텔라’를 얻었다. 이 프로토타입은 빌드할 그래픽 인터페이스의 브레드보드 레벨 설계를 포함했다.[7][9] 두 번째 프로토타입은 Jay Miner의 도움으로 1976년 3월까지 완성되었는데, Jay Miner는 텔레비전 인터페이스 어댑터(TIA)라고 불리는 칩을 만들어 텔레비전에 그래픽과 오디오를 보냈다.[14] 두 번째 시제품은 TIA, 6507, 그리고 ROM 카트리지 슬롯과 어댑터를 포함했다.[7]
TIA의 디자인이 세련되자 알알콘은 아타리의 게임 개발자들을 불러들여 기능에 대한 입력을 제공했다.[9] 6507, TIA, 기타 컴포넌트에는 상당한 제약이 있어 프로그래머들이 게임을 창의적으로 최적화해 콘솔을 극대화했다.[12] 콘솔에는 프레임 버퍼(framebuffer)가 부족하며, 스크린의 행을 가로질러 스캔할 때 시스템이 음극선관(CRT)의 전자총과 동기화하여 그래픽을 생성하도록 지시하는 게임이 필요하다. 프로그래머들은 전자총이 보이는 화면 밖에서 스캔하는 동안 다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빔을 “레이스”하는 방법을 찾아냈다.[15]
전자제품 개발과 함께, 부쉬넬은 곧 출시될 채널 F의 페어차일드 카메라와 계기판에 대한 컨설턴트인 진 랜드럼을 영입하여 콘솔에 대한 소비자 요구 사항을 결정했다. 랜드럼은 최종 보고서에서 나무로 된 곡물 마감 처리된 거실 미학을 제안했으며 카트리지가 “거실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전기에 대한 저항력, 어린이 보호 및 효과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9] 랜드럼은 카트리지 외에 전용 게임 4~5개를 포함하라고 권고했지만 최종 디자인에서는 이 같은 내용이 빠졌다.[9] 카트리지 디자인은 제임스 애셔와 더글라스 하디가 했다. 하디는 페어차일드(Fairchild)의 엔지니어로서 채널 F 카트리지의 초기 설계를 도왔으나 1976년 아타리에 합류하기 위해 그만두었다. 아셔와 하디가 디자인한 카트리지의 내부는 특허 충돌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달랐지만, 외부 부품은 채널 F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정전기에 대한 우려를 해소할 수 있었다.[9][16]
아타리는 1974년 금융 위기에서 여전히 회복되고 있었고, 비록 부쉬넬이 외부 금융 자원에 신세를 지는 것을 경계했지만 홈 콘솔 시장에 완전히 진입하기 위해서는 추가 자본이 필요했다.[9] 아타리는 1975년까지 더 적은 투자를 받았지만 필요한 규모로는 얻지 못했으며 1976년 초까지 더 큰 회사에 대한 매각을 고려하기 시작했다.[9] 아타리는 워너커뮤니케이션즈사에 소개되었는데, 워너커뮤니케이션즈사는 비디오 게임 산업이 성장하면서 영화와 음악 부문의 수익 감소를 상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9] 1976년 협상이 벌어졌는데, 그 기간 동안 아타리는 마그나복스 오디세이(Magnavox Odyssey)의 기초가 된 랄프 H. 베어의 특허를 둘러싼 마그나복스와 특허 침해 소송을 해결하는 등 책임을 청산했다.[9] 1976년 중반, 페어차일드는 아타리를 제치고 그해 말 출시될 예정인 채널 F를 발표하였다.[16]
1976년 10월까지 워너와 아타리는 2,800만 달러에 아타리를 구입하는 데 동의했다.[9] 워너사는 약 1억2000만달러를 제공, 스텔라의 빠른 추적을 가능하게 했다.[7][17] 1977년까지 개발은 그것을 “아타리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VCS)”으로 낙인찍고 게임 개발에 착수할 정도로 발전했다.[7]
출시 및 성공
두 번째 VCS 모델은 1977년 출시 모델에 비해 플라스틱 몰딩과 차폐가 가볍고 각도가 더 넓다.
1980년부터 VCS는 전면 스위치 4개와 대문자 로그형만 가지고 있다.
이 유닛은 1977년 6월 4일 하계 가전 전시회에서 10월 소매 출시 계획과 함께 전시되었다. 1976년 6월 1일부터 1977년 6월 1일 사이에 발표된 아타리의 제품 중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그나복스가 모든 기술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라는 마그나복스 특허 소송 해결의 조건을 기다리기 위해 발표가 늦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9] 그러나 아타리는 1차 배치 과정에서 생산에 문제가 생겼고 카트리지 사용으로 시험이 복잡했다.
아타리 VCS는 1977년 9월 199달러(2020년 약 850달러 상당)에 출시됐으며, 조이스틱 2개와 컴뱃 카트리지 1개로 8개의 게임이 추가 판매됐다.[18] 대부분의 출시 게임은 아타리나 그 자회사인 키게임즈가 개발한 아케이드 게임을 기반으로 했다. 예를 들어, 컴뱃은 키즈 탱크(1974년)와 아타리의 제트 파이터(1975년)를 기반으로 했다.[7] 아타리는 1977년 한 해 동안 35만~40만대의 아타리 VCS가 판매되었는데, 이는 한 게임에만 국한되지 않는 스와핑 가능한 카트리지 콘솔에 대한 배송 지연과 소비자들의 생소함 때문이다.[19]
1978년 아타리는 제조된 80만 대의 시스템 중 55만 대만을 팔았다. 이것은 손실을 메우기 위해 워너사의 추가적인 재정적 지원이 필요했다.[19] 아타리는 1979년 특히 휴가철에 100만 대의 콘솔을 판매했지만, 스와핑 가능한 ROM 카트리지를 사용하는 마텔전자 인텔리비전, 마그나복스 오디세이²와의 새로운 경쟁이 있었다.[20]
아타리는 타이토로부터 1978년 히트한 스페이스 인베더스의 VCS 변환을 개발하기 위한 라이센스를 취득했다. 홈 콘솔에 정식 허가를 받은 아케이드 전환은 이번이 처음이다.[21] 1980년 3월 출시한 이 제품은 콘솔의 올해 판매량을 2배 이상 늘려 200만대를 넘어섰고, 아타리 2600의 킬러 어플리케이션으로 꼽혔다. 그 후 판매량은 그 후 2년 동안 다시 두 배로 증가했다; 1982년까지 미국에서 1,000만 대의 콘솔이 팔린 반면, 1990년까지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은 팩맨이[22] 팔린 800만 장에 팔렸다.[a] Pac-Man은 1982년 전 세계 Atari VCS 판매량을 1,200만대로 늘렸으며,[25] 결국 연말까지 전 세계적으로 1,500만대의 콘솔을 판매했다.[26]
유럽에서는 1980년 영국에서는 아타리 VCS가 12만5000대,[27] 1984년까지 서독에서는 45만대가 팔렸다.[28] 1982년 VCS가 출시된 프랑스에서는 1989년까지 60만대가 팔렸다.[29]
1982년, 아타리는 두 번째 프로그램 가능한 콘솔인 아타리 5200을 출시했다. 이름을 표준화하기 위해 VCS의 이름을 “Atari 2600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 또는 제조 부품 번호 CX2600에서 파생된 “Atari 2600″으로 변경했다.[30] 1982년까지 2600달러의 아타리는 만드는 데 약 40달러의 비용이 들었고 평균 125달러(2020년 340달러에 상당)에 팔렸다. 이 회사는 카트리지 제조에 4.50달러에서 6달러, 광고에 1달러에서 2달러를 더하면 18.95달러(2020년 50달러에 상당)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25]
제3자 개발
1979년 크레인, 화이트헤드, 밀러가 결성한 액티비전(Activision)은 VCS 설계와 프로그래밍 기술에 대한 지식을 활용해 제3자 VCS 게임을 개발하기 시작해 1980년부터 게임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카붐!(1981년)과 핏폴!(1982)은 각각 최소 100만부, 400만부가 팔리며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31] 1980년 아타리는 4명의 지적재산권 침해를 고발하며 액티비전 카트리지의 판매 차단을 시도했다. 액티비전은 아타리에게 게임 사용료를 지불하기로 합의하면서 두 회사는 법정 밖에서 해결했다. 이를 통해 액티비전은 최초의 타사 비디오 게임 개발자가 되었고, 콘솔 제조업체들이 게임 개발에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라이선스 모델을 확립했다.[32]
액티비전의 성공은 1980년대 초 액티비전의 모델에 이어 미국 게임, 텔리스, 아폴로별 게임, 데이터 에이지, 지마매, 미스틱, 콤마비드 [33][34][35]등 다른 제3자 VCS 게임 개발자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매직의 창시자에는 전 아타리 프로그래머가 포함되었다. 마텔과 콜코는 이미 자체적인 고급 콘솔을 생산하고 있으며, 2600년에 사용할 기존 게임의 단순화된 버전을 만들었다. Mattel은 카트리지에 M Network 브랜드 이름을 사용했다. 1982년까지 타사 게임이 VCS 게임 매출의 절반을 차지했다.[36]
거부 및 재설계
아타리는 제3자 게임 개발 외에도 콜코비전으로부터 하드웨어 지배력에 대한 첫 번째 주요 위협을 받았다. 콜코는 닌텐도로부터 모든 콜코비전 콘솔과 함께 묶인 히트 아케이드 게임인 동키 콩(1981)의 버전을 개발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었다. 콜코는 1982년 하드웨어 시장의 약 17%를 아타리가 58%[37]를 차지했던 것에 비해 증가하였다. 아타리는 제3자가 시장점유율을 다투는 상황에서 인기 있는 아케이드 게임 등 게임을 만들 수 있는 부동산에 대한 라이선스를 취득하는 등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팩맨은 수많은 기술적, 미적 결함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700만 부 이상이 팔렸다. 1982년 휴가 쇼핑 시즌에 접어든 아타리는 약 6주 만에 프로그램된 게임인 E.T.에 높은 판매 기대를 걸었다. 아타리는 약 400만개의 카트리지를 생산했지만,[38] 게임 리뷰가 저조했고, 약 150만개의 카트리지만 팔렸다.[39]
워너커뮤니케이션즈는 1982년 12월 주주들에게 전년 동기 대비 50% 성장을 예상했으나 아타리 매출 감소로 인해 10~15%에 그치는 등 예상보다 저조한 실적을 발표했다.[40][41] 아타리의 약세는 홈게임 시장의 과포화 현상과 맞물려 투자자들이 비디오게임에서 자금을 끌어내기 시작하면서 1983년의 비디오게임 붕괴로 알려진 일련의 재앙적 효과를 촉발시켰다.[40] 1983년 이전에 결성된 제3자 개발자 중 상당수가 폐업했고, 1985년까지 마텔과 콜코는 비디오 게임 시장을 떠났다.[42]
1983년 9월, 아타리는 14대의 트럭 적재되지 않은 아타리 2600 카트리지와 다른 장비들을 뉴 멕시코 사막의 한 매립지로 보냈고, 후에 아타리 비디오 게임 매장이라고 라벨을 붙였다.[43] 오랫동안 이 매장에는 수백만 개의 미분양 카트리지가 매장되어 있다고 주장해온 도시 전설로 여겨졌던 이 부지는 2014년에 발굴되어, 약 70만 개의 카트리지만이 실제로 매장되었다는 전 아타리 임원들의 보고가 확인되었다.[44] 아타리는 1983년 전체 5억 3천 6백만 달러의 손실을 보고했고,[45]: ch14 1984년에도 계속 손해를 봤으며, 2분기에 4억 2천 5백만 달러의 손실이 보고되었다.[46] 1984년 중반까지 2600년에 대한 소프트웨어 개발은 아타리와 액티비전을 제외하고 근본적으로 중단되었다.[47]
워너는 자사의 실패한 아타리 사업부를 지원하는 것을 경계하며 1984년부터 구매자를 찾기 시작했다. 워너는 1984년 7월 아타리의 오락실 사업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타리의 대부분을 코모도어 인터내셔널의 설립자인 잭 트래미엘에게 약 2억 4천만 달러에 매각했다. Tramiel은 개인용 컴퓨터의 지지자였고, 판매 직후 2600개의 새로운 게임 개발을 모두 중단했다.[46]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은 닌텐도가 1985년 북미에서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을 출시한 이후인 1986년경에야 회복되었다. Atari Corporation은 “50달러 미만”이라는 광고 캠페인의 지원을 받아 1986년에 2600의 재설계된 모델을 출시했다.[48] 카트리지가 많은 대형 도서관과 저렴한 가격대를 갖춘 2600은 1980년대 후반까지 계속 팔렸다. 아타리는 1989-90년에 시크릿 퀘스트와[49] 페이탈 런을 포함한 마지막 게임을 출시했다.[50] 1986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2000만 대 이상의 Atari VCS가 판매되었다.[51][52] 최종 아타리 라이선스 발매는 1990년 아케이드 게임 KLAX의 PAL 전용 버전이다.
2600 라인은 14년 이상 시판된 후 1992년 1월 1일 아타리 7800, 아타리 8비트 가정용 컴퓨터 제품군과 함께 정식으로 단종되었다.
하드웨어
콘솔
주요 기사: 아타리 2600 하드웨어
아타리 2600의 CPU는 6502의 버전인 MOS Technology 6507로,[53] 2600년에 1.19 MHz로 실행된다.[54] 내부 실리콘은 동일했지만 6507은 16개가 아니라 13개가 더 적은 메모리 주소 핀을 포함했기 때문에 6502개보다 가격이 저렴했다. 아타리 2600의 설계자는 6507이 허용한 13개보다 1개 적은 주소를 가진 저렴한 카트리지 인터페이스를[56] 선택했고, 이미 제한된 주소 지정 가능 메모리를 4KB(212 = 4096)로 더 줄였다. 전투력 자체가 2KB에 불과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됐다. 이후 게임은 은행 전환으로 인해 이러한 한계를 피했다.
콘솔에는 스크래치 공간, 콜 스택, 게임 환경 상태 등을 위한 128바이트의 RAM이 있다.
콘솔의 상단 베젤에는 원래 전원, TV 유형 선택(컬러 또는 흑백), 게임 선택, 플레이어 난이도, 게임 재설정 등 6개의 스위치가 있었다. 난이도 스위치는 이후 버전의 콘솔에서 베젤 뒤쪽으로 이동했다. 후면 베젤에는 컨트롤러 포트, TV 출력, 전력 입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픽스
주요 기사: 텔레비전 인터페이스 어댑터
데이비드 크레인 핏폴!(1982)은 VCS가 출시한 게임보다 더 진보된 그래픽을 보여준다.
아타리 2600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 제작된 브라운관 텔레비전 세트와 호환되도록 설계되었는데, 일반적으로 다른 장치에서 오디오와 비디오를 수신할 수 있는 보조 비디오 입력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TV에 연결하기 위해, 콘솔은 텔레비전의 안테나 역할을 하는 특수 스위치 박스를 사용하여 지역 텔레비전 표준(NTSC, PAL 또는 SECAM)과 호환되는 무선 주파수 신호를 생성한다.[59][12]
Atari는 그래픽과 텔레비전 신호로의 변환을 처리하기 위해 VCS에서 TV 인터페이스 어댑터(TIA) 칩을 개발했다. 화면 왼쪽 절반을 커버하는 단색 20비트 배경 레지스터(각 비트는 인접한 4개의 픽셀을 나타냄)를 제공하며, 오른쪽에서 반복되거나 반사된다. 단색 스프라이트는 8픽셀 폭의 선수 2명, 선수와 색깔이 같은 1비트 미사일 2명, 배경색을 공유하는 1픽셀 공 등 5명이다. 1비트 스프라이트는 모두 1, 2, 4, 8픽셀까지 늘어나도록 제어할 수 있다.[60]
이 시스템은 관련 RAM 비용을 피하기 위해 프레임 버퍼 없이 설계되었다. 배경과 스프라이트는 단일 스캔 라인에 적용되며, 디스플레이가 텔레비전으로 출력되면서 프로그램은 색상, 스프라이트 위치, 배경 설정을 변경할 수 있다. 프로그래머 부분의 화면과 코드를 동기화하는 데 필요한 세심한 타이밍에 “빔을 쫓는 것”이라는 라벨이 붙었는데, 실제 게임 로직은 텔레비전 빔이 화면의 보이는 영역 밖에 있을 때 실행된다.[15] 시스템을 위한 초기 게임은 다음 그래픽 행이 준비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간을 허용하기 위해 더 낮은 수직 해상도를 제공하는 스캔 라인 쌍에 동일한 비주얼을 사용한다. Pitfall!과 같은 후기 게임은 각 스캔 라인의[62] 비주얼을 변경하거나 화면 주변의 검은색 영역을 확장하여 게임 코드의 처리 시간을 연장한다.[63]
아타리 2600의 지역 발매는 각 지역의 텔레비전 포맷에 대해 수정된 TIA 칩을 사용하며, 이 칩들은 각 지역별로 게임을 개발하여 별도로 발행해야 한다. 모든 모드의 폭은 160픽셀이다. NSTC 모드는 화면당 192개의 가시선을 제공하며, 60Hz에서 그리고 16개의 색상을 각각 8개의 밝기 레벨에서 제공한다. PAL 모드는 화면당 228개의 가시선으로 더 많은 수직 스캔라인을 제공하지만 50Hz에서 13가지 색상으로만 그린다. 또한 50Hz 형식인 SECAM 모드는 8가지 색상으로 제한되며, 각각은 하나의 밝기 레벨만 가진다.[60][64]
관제사
CX 40 조이스틱
첫 번째 VCS 번들에는 두 가지 유형의 컨트롤러, 즉 조이스틱(부품 번호 CX10)과 로터리 패들 컨트롤러(CX30) 쌍이 있다. 패들 컨트롤러와 유사하지만 연속 회전이 가능한 드라이빙 컨트롤러는 Indy 500 출시 게임과 함께 출하된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CX10 조이스틱은 제임스 C가 설계한 CX40[65] 모델로 대체되었다. Ashher. 아타리 조이스틱 포트와 CX40 조이스틱이 산업 표준이 되었기 때문에 2600개의 조이스틱과 몇몇 다른 주변기기는 MSX, 코모도어 64, 아미가, 아타리 8비트 패밀리, 아타리 ST를 포함한 후기 시스템과 함께 작동한다.[66] CX40 조이스틱은 마스터 시스템 및 세가 제네시스와 함께 사용할 수 있지만 네이티브 컨트롤러의 모든 버튼을 제공하지 않는다. 타사 컨트롤러에는 위코의 명령 제어 조이스틱이 포함된다.[67] 이후 제어기 잭에 와이어를 삽입할 수 있는 수신기와 함께 외관상 비슷하지만 무선 기술을 사용하는 CX42 리모컨 조이스틱이 출시되었다.[68]
아타리는 1978년 6월 CX50 키보드 컨트롤러를 필요한 2개의 게임인 코드브레이커와 헌트 앤드 스코어와 함께 도입했다.[65] 비슷하지만 간단한 CX23 키즈 컨트롤러는 젊은 관객들을 겨냥한 일련의 게임들을 위해 나중에 출시되었다.[69] CX22 트락볼 컨트롤러는 1983년 1월에 발표되었으며 아타리 8비트 패밀리와 호환된다.[70]
아타리 2600을 키보드 장착형 가정용 컴퓨터로 바꾸려는 시도가 두 번 있었다. 아타리는 한 번도 발매되지 않은 CX3000 “Gradge” 키보드와 1983년에 발매된 스펙트라비데오의 CompuMate 키보드.[71][72]
콘솔 모델
아타리 2600 이름을 처음 사용한 올블랙 모델(1982년 11월 출시) Sears는 VCS를 Tele-Games 제품군의 “비디오 아케이드”로 다시 브랜드화했다. 일본 전용 아타리 2800의 디자인은 나중에 미국에서 시어스 비디오 아케이드 II에 사용되었다. ‘2600 주니어’라는 별명을 가진 1986년형 비용 절감형 버전.
보조 수정사항
VCS의 초기 생산은 1977년 Sunnyvale에서 만들어졌으며, 케이스에 두꺼운 폴리스티렌 플라스틱을 사용하여 내부에는 대부분 빈 껍데기였던 것에서 무게의 느낌을 주었다.[9] 초기 Sunnyvale 배치에는 스피커가 포함하기에 너무 비싸고 대신 소리가 TIA를 통해 연결된 텔레비전으로 전달되었지만, 케이스에 내부 스피커 시스템을 위한 잠재적 탑재도 포함되었다.[9] 전면 패널에 있는 6개의 콘솔 스위치 모두. 이 유닛의 생산은 1978년에 대만으로 이전되었는데, 그 곳에서 두께가 적은 내부 금속 차폐를 사용하고 케이싱에 얇은 플라스틱을 사용함으로써 시스템의 무게를 줄였다. 이 두 버전은 일반적으로 “헤비 식스”와 “라이트 식스”라고 불리며, 6개의 전면 스위치를 참조한다.[73][9]
1980년에는 난이도 스위치가 콘솔 뒤쪽으로 옮겨져 전면에는 4개의 스위치가 남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4스위치 콘솔은 이전의 6스위치 모델과 거의 동일해 보인다. 1982년 아타리는 콘솔을 “아타리 2600″으로 리브랜딩했는데, 이 이름은 우드그레인 없이 4스위치 모델의 버전에 처음 사용되어 올블랙으로 보이게 했다.
시어스 비디오 아케이드
아타리는 1975년 오리지널 퐁으로 시작한 후자의 텔레게임즈 브랜드로 시어스와 OEM 관계를 이어갔다. 이는 훗날 2600개의 카트리지를 생산한 테레게임즈사와 무관하다.[74][75] 시어스는 1977년부터 시어즈 비디오 아케이드 시리즈로 VCS의 여러 모델을 출시했다. 1983년 이전에 일본 전용 아타리 2800이 시어스 비디오 아케이드 II로 재브랜드되었다.[76]
시어스는 텔레게임즈 브랜딩으로 아타리의 게임 버전을 출시했는데, 보통 타이틀이 다르다.[77] 아타리가 시어스를 위해 제작한 게임은 다음과 같다. 래클레이체스, 스텔라 트랙, 잠수함 사령관.[77]
아타리 2800
아타리 2800은 1983년 10월 발매된 2600의 일본판이다. 에폭 같은 회사가 2600을 일본에서 유통한 적은 있지만 일본 고유의 2600을 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800은 닌텐도의 패밀리 컴퓨터(일본에서 지배적인 콘솔이 된)가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장 점유율을 크게 얻지 못했다. 시어스는 1983년 미국에서 시어즈 비디오 아케이드 II를 2개의 컨트롤러와 스페이스 인베더스와 함께 패키지로 출시했다.[78] 2800년에는 약 30개의 특수 브랜드 게임이 출시되었다.
엔지니어 조 틸리가 설계한 2800은 2600 중 2개 대신 4개의 컨트롤러 포트가 있다. 컨트롤러는 8방향 디지털 조이스틱과 270도 패들(John Amber)의 조합을 이용한 일체형 설계로 설계됐다.[78] 2800의 케이스 디자인은 비프로터링 스위치가 있는 쐐기 모양을 사용하여 2600에서 출발했다. 케이스 스타일은 바니 황이 디자인한 아타리 7800의 기본이다.[78]
아타리 2600 주니어
1986년형 모델은 아타리 7800과 같은 외관을 가진 소형, 비용 절감형 폼팩터를 가지고 있다. 대규모 게임 콜렉션 운영 능력을 갖춘 예산 게임 시스템(49.99달러 이하)으로 광고됐다.[79] 1983년의 비디오 게임 충돌 이후, 그리고 북미의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출시 후, 2600은 “재미가 돌아왔다!”를 홍보하는 새로운 게임과 텔레비전 광고로 지원되었다. 아타리는 아일랜드에서만 판매되는 “큰 무지개”, “짧은 무지개”, 그리고 올블랙 버전 등 몇 가지 사소한 스타일 변형을 발표했다.[80] 후기 유럽판에는 조이패드가 포함되어 있다.[citation needed]
게임.
참고 항목: 베스트셀러 아타리 2600 비디오 게임 목록
1977년에는 9개의 게임이 카트리지를 통해 출시되어 콘솔 출시와 함께 진행되었다. 항공-해전, 기본 수학, 블랙잭,[81] 전투, 인디 500, 스타선, 스트리트 레이서, 서라운드, 비디오 올림픽. 인디 500은 패들 같지만 자유롭게 회전하는 특별한 “주행 제어기”와 함께 선적되었다. 스트리트 레이서와 비디오 올림픽은 표준 패들 컨트롤러를 사용한다.
클리프 스펀이 그린 이 전투용 커버와 같은 아타리 게임의 커버 아트는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포착하고 게임 그래픽의 낮은 충실도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아타리는 대부분의 게임이 추상적인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고 스크린샷은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게임과 스크린샷만을 특징으로 하는 박스 아트가 소매점에서 게임을 판매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타리는 게임 플레이에 충실하면서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끌어들이려는 역동적인 움직임의 함축으로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예술작품을 만든 클리프 스포언에게 박스 아트를 아웃소싱했다. 스펀의 스타일은 수잔 재켈, 릭 귀디체, 존 엔라이트, 스티브 헨드릭스 등 보조 아티스트를 영입할 때 아타리의 표준이 됐다.[82] 스포언과 헨드릭스는 아타리 2600 도서관에서 표지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콘셉트 아티스트인 랄프 맥쿼리는 뱅가드의 아케이드 전환이라는 하나의 커버에 의뢰되었다.[83] 이 예술가들은 일반적으로 예술을 그리기 전에 게임에 대해 배우기 위해 프로그래머와 상의했다.[82]
1978년 브레이크아웃 아케이드 게임의 아타리 VCS 포트가 등장했다. 원본은 흑백에 컬러 오버레이가 있고, 홈 버전은 컬러가 있다. 1980년, 아타리는 최초의 액션 어드벤처 게임인 어드벤처와 숨겨진 부활절 달걀이 있는 홈 게임을 출시했다.[84]
1980년에 발매된 릭 마우러의 ‘타이토의 우주 침략자’ 항구는 VCS 게임 중 최초로 100만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결국[85] 1년[86] 내 두 배, 1983년까지 총 600만부 이상의 카트리지가 판매되었다.[23] 그것은 콘솔 판매를 촉진하는 킬러 앱이 되었다. 1981년 발매된 아타리의 자체 개발한 소행성 게임과 미사일 사령부 아케이드 게임 버전도 주요 히트작이었다.
각각의 초기 VCS 게임은 2K ROM에 있다. Space Invider와 같은 나중의 게임들은 4K를 가진다.[5] VCS 포트 아스테로이드(1981)는 시스템이 두 4K 세그먼트 사이의 뱅크 스위칭 기법을 통해 8K를 사용하는 첫 번째 게임이다.[87] 디그 더그와 크리스탈 캐슬의 아타리의 항구를 포함한 후기 출시물 중에는 16K 카트리지가 있다.[5] 결승전 중 하나인 페이탈 런(1990년)은 이를 두 배로 늘려 32K로 만들었다.
주식회사 아타리는 처음 몇 년간 수십 개의 게임을 출시하며 유일한 개발자였다.
1982년 이 시스템이 최고조에 달했던 두 개의 아타리 퍼블리싱 게임인 E.T.와[88] Pac-Man이 1983년 비디오 게임 추락의 요인으로 꼽힌다.[89]
미스틱이라는 회사는 2600년을 위해 많은 포르노 게임을 제작했다. 가장 악명 높은 커스터즈 리벤지스는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장군이 미국 원주민 여성을 강간하는 장면을 묘사했기 때문에 여성 단체와 미국 원주민 단체의[90] 항의를 받았다.[91] 아타리는 경기 출시를 놓고 법정에서 미스틱을 고소했다.[92]
레거시
2600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큰 성공을 거두어 ‘아타리’는 주류 미디어의 콘솔과 일반적인 비디오 게임의 대명사였다.[93] Jay Miner는 2600의 TIA 칩에 후계자 창설을 지시했다. CTIA와 ANTIC—1979년에 출시된 Atari 8비트 컴퓨터 및 이후 Atari 5200 콘솔의 핵심이다.
아타리 2600은 2007년 뉴욕 로체스터의 The Strong에 있는 국립 토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94] 아타리 2600은 2009년 IGN에 의해 역대 2위 콘솔로 선정되었는데, 이 콘솔은 1983년의 첫 번째 비디오 게임 붐과 비디오 게임 충돌의 배후에서 그 놀라운 역할을 꼽으며 “우리 산업 전체가 구축된 콘솔”[95]이라고 칭했다.
2021년 11월, 현재의 화신인 아타리는 “아타리 XP”라는 레이블로 출판될 세 개의 2600개의 게임을 발표했다. 야스의 귀환, 아쿠아벤튀르, 사보튀르.[96] 이것들은 이전에 Atari Flashback 콘솔에 포함되었다.[97]
복제 및 재발급
현대판 아타리 2600 복제품이 시중에 남아 있다. 잭스퍼시픽이 제작한 아타리 클래식 10인 1 TV 게임은 복합 비디오 출력을 가진 아타리 스타일의 조이스틱 안에 10개의 게임이 들어있는 2600을 모방한다. TV 보이에는 확대된 조이패드에 127개의 게임이 포함되어 있다.
2005년 출시된 아타리 플래시백 2 콘솔에는 40개의 게임이 들어 있으며, 4개의 추가 프로그램이 치트 코드로 잠금 해제되어 있다. 콘솔은 원래의 2600 아키텍처를 구현하고 카트리지 포트를 추가하여 원래의 2600 카트리지를 재생하도록 수정할 수 있으며, 원래의 2600 컨트롤러와도 호환된다.
하이퍼킨은 2017년 사전 설치된 게임 대신 오리지널 카트리지를 재생하는 아타리 2600의 복제품인 RetroN 77을 발표했다.[98]
아타리 VCS 마이크로콘솔은 2021년 아타리 인터렉티브가 출시했다.[99]
미공개 시제품
아타리 2700은 무선 컨트롤러를 사용하는 2600의 버전이다.
생산코드 ‘CX2000’과 별명 ‘밸’로 알려진 아타리 2600 변종은 각각 뉴욕과 써니베일 아타리 시설에서 1982년 2종의 시제품으로 발견됐다.[100] 그것은 2600년의 노화를 재설계한 것이다. 2개의 조이스틱 제어기가 통합된 그것의 디자인은 Henry Dreyfuss Associates에 의한 인적 요인 분석의 결과물이다. 그 프로젝트는 시장 생산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타리는 “아타리 3200″이라고 불리는 2600명의 후계자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2600개의 카트리지와 호환될 예정이었고, 설계 문서상으로는 8비트 6502를 기반으로 한다고 나와 있지만 10비트 프로세서를 기반으로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예비 게임 개발자들이 프로그래밍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아직 미완성이었다. 아타리는 아타리 3200을 시어스 슈퍼 아케이드 II로 복제했지만, 이것은 결코 공개되지 않았다.[101]
메모들
^ a b 1982년 727만1844명 1983년 68만4569명 1986년 3만7063명 1987년 6만1685명 1988년 3885명 1989년 3만4374명 1990년 2천197명.[23][24]
참조
인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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