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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텔로와 르네상스 조각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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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조각-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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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텔로와 르네상스 조각 양식
르네상스 조각의 탄생사는 건축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전개됐다. 건축의 르네상스가 고대 건축의 모든 비밀을 다시금 피렌체로 운집시켰던 브루넬레스키의 손에서 시작됐다면, 르네상스 조각의 역사는 유럽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던 반-고딕, 탈-고딕적 요소들이 도나텔로의 작품 속에서 결집하면서 그 시작을 알리게 된다.
‘예술가들은 유별난 성격의 소유자들이다’라는 선입견이 있다. 물론 편견은 편견에 불과할 뿐이다. 인류사 최고의 예술가들이 발에 차이다시피 하던 피렌체에서도 예술가들의 성품은 그들 작품의 스타일처럼 제각각이었다. 그 예시로 브루넬레스키의 라이벌 로렌초 기베르티(그는 도나텔로의 라이벌이기도 했다)는 그의 작품에 있어서 그 어떤 결점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인 동시에 온화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녔던 예술가였고(다만 그는 많은 이들로부터 ‘교활하다’는 평을 받았다), 후기 르네상스의 대표적 예술가 라파엘로 역시 친절하고 세련된 매너로 피렌체인들의 선망을 샀던 신사적인 인물이었다.
반면 르네상스의 문을 난폭하게 열어젖힌 두 도굴꾼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는 예술가에 대한 편견을 일축시키는 데 그 어떤 공헌도 하지 못했다.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두 예술가의 괴팍함에 대한 일화는 차고도 넘치는 것이었다. 그가 설계한 메디치 궁전의 계획이 “너무 거대하고 화려하다”는 이유로 코시모에 의해 거절당하자 격분한 브루넬레스키가 스스로 제작한 궁전의 모델을 부숴버렸던 일화는 유명하며(덕분에 오늘날까지 그가 작업한 메디치 궁전의 설계도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완성된 조각의 값을 깎으려 하는 제노바 상인의 무례함에 분노를 참지 못한 도나텔로가 완성된 조각을 (코시모 앞에서) 계단 아래로 던져버린 사건 역시 그 못지않게 잘 알려져 있다. 두 배의 값을 제안하며 잘못을 비는 상인과 코시모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도나텔로는 그가 부순 조각을 결코 다시 제작해주지 않았고, 코시모 또한 두 번 다시는 브루넬레스키의 설계를 볼 수 없었다(그는 훗날 브루넬레스키의 계획을 따르지 않은 사실을 두고두고 후회했음을 고백한다). 브루넬레스키가 기베르티에게 청동문 제작의 영광을 빼앗긴 사실에 격노하여 1401년, 로마로 떠나버렸듯이, 도나텔로 역시 작업하던 작품을 내팽개친 채 (고용인이 제대로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고용한 도시에 등을 돌려버리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브루넬레스키가 그의 인부들을 너무 혹사시킨 나머지 그들을 파업으로까지 몰고 갔다면, 도나텔로는 작업하던 돌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말해! 말을 해! 그렇지 않으면 피를 싸게 해 주겠어!”라 소리를 질러댔다. (조르지오 바사리는 1401년부터 1418년까지 이 둘이 로마에서 무려 17년간 함께 동거 동락하며 고대의 건축물과 조각을 공부했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사실들을 상기시키면서 이를 반박하는 전문가들의 반론이 없더라도, 이 두 예술가가 17년이나 동거했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도나텔로의 동상
균형미에 대한 유별난 집착을 보였던 브루넬레스키가 그의 눈에 거슬리는(균형이 맞지 않는) 모든 것을 부숴버리는 방식으로 그의 ‘성격’을 보여주었다면 (우리는 코시모가 브루넬레스키가 아닌 실용주의자 미켈로초를 중용했던 이유 역시 그의 이런 ‘완벽주의’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브루넬레스키에게 건축을 일임하는 선택은 ‘일을 지나치게 크게 벌이는 것’을 의미했다) , 도나텔로의 ‘격정’은 그의 작품에서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조각에는 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브루넬레스키처럼 균형에 집착하지도, 기베르티처럼 ‘선’의 구현에 심혈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조각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시각적 효과의 구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조각가였다. 돌에 생동감을 부여하기 위해 늘 소재와 격렬한 싸움을 벌여야 했던 그는 조각 표면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고딕적 아름다움에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는 조각의 형태와 조각의 시각적 효과 중 빛과 그림자가 구현하는 조각의 시각적 효과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최초의 조각가였다.
완성된 조각상의 실제 형태와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형상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신의 눈이 아닌, 조각품을 올려다볼 인간의 눈을 위한 조각품을 제작했다는 점에서 도나텔로는 수많은 동시대의 조각가들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시키고 있었다. 그가 조각가로서 이루어낸 수많은 혁신 역시 그가 이루어낸 이러한 발상의 전환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신이 아닌 그것을 관조하는 인간의 눈을 상상하며 긴장감과 생동감이 넘치는 조각을 구상했다는 점에서 도나텔로는 중세를 지배했던 조각에 대한 사상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Saint Mark/성 마가(도나텔로, 1411-13)
도나텔로가의 성 마가(1411-13)의 모습이다. 오르산 미켈레의 외부 벽면 벽감을 장식하고 있는 열넷 조각품 중 하나다. 오르산미켈레 건설 당시 길드 정부는 각각의 길드로 하여금 외부 벽감에 길드를 대표할 조각품을 하나씩 배치하도록 권했고, 이 중 도나텔로는 두 길드의 선택을 받아 두 점의 조각상을 완성했다 (라이벌 기베르티 역시 세 점을 위임받았다). 그중 성 마가는 Arte dei Linaioli e Rigattieri, 리넨 옷감 상인 길드의 수호 성자, 성 마가를 조각한 작품이다. 도나텔로가 약관 스물다섯의 나이에 시작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르네상스 조각을 규정하는 사상인 자연주의와 고전주의가 도나텔로를 일찍부터 사로잡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성자 마가의 자세를 살펴 보자. 그는 정면을 바라보고 서지 않고, 한쪽 다리에 무게를 싣고, 마치 앞으로 걸어 나오는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뻣뻣한 고딕적 조각품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인체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조각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도나텔로의 의도가 느껴진다. 이는 사실성을 추구했던 도나텔로의 자연주의 사상을 가시화하는 동시에, 도나텔로가 로마에서 접했던 고대 조각품들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살아있는 인체의 모습을 모방한, 한쪽 다리를 짚고 선 조각의 비스듬한 자세,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라 불리는 이 기법은 분명 그리스 조각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표정과 자세가 드러나지 않는, 마치 신의 세계의 존재와도 같이 인간을 묘사했던 이집트의 조각품에서부터 실제 사람의 모습에 가까운 조각품으로의 지양을 이루어낸 그리스인들처럼, 모든 사실성을 상실한 채 종교 건물의 장식품으로서 기둥과 벽 속에 박혀 있던 고딕 조각들을 자연으로 회귀시킨 것이 바로 르네상스 조각이 이루어낸 ‘해방’이었고, 이러한 예술사의 흐름에 있어서 도나텔로는 단연 선봉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아메넴헤트 3세의 동상(기원전 1859–1814)과 고대 그리스의 라오콘 군상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1220년 완성)의 고딕식 조각품들과 도나텔로의 대리석 다비드상(1408-9).
성 마가에는 그리스적 콘트라포스토의 답습 외에도 도나텔로가 최초로 시도하고 있던 그만의 혁신적 기법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디테일은 바로 피렌체의 특산품이었던 ‘의복’의 표현에 있어서 도나텔로가 보여준 전통과의 결별이었다.
도나텔로의 성 마가 상(좌)과 기베르티의 세례 요한 상(우)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완성돼, 동일한 교회의 벽면을 함께 장식하던 기베르티의 세례 요한과의 비교를 통해 도나텔로의 작품의 파격성을 느껴볼 수 있다. 우선 우측의 세례 요한이 걸치고 있는 토가를 살펴보자. 일정하게 둥근 곡선이 물결무늬를 그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기베르티가 고딕식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반면 도나텔로의 성 마가의 옷은 훨씬 더 사실적인, 불규칙한 주름으로 뒤덮인 형태를 보여준다. 탁월한 사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도나텔로의 성 마가는 옆에 선 세례 요한상의 ‘둥그런 곡선’을 우스꽝스러워 보이게 만들고 있다.
예술 역사가 프레데릭 하트는 도나텔로의 이러한 시도가 15세기 피렌체 조각가들의 작업 방식에서 유래한 것이라 주장한다. 조르지오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피렌체의 조각가들은 토가를 입은 성자의 모습을 조각하기 위해 물과 클레이가 섞인 용액에 옷을 담근 뒤 그것을 미리 완성해 둔 누드 클레이 모델에 입힌 후, 원하는 모양이 나오도록 손으로 옷을 매만져 연출하고선, 옷이 굳은 후에 그 모양을 모델로 삼아 조각을 깎아냈다. 르네상스의 조각가들 중에서도 재료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던 조각가 도나텔로는 눈앞에 빤히 보이는 옷의 모양새를 무시하고, 비잔틴, 고딕 양식의 도그마를 따라 둥근 선을 겹겹이 쌓는 방식으로 성자의 토가를 조각하는 일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는 양모 원단의 가공-판매를 통해 유럽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피렌체의 역사를 생각했을 때, 어쩌면 일찍이 나타났어야 했던 변화였다. 도나텔로는 ‘장인’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던 과거 피렌체의 조각가들이 시도하지 못한 이러한 ‘사실성’의 추구를 과감하게 추진시켰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성 게오르기우스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도나텔로의 초기 작품이며, 오르산미켈레의 벽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 마가상과 동일하다. 갑옷과 무기 제작자 길드, Arte dei Corazzai e Spadai의 주문으로 제작됐으며, 그들의 수호성인이었던 성 게오르기우스를 묘사한 조각품이었다. (황금 전설에 등장하는 로마의 기사 게오르기우스가 왕국에 역병을 퍼뜨리고,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히던 사악한 용을 죽이고 제물로 바쳐질 운명에 처해있던 공주를 구해내는 내용의 전설을 기반으로 두고 있는 작품이다) 조각상은 용과 전투를 벌이기 직전의 성 게오르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도나텔로는 콘트라포스토를 활용하고 있다. 다만 마치 언제라도 벽 바깥으로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게오르기우스의 자세는 전통적인 콘트라포스토(한쪽 다리에 무게가 실린 채 반대쪽 다리는 자유로운)가 아닌 두 다리가 모두 힘차게 땅을 누르고 있는 모습이다. 용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는 그의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게오르기우스의 이와 같은 자세는 도나텔로가 고려해야 했던 제작에 관련된 제한들에 의해서 탄생하게 됐다. 오르산 미켈레 성당 벽면에 조각을 위해 마련된 벽감은 도나텔로가 조각 작업에 착수할 당시 이미 일정한 크기로 완성돼 있었고, 이는 조각의 크기가 일정하게 제한돼야 함을 의미했다. 오르산미켈레의 벽면의 내부에는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들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외부에 위치한 벽감은 깊게 설계될 수 없었고, 따라서 그곳에 위치하게 될 조각상 역시 지나치게 크게 제작될 수 없었다. 허나 조각상을 작게 제작하는 일은 도나텔로를 고용한 갑옷과 무기 제작자 길드, Arte dei Corazzai e Spadai의 명예에 누를 끼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각 길드를 대표하는 길드의 호위/수호성인의 사이즈가 줄어드는 일은 길드의 권위를 깎는 일이었던 것이다. (값비싼 청동이 아닌 대리석으로 조각을 주문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들의 권위는 커다란 타격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도나텔로는 생동감 있는 콘트라포스토를 통해 비교적 작은 사이즈(2m 9cm)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조각을 구현해야만 했다.
소재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동시대 같은 도시에서 제작된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성 게오르기우스 상과 세례 요한 상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기베르티의 세례 요한상과의 비교를 통해 그의 성 게오르기이수 상이 얼마나 혁신적인 작품이었었는지를 체감할 수 있다. 게오르기우스의 얼굴을 관찰해 보자. 찌푸린 이마와 미간에 근심이 가득하다. 미소년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긴 목에서도 긴장감이 느껴진다. 단단하게 땅을 짚고 있는 두 다리와 (이후에 도난당하는 바람에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지만) 칼과 칼집을 쥐고 있던 오른손과 왼손의 긴장감이 얼굴에까지 전해진 듯한 인상을 준다. 이렇다 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세례 요한상의 얼굴과는 완벽하게 상반되는 사실적인 묘사다.
머리카락의 연출에 있어서도 우리는 비교적 인위적으로 둥근 곡선을 그려내는 고딕적인 형태의 기베르티의 기법과는 달리 홈과 상처를 통해 훨씬 더 사실적인 머리카락의 질감을 구현해내는 도나텔로의 획기적 연출을 발견한다. 동공의 처리 역시 눈동자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동공에 칼금을 내는 방식을 택한 기베르티와 달리, 눈의 중심에 홈을 만들어 그림자로 동공을 연출한 도나텔로의 게오르기우스의 눈빛이 훨씬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청동/대리석 소재의 실제 형태가 아닌 관찰자의 눈에 보이는 형상에 집중했던 도나텔로의 접근이 그 타당성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세인트 조지의 혁신은 부조 조각에서 더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르네상스 원근법을 처음 착안한 이는 브루넬레스키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는 세인트 게오루기스의 부조를 관찰하며 원근법의 계보가 그처럼 명확하게 밝혀지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나텔로는 그만의 방식으로 평면 대리석 위에 입체감을 구현해낸 것이다.
전면에 나타나는 게오르기우스, 용, 공주는 깊게, 배경에 속하는 숲과 건물은 얕게 파내는 방식으로 그림자 효과를 통해 평면의 공간에 깊이를 더함으로써 도나텔로는 최초로 부조 조각에 원근법을 활용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점으로 소멸되는 브루넬레스키적 원근법과 차별화된다) 오르산미켈레의 반대편 건물에서 반사되는 일정한 빛을 감안하여 그 앞에 선 피렌체 시민을 상상한 그의 선택은 르네상스 조각의 정신을 더없이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천상을 향해 높이 솟은 고딕 성당의 장식물로써만 활용되던 길고 마른 고딕용 장식들은 13세기부터 점차적으로 건축에서 분리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북유럽에서도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스-로마의 고대 건축을 테마로 한 조각들 역시 피사를 위시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같은 시기부터 서서히 발견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각각의 요소들이 파편적으로 발견되던 조각의 양식이 한 사람의 손에서 집결돼 그 완성된 형태를 처음으로 구현하게 된 것은 도나텔로의 초창기 작품들이었다. 이후로 르네상스 조각 양식의 전파는 급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도나텔로 역시 긴 활동 기간 동안 이탈리아 전역을 떠돌면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르네상스 조각 양식을 구현해낸다. 르네상스 조각에 대한 이야기 역시 미켈란젤로에 관한 포스트에서 이어나가도록 하겠다.
서양 조각-르네상스
15 세기 이탈리아 문화 의 특징이었던 이탈리아 고전 학습의 부흥은 모든 예술 분야에서 고전 디자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동등한 열정과 평행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이탈리아 인들에게 황금 시대의 표현처럼 보이는 많은 고전 작품의 표식이었던 신선하고 감각적 인 은혜에 대한 열렬한 기쁨이 보편적이되었을 때 예술에서 고전적 이상을 완전히 지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클래식 모델로의 전환은 생각보다 덜 갑작스럽고 혁명적이었습니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이탈리아 예술의 역사를 통틀어 고전적인 구조와 장식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반복해서 12 세기와 13 세기에 고전적인 형태 (아칸서스 잎, 조형 장식품, 부조의 휘장 처리)는 종종 모방됩니다. 13 세기 중반에 일했던 Nicola Pisano 는 많은 이탈리아 예술가, 특히 조각가 중 처음으로 영감을 얻기 위해 로마의 선조들 에게 의지했습니다.
초기 르네상스
조각은 “르네상스 스타일”로 식별되는 새로운 문체 특징과 예술적 관심사를 개발 한 피렌체 최초의 예술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르네상스의 시작을 1401 년 피렌체 대성당 세례당의 청 동문 조각 경쟁으로 연대를 기록했습니다. 청 동문에 대한 경쟁 구호는 실제로 조각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피렌체 조각의 발전은 도나 텔로의 풍부한 창의력에 접근 할 그림이 거의 없었지만, 위엄있는 기념비적 인 스타일에서 편안한 달콤함으로의 그림 발전과 대략 유사합니다.
그의 친구 인 건축가 Filippo Brunelleschi 와 화가 Masaccio 와 마찬가지로 Donatello 는 서양 역사상 가장 뛰어난 독창적 인 예술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의심 할 여지없이 피렌체의 고대 시대 개념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가 조형기에 공부할 수있는 골동품 조각은 상대적으로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15 세기의 두 가지 주요 프로젝트 인 피렌체 대성당과 오르 산 미켈레 길드 교회의 조각 장식을 담당하는 성숙한 예술가로 처음 등장합니다.
그의 St. George , 시작 c. Orsanmichele의 Armourer ‘s Guild 의 틈새 시장 에 대한 1415는 다른 어떤 조각보다 조각의 새로운 방향을 더 잘 나타냅니다. 여기에서 그는 휴식과 움직임에있는 인간의 모습에 대한 깊은 지식을 드러내며 이미 비율과 정적 및 역학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습. 그러나 안식과 행동 사이의 긴장 (사실상 멈춤의 표현)도 심리적 업적이며 초기 조각에서는 거의 비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조각의 기념비적 단순함과 힘은 비행기의 미묘한 조작과 관찰자가 재료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대리석 조각의 기술적 인 미덕에 의해 달성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 인물은 몸통 중심 축의 자연스러운 회전과 체중 이동을 강조하는 다리와 어깨 의 배치 인 contrapposto 를 사용하며 , 이는 인물의 정면을 애니메이션화하는 수단으로 고전 그리스 미술에서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Donatello의 St. George 사본 St. George , Donatello의 대리석 조각상 사본, c. 1415. © Zvonimir Atletic / Shutterstock.com
에서 구호 가 차지하는 틈새 시장에서 세인트 조지 , 도나 텔로는 더 큰 소개 혁신 무제한 것이 었습니다 반향 이탈리아어 예술과 일반적으로 서양 미술에 있습니다. 부조는 회화의 2 차원 성과 풀 라운드 조각의 3 차원 성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야하기 때문에 조각가들에게 항상 문제였다. Donatello는 매우 낮은 부조 ( rilievo schiacciato )를 고안했습니다. 평면 의 미묘한 모델링 은 여전히 무결성을 존중하면서 깊이와 공간에서 움직이는 인물 의 환상 을 암시합니다. 비행기의. 그는 오랜 경력을 통해이 구호 스타일의 잠재력을 계속 개발했으며 피렌체에서 실행 된 구호 조각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짧은 경력에서 Nanni di Banco 는 Donatello 만큼 번창 하고 창의적 이었습니다 . Isaiah 와 같은 그의 초기 작품에서 그는 Donatello보다 고전적인 이상에 더 가깝게 접근했으며 Porta della Mandorla에서의 후반 작업에서 그는 세기 중반 이후 가장 큰 영향을 미칠 편안한 스타일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1411 ~ 13 년경 그는 Quattro Santi Coronati 를 처형했습니다. ( “4 명의 왕관을 쓴 성도”)는 Orsanmichele의 woodworkers와 stoneworkers 길드의 틈새 시장을 위해. 이 커미션에서 그는 조각가가 직면 한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 인 틈새 공간의 한정된 공간을 위해 라운드에서 구상 된 그룹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일부 인물은 여전히 휘장과 머리에 특정 고딕 화 요소를 유지하고 있지만 주요 인상은 로마 상원 의원 그룹입니다. 그룹은 서로의 공간적 관계와 그들이 모두 참여하는 일종의 음소거 대화로 묶여 있습니다.
Nanni di Banco : Quattro santi coronati Quattro santi coronati ( “네 왕관을 쓴 성도”), Nanni di Banco의 실물 크기 대리석 조각, c. 1411–13; 피렌체 Orsanmichele 교회 외부. Brogi—Alinari / Art Resource, 뉴욕
Lorenzo Ghiberti 는 세례당의 청 동문 경쟁에서 우승했습니다. 그는 1403 년에 일을 시작하여 1424 년에 문을 제자리에 두었습니다. Ghiberti의 명성은 그의 두 번째 문인 낙원 의 문 (1425 ~ 52)에 있습니다. 금박을 입힌 청동 부조는 직사각형 형식이고 프레임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거의 그림처럼 취급됩니다. 지면이 단순히 중립적 인 배경이었던 초기 문과 달리 여기에서는 하늘과 공간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처리됩니다. 그림은 실제 존재하는 것보다 더 깊은 구호를 제안하기 위해 풍경이나 원근법으로 렌더링 된 아키텍처 에 배치됩니다 . 그가 처음으로 청 동문을 만들었을 때 Ghiberti는 고대부터 실물 크기의 청동상을 처음으로 주조하기로했습니다. Orsanmichele을위한 St. John the Baptist (1412–16). 그림과 그 커튼은 Ghiberti가 늦은 고딕 양식에 대한 강한 고수 를 보여 주지만 이 작업으로 그는 기술적으로 르네상스로 옮겼습니다. Donatello와 Nanni di Banco의 영향은 오래된 전통에서 Orsanmichele에 대한 1419 ~ 22 년 의 St. Matthew 를 해방시킵니다 . Ghiberti는 청동 창립자이자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조각가와 화가를 양성 한 상점의 주인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Lorenzo Ghiberti : 낙원의 문 Gates of Paradise , 피렌체 세례당 동쪽에서 금을 입힌 청동 문, 로렌조 기 베르 티, 1425 ~ 52. SuperStock
중국 조각가 Jacopo della Quercia 는 15 세기 시에나의 가장 중요한 조각가였습니다. 그는 시에나의 중앙 광장 인 캄포 광장의 공공 분수 인 폰테 가이아 (1414–19)를 처형했으며 시에나 대성당의 세례당에있는 세례 용 세례에 대한위원회를 수상했습니다. 항상 미루는 예술가였던 그는 Donatello와 Ghiberti를 포함한 다른 조각가에게 마침내 부조가 수여 될 정도로 글꼴 작업을 연기했습니다. Jacopo의 주요 작품은 볼로냐의 San Petronio (1425–38)의 주요 포털 주변의 부조 조각입니다. 저 부조 인물의 조각 적 처리와 그것들을 담을 수있는 적절한 공간 제안은 마사치오의 그림과 유사하다. 극적인 활기와 강력하게 구상 된 형태는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켈란젤로 .
Jacopo della Quercia : 이브의 창조 1424 년에 시작된 Jacopo della Quercia의 볼로냐 산 페트로 니오 정면 중앙 포털의 대리석 부조 이브의 창조 . Anderson—Alinari / Art Resource, 뉴욕
Donatello는 15 세기 2 분기 피렌체 조각품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성당을위한 일련의 선지자와“Cantoria”또는 노래하는 발코니, Orsanmichele의 성도들, San Lorenzo의 Old Sacristy를위한 장식적인 부조와 청동 문, 그리고 청동 David를 처형했습니다. (현재 피렌체의 Bargello에 있음) 초기 르네상스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 고대의 정신을 되 찾는 데 더 가까워졌습니다. 사실, 남성 누드의 독립 조각품에 대한 아이디어는 고대부터 전례가 없었습니다. 1443 ~ 53 년 동안 Donatello는 파도바에서 산토 광장에있는 교회 앞에 서기 위해 Gattamelata의 승마 동상을 집행했습니다. Gattamelata라고 불리는 Erasmo da Narni는 condottiere 또는 용병 부대의 지도자였으며 중요한 위치에 올랐습니다. 이 동상은 말과 기수 모두의 자연을 이상화 한 것이며 고대를 재 해석 한 것입니다. 도나 텔로 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의 골동품 상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1431–33). 그는 세인트 마크 에서 골동품 청동 말의 포즈 인 고대의 개념을 사용합니다. ‘베네치아에 있고, 그 시대의 군마의 형태. 기수는 준 골동품 갑옷을 입고 교회 내부에있는 Gattamelata의 무덤에있는 인형과 거의 또는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Donatello는 특정 사항에 관심이 없지만 잠재적 귀족을 드러내는 인간의 이상화되고 일반화 된 측면에 관심이 있습니다. 파도바에서 도나 텔로의 존재는 생산적인 지역의 청동 조각가와 노동자 학교를 탄생 시켰고, 그곳의 높은 제단에 대한 그의 부조는 북부 이탈리아의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피렌체로 돌아온 그의 첫 번째 작품 중 하나는 대성당의 세례당을위한 막달라 마리아의 목조 동상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작업에서 감지 될 수있는 긴장된 에너지와 형태의 의식적 왜곡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입은 쇠약해진 모습에서 분명해진다. 이 같은 감정주의와 왜곡은 그의 마지막 작품 인 피렌체 산 로렌조 교회의 강단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Antonio Pollaiuolo는 그의 그림에서와 같은 근육 활동과 직선 운동을 조각에서 표현합니다. 그는 Donatello에서 발견되는 감정에 대한 관심은 없지만 에너지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작은 청동 헤라클레스와 안 테우스 (1475 년경)는 고전 신화에서 나온이 두 명의 강력한 남자 사이의 투쟁을 강력하게 묘사합니다. 팔다리 의 각진 윤곽 과 인물 사이의 들쭉날쭉 한 공극은 모두 팽팽함, 근육질 및 정서적 긴장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며 작품은 현대 조각상의 가장 초기 사례 중 하나입니다.
Antonio Pollaiuolo : Hercules와 Antaeus Hercules와 Antaeus , Antonio Pollaiuolo의 청동 조각품, c. 1475; 피렌체 Bargello에서. Alinari / Art Resource, 뉴욕
일반적으로 세속적 이며 종종 이교도, 주체 및 때로는 유틸리티 대상 (잉크 병, 촛대 등) 의 작은 청동의 인기가 세기 말에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Mantua의 Antico가 만든 우아하고 세련된 골동품 신들과 파도바의 Riccio가 만든 훌륭하게 모델링 된 satyrs는 거의 탁월하지 않은 그러한 작품의 표준을 세웠습니다. 청동 조각상은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16 세기 주요 조각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Pollaiuolo와 완전히 대조적으로 Desiderio da Settignano 는 여성과 어린이의 초상화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피렌체에서 중요한 두 개의 공공 기념물 인 Santa Croce 에있는 Carlo Marsuppini의 무덤 (c. 1453–55)과 산 로렌조 (1461) 에있는 성찬 의 장막 . 데시 데 리오의 죽음 이후 조수들이 조립하고 완성한 성막은 피렌체 조각에서 새로운 트렌드가 형성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중앙 패널은 선형 원근법을 사용합니다. 공간을 렌더링합니다. 그 공간으로 이동하는 그림은 윤곽을 강조하고 움직이는 커튼을 강조하는 선형 방식으로 정의됩니다. 측면의 전체 둥근 천사의 모습은 섬세하고 섬세한 표면으로 모델링되어 Donatello의 강하고 활기찬 초기 성인과는 매우 다른 편안하고 달콤한 모습을 만듭니다.
안토니오 로셀리 노는 산타 크로체 에있는 레오나르도 브루니 (1445 ~ 49 년경) 의 무덤에서 형 베르나르도와 협력 했지만 곧 가족 사업에서 지배적 인 인물이되었습니다. 피렌체의 산 미니 아토 알 몬테 (San Miniato al Monte )에있는 포르투갈 추기경 무덤 (1461–66)의 위대한 조각 단지는 데시 데 리오의 현대 작품과 동일한 일반적인 경향을 보여줍니다. 무덤은 부드럽고 편안한 천사와 둥근 모양의 부드러운 마돈나와 그리스도 차일드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Agostino di Duccio , Mino da Fiesole , Luca della Robbia 와 같은 예술가들 에게서도 비슷한 경향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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