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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사 [디자인 역사]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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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디자인의 역사: 왜 디자인 역사를 배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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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Understanding Design History Will Make You A Better Designer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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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역사 by 희정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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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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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디자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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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우리나라 디자인 역사 조선미술전람회의 특징과 해방이후 한국사회에 미친영향 | 조선미술품전람회는 일제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1922년 창설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의 특징과 해방이후 한국사회에 미친영향 | 조선미술품전람회는 일제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1922년 창설되었다. 근대적인 미술로서의 공예 개념의 정착을 명목으로 세워졌으며 신분적으로 천시되어 왔던 장인들에게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공인받을 수 있는 등용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모전이라는 형식을 빌려 공예가들에게 아류적 경향과 표절, 유행적 심리, 일본화 경향 등의 허위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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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역사(The Story of Design)(양장본 HardCover)(원서/번역서: [해외]Story of Design (hardback)) | Charlotte | 시공문화사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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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디자인의 역사(The Story of Design)(양장본 HardCover)(원서/번역서: [해외]Story of Design (hardback)) | Charlotte | 시공문화사 – 교보문고 Updating “역사를 통해 디자이너와 기술자는 미래가 어떻게 보일 것이며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를 결정해왔다. 연구와 디자인, 개발에 쉼 없이 투자하는 이들이야말로 세계 최대의 문제들을 해결한다.”- 제임스 다이슨 (다이슨의 디자인 기술자 겸 창립자)“이 책은 탄탄한 연구와 풍부한 … [디자인의 역사(The Story of Design)]는 선도적인 디자인 역사가 샤롯과 피터 피엘이 디자인의 전개과정을 추적하면서 독특하고 보편적인 창조 활동이 현실세계에서 갖는 중요성과 미래의 사회적 역할을 규명한다. 책은 디자인의 매력적이고 다양한 이야기를 최초의 …디자인의 역사(The Story of Design), Charlotte,, 시공문화사, 9788955923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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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사 [디자인 역사]
디자인 역사 (스압주의)
원시시대에는 주거지를 꾸미거나 몸을 치장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라기 보다는
예측불허인 자연의 힘을 통제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출발했다.
원시인들은 생존을 위해 도구를 만들고 비바람과 햇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움집을 만들기도 했으며,
당시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인 힘으로 보호하기 위한 주술적인 방법으로
인간들은 사람과 짐승의 형상으로 벽화나 조각을 만들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초를 세운 최초의 사람은 수메르인으로 기원전 3500년경부터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합류하는 지역에 수많은 도시를 건설하고 인류 최초로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공통의 종교, 수학, 법률 그리고 건축법을 발달시켰다.
수메르인들은 왕이 죽으면 저승에서도 사람들을 거느릴수 있도록 모든 가족과 노예들은 물론
왕궁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함께 묻었기 때문에 부장품을 통해서 그들의 찬란했던 문명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흙으로 빚어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하여 신전을 중심으로 한 정교한 도시를 만들었다.
이 건물 내부에는 신전뿐만 아니라 상점, 일터, 거주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방어 및 공공 사업같은 작업과 노동의 분업을 통해 도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설형 문자를 개발하여 계약이나 규칙, 공고 그리고 통계나 법률 등을 기록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함무라비 법전이다.
영혼불멸에 대한 그들의 맹목적인 관심사는 살아있는 신으로 간주되었던 그들 지배자의 사후 안락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이집트의 건축물과 예술품들은 파라오의 영혼의영원한 영광을 위해 존재하였다.
이집트 인들은 그 밖에도 문학, 의학, 고등 수학을 발달시켜 인류문명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영혼불멸을 믿은 이들은 지상에서의 행복을 죽은 후에도 누릴 수 있도록 무덤에 온갖 사치품들을 함께 묻었다.
따라서 무덤의 벽면에 그려진 벽화와 상형 문자들도 죽은 자의 생전의 일상 생활을 세세히 묘사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이집트문명 중 피라미드 건축과 스핑크스는 불멸의 오리엔트문화로서 거대문명발전의 초시를 이루었다.
초상화와 조각상의 인체는 엄격한 공식에 따라 묘사되었다.
눈과 어깨는 정면을 향하고있고, 머리와 팔, 다리들은 측면으로 그려졌다.
또한 벽화의 표면은 수평의 선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마르고 어깨가 넓으며 엉덩이가 작은 인물들이
머리 장식을 하고 치마 모양의 옷을 입은 채 한쪽 다리를 내밀고 있다.
인물의 크기는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데 파라오는 거인처럼 묘사되어 있는 반면, 시종들은 난장이 같이 그리고 있다.
그리스 문명은 서양의 거의 모든 업적의 토대가 되었는데,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그리스 철학의 중심 개념인 것처럼, 그리스 예술의 주요 주제는 인체 조각이었다.
그리스 철학이 사고의 명석함과 조화질서를 강조했듯, 그리스 미술과 건축 역시 균형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디자인은 색채보다 선과 형의 균형미에 중점을 두었으며
소재는 주로 식물이나 말 사자 같은 동물 나선형이나 기하학적 형태를 사용했다.
그들은 뛰어난 화가여서 벽화를 그렸고, 목재 패녈에도 그림을 그렸으며,
너무나 실물같아서 새들이 벽화 속의 과일을 쪼아먹으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기화에는 보통 그리스 신화 속의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가 전쟁이나 잔치와 같은 현세적인 주제가 주로 그려져 있다.
미술품속에 최초로 누드를 도입한 것은 그리스 인들이었다.
그들 사회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체력 증진으로 단련된 육체와 지적 토론으로 연마된 정신이 조화된 인물이었다.
그리스 건축가들은 흰대리석의 “파르테논 신전” 을 통해 아테네의 위대함을 나타내고자 했다.
파르테논 신전의 완벽한 미는 직선에서 벗어나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약간의 곡선형을 띠고 있는데 기인한다.
건축을 거대한 조각품으로 간주했고 똑같이 조화와 이상적 비례의 규칙에 맞추어 건립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제국이 건설로 그리스 미술은 몇 개의 작은 도시 국가를 벗어나
세계의 절반을 해당되는 지역의 조형언어로 발전했다.
이 후기의 미술은 그리스 미술이라고 하지 않고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동방의 나라에 건설한 제국의 이름을 따서 헬레니즘미술이라고 한다.
이 제국의 풍요한 수도들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라아의 안티오크, 그리고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등에서는
도리아 양식이나 이오니아식 건축의 우아함에서 벗어나 기원전 4세기 초에 고안된 코린트 양식이 유행했으며,
일반적으로 건물 전체에 더 많은 화려한 장식물을 입혔다.
그리스 미술의 양식과 창의성은 오리엔트 왕국들의 규모 및 전통과 융합되었다.
그리스 미술은 대부분 헬레니즘 시대에 변화를 겪게 되는데
헬레니즘 미술은 초기 그리스 조각의 조화미와 세련미 대신 거출고 격렬한 작품을 선호했으며,
보는 사람들에게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인상을 주기를 원했고, 또 확실히 보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기원전 3세기경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섬에서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교류가 시작되었는데,
처음에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압도당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미술뿐만 아니라, 시, 수사학, 철학 등에도 매료되어
많은 지식인들과 장인들(교사, 학자, 사상가, 조각가, 화가)을 고용하였다.
로마인들은 당시 유행했던 헬레니즘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스 조각들을 대량으로 복제하긴 했으나,
점차 자신들의 특징적인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로마 예술은 고전기 그리스 예술보다 지적이고 이상적인 면은 덜하였지만 현실적이고 기능적이었다.
로마의 건축가들은 아치와 궁륨, 돔을 개발한 것 이외에도 콘크리트를 최초로 사용했다.
이같은 혁신적인 건축기술로 인해 로마인들은 최초로 받침대 없이 거대한 내부 공간을 덮을 수 있게 되었다.
콜로세움이라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수용할 수 있으면서도
매우 효율적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오늘날 스타디움의 디자인에도 응용되고 있다.
중세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부터 르네상스 시대 까지(5세기~15세기) , 약 1000년 동안의 시기를 말한다.
기독교가 내세의 구원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지상의 물체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경향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누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심지어 옷을 입고 있는 육체도 해부학적인 정확성이 무시되곤 했다.
신학자들은 산지들이 물질의 아름다움을 통해 신성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믿었고,
그 결과로 매혹적인 모자이크와 회화, 조각품이 만들어졌다.
초기 기독교는 합법적이지 않은 종교여서 온갖 박해와 수모를 겪었으며 박해가 심할수록
그들은 로마의 지하묘소 카타콤에 숨어서 복음을 전파하고 벽과 천장에는 벽화를 남겼다.
국교로 승인후 고도의 기능을 갖춘 건축가에 의해 여러 곳에 거대한 성당이나 수도원이 세워지고
교회 벽면과 천장을 장식하기 위한 회화나 초기 벽면 모자이크가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 졌다.
건축에서 신성에 대한 지향은 보다 밝고 가벼운 건물의 형태로 나타났다.
육중하고 거대한 로마 건축은 서서히 사라지고, 이상적인 기독교인 상이 건축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밖에서 보면 소박하지만 내부는 성령을 상징하는 모자이크, 프레스코, 스테인드 글라스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중세 미술의 황금기로 불려지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긴 기원후 330년경부터
이 도시가 투르크 족에 의해 멸망한 1453년까지 지속됐던 지중해 동부 지방의 예술이다.
로마가 야만족에의 의해 멸망하여 잿더미에 있을 당시 비잔티움은 초기 기독교 미술을 발전시켰으며
문명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비잔틴 미술과 건축의 복잡한 형식으로부터 오늘날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의미의 ‘비잔틴’이라는 단어가 유래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모자이크 작품 중 몇개가 5~6세기 터키의 비잔티움과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제작되었다.
모자이크는 국교로 공인된 기독교의 강령을 널리 유포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므로
그 주제는 대부분 종교와 관련이 있었고, 예수는 전지전능의 지배자나 설교자로 표현되었다.
당시 모자이크는 반짝이는 황금의 배경과 후광에 둘러싸인 성자들을 화려하고 장대하게 묘사한 점이 특징이다.
로마네스크라느 명칭은 ‘로마와 같은’이라는 뜻으로 19세기에 고안된 말이다.
원래 이용어는 주로 건축에서 사용된 것으로, 11세기 후반과 12세기 유럽의
전형적인 건물들이 두꺼운 벽과 아치가 있는 고대 로마의 석조 건축과 닮았음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가장 특징적인 형태는 궁륭(vault)의 이용이다.
가장 간단한 궁륭은 옆으로 확장된 아치형으로 원통형 또는 터널형 궁륭이다.
이런 종류의 지붕은 아주 무겁고 건물내부에 채광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고대 로마의 건축가들은 교차 궁륭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두 개의 원통형 궁륭이 직각으로 교차하여 네 개의 버팀기둥 위에 닫집 모양을 이룸으로써 만들어진다.
평면에다 교차 궁륭을 짓는 것이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개방된 이 형태는 건물 내부에 더 많은 빛이 들어오게 해 주었으므로 호평받았다.
이 두형태, 원통형 궁륭과 교차 궁류은 거의 모든 로마네스크 교회에 이용되었다.
시각적으로 이 궁륭들은 견고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외관은 유연한 형태를 띤다.
중세예술의 업적 중에서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경이로운 업적을 필적하는 것은 바로 고딕 양식의 대성당들이었다.
늑골 궁륭과 부연 부벽이라는 외부 버팀목의 발명으로 1200~1500년 사이
건축가들은 세계 건축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이 솟구친 내부를 가진 복잡한 구조물들을 건설했다.
고딕 성당은 육중한 벽대신, 커다란 스테인드 글라스를 설치한 창을 통해 밝은 빛이 들어와 내부를 환하게 밝힐수 있었고,
격자 문양과 더불어 위로 상승하려는 듯한 수직성 또한 고딕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건축가들은 첨두 아치를 사용하여 높이를 실제로 높였을 뿐아니라 보기에도 더 높아 보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고딕 성당에서 주로 사용된 장식물은 조각, 스테인드 글라스, 그리고 타피스트리를 들 수 있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중세 정신의 진수로 이 안에 설치된 스테인드 글라스는 전 면적이 약 896m 에 이른다.
중세의 직조인들은 당시의 일상생활을 세밀하게 묘사한 고도로 섬세한 타피스트리를 만들었다.
이러한 양모와 실크가 배합된 걸개들이 성이나 교회의 차가운 벽조를 장식했다.
베틀 뒤에는 커다란 그림을 놓고서 직조해 나갈 때마다 디자인을 모방했다.
1400년대 초기, ‘다시 깨어나다’는 의미의 르네상스는 처음에 단테와 조토의 출생지이며
부유한 상업도시인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미술가들에 의해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 과거의 미술개념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로마와 베네치아로 전파되었고
1500년 북유럽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으로 퍼져 나갔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리스, 로마의 미술과 문학이 재음미되었고 인체와 생태계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가 이루어졌으며,
자연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팽배하였다.
해부학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도움으로 화가들은 초상화, 풍경화, 신화나 종교내용을 주제로
한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러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예술가의 지위도 상승하여
르네상스 전성기(1500~1520)에는 레오나르도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거장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르네상스 시기에 이루어지 기술적인 혁신과 창조적인 발견은 현실을 표현하는 새로운 양식의 등장을 가져왔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발견은 회반죽된 벽 위에 그리는 프레스코 화나 나무 판자 위에 그리는 템페라 화 대신
캔버스 위에 그리는 유화가 발명된 것이다.
이 발명으로 인해 회화는 단순히 소묘를 기초로 채색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빛과 그림자를 사용하여 부피감을 살리고,
원근법을 이용하여 3차원적인 공간감을 주었으며, 피라미드 구성도 발달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레오나르도는 그 핸섬한 용모와 지성, 매력으로 인해 국제적인 명성을 날렸다.
그의 관심사는 해부학, 건축공학, 천문학, 수학, 자연사, 음악, 조각, 건축, 회화등 여러 방면에 이르고 있어
그는 역사상 가장 다방면에 걸친 천재로 일컬어 진다.
그는 운하를 설계했고 중앙 난방시설을 고안해 냈으며 늪의 물을 빼내는 방법과
혈액 순환에 대해 연구했고 인쇄기와 망원경, 휴대용 폭탄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는 최초로 비행 기계를 고안했고 인체의 내부 구조를 처음으로 그림을 통해 설명하였다.
그는 생전에 20개의 작품밖에는 제작하지 못했는데, ‘모나리자’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 초상화는 여러면에서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기준을 정립한 것인데,
모나리자의 모리 뒤에 있는 소실점으로 모든 선들이 집중되는 원근법을 사용하였으며,
기하학적인 구성의 중요성을 정착시킨 삼각형 구도를 활용하였다.
모나리자의 손을 보면 레오나르도가 해부학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한때 병원에서 살며 인체의 골격에 대해 연구했고 시체를 해부해 보았다.
미켈란젤로 (1475~1564)
미켈란젤로는 건축가, 화가, 조각가, 공학자로 활약할 정도로 매우 광범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일체 제자를 두지 않았고, 자신이 작업하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각을 ‘대리석 안에 갇혀있는 인물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함’이라는 의미의 ‘피에타’는 레오나르도에게 배운 피라미드 구도를 사용했고
성모 마리아의 평온한 얼굴은 그리스 조각의 사실적인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는 인류의 탄생과 죽음을 표현하는 340여개의 인물상을 그려넣어
르네상스 시기를 통틀어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이런 대작을 제자도 쓰지않고 혼자 4년만에 완수했다는 것은 이 작업에 대한 그의 집념과 열정을 증명한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완성한 29년 후 같은 성당의 제단 벽에 프레스코 화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바로크’란 용어는 허세부리고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종종 사용되지만,
17세기는 렘브란트나 벨라스케즈와 같은 예술적인 천재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미술의 영역을 일상생활로까지 확장시킨 시기이다.
바로크 시대는 1600년 경 로마에서 시작되었는데
그장 로마 교황청은 반종교개혁 이후 그들의 승리를 자랑하기 위해 엄청나게 사치스런 성당이나
일생에 한번은 반드시 보아야할 건축물과 예술 작품을 통해 신도들을 끌어 모으고
그들의 시선을 압도하려는 목적으로 예술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플랑드르 같은 카톨릭 국가에서는 종교미술이 전성기를 맞았고,
반대로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북부 유럽의 신교국에서는 종교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금지 되었다.
따라서 미술의 소재가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등 일상 생활로 확대되었다.
르네상스에서 갈라져 나온 바로크 미술은 합리주의와 정적인 요소를 중시하던 르네상스와는 달리
감정적이고 역동적인 스타일을 강조했다.
‘로코코’란 용어는 원래 더위를 피하기 위한 석굴이나 분수를 장식하는 데에 쓰이는
조약돌 혹은 조개 장식을 말하는 ‘로카이유’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로 실내장식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로코코 는 루이 15세가 통치한 1723~74년 동안 파리에서 성행했던 미술 사조이다.
1976년 무렵 프랑스에서는 이미 뒤떨어진 유행이 되었으나 독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중부 유럽에서는
18세기 말까지 사치스런 궁전이나 교회를 장식하는 데 널리 유행하였다.
로코코 양식이란 말 그대로 장식적인 예술로서 곡선적이고 우아한 장신구들을 진열해 놓은 공간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러한 저택의 마루는곡선형으로 최고급 고블랭산 소파천을 씌우거나 상아와 귀갑으로 장식했다.
옷이나 은제 식기들, 도자기도 꽃무늬와 조가비, 나뭇잎 같은 소용돌이 무늬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는 마차까지도 직선이 아닌 소용돌이 장식이 달린 곡선으로 디자인 하였는데,
말에는 깃털과 보석으로 장식한 마구를 달았다.
로코코 예술은 장식적이었으나 당시의 무능한 귀족 계급만큼이나 비실용적이었다.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기계혁명이자 생산혁명이고 사회혁명인 동시에 디자인혁명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대적으로 프랑스혁명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영국에서는 명예혁명 이후
상공업이 크게 발전하여 기술혁신에 필요한 자본이 축적되어 있었고 기업가들의 열의도 대단해졌다.
최초로 산업혁명을 이룸으로써 자연히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워질 만한 지위를 차지한 후에
자유무역론을 내세워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박람회장 건물인 수정궁은 주철로 된 구조물의 미학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각국의 기계공업의 성과를 한곳에 모은 것으로 전시품들은 예전처럼 공예가의 수공 기술로 만든 것이 아니라
기계로 제작되어 미적 수준이 낮았으나, 이 박람회는 새로운 기계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고
디자인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우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만국박람회 이후 1860년 뉴욕에는 시민을 위한 대중공원인 센트럴 파크가 만들어졌고,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는 철골 구조의 에펠탑이 세워지는등 새로운 형태의 디자인이 이루어 졌다.
윌리엄 모리스는 비평가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존 러스킨의 영향을 받아 19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미술공예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일찌기 식민지개척에 눈을 뜬 대영제국은 여러 가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수공예에서 탈피하여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등 산업혁명을 일으켜 유럽세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세계 지배를 꿈꾸며 새기술에 의한 발전을 세계만방에 과시하려고
1851년 런던에서 제1회 만국박람회를 개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당시 17세의 소년 모리스는 미적 가치가 떨어짐을 크게 실망한 후에
러스킨의 영향을 받아 19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미술공예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는 산업혁명의 결과로 나타난 자연파괴, 기계제품의 범람, 수공기술의 낙후 등을 비판하면서
특수제품에만 이득을 주는 기계를 파괴해야 한다며 사회무질서를 바로잡기위해서 미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나선것이다.
1861년 마샬포크너상회를 설립하여 관리자겸 공장장을 겸하면서
벽면장식과 조각, 스테인드 글라스, 금속세공, 가구를 제작하는 등 디자인을 하여
기계에 의한 기쁨없는 노동을 윤리적인 입장에서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러스킨과 모리스의 기계사용을 거부한 미술공예운동은
벽화나 조각을 고급미술로 생각하여 일상품을 저급으로 본 조형이론에는 근대화에 영향하는 모순성도 있었다.
반면에, 공예를 수준 높은 예술로 여기며 사회개혁운동을 전개시켰으며
이후 독일 공작연맹이나 바우하우스의 조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수공예의 부활을 역설하기 위해 순수한 인간의 노동력만으로 디자인하고자 했던 모리스의 작업은
중세기적인 원시 상태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것이었으므로
르네상스 이래 도입되었던 모든 문명을 거부하는 것과 같아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모리스가 실천가로서 역량이 부족하였고
비록 만년에 지극히 수동적인 태도로 기계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할지라도
민중을 위한 조형을 역설하고 ‘만인이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예술’을 추구했다는 점과,
산업혁명으로 파괴된 인간성과 미의 회복을 목적으로 미술과 공예를 통일하며 수공예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수공예의
사회적 책임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모리스는 20세기 예언자이며 근대 디자인 운동의 아버지였다고 할 수 있다.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 1834-1896
영국의 공예가, 시인, 사회사상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사상과 실천은 근대디자인의 출발점이며 이후 디자인의 역사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그의 문제 의식의 출발은 무엇보다도 당시 산업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생산품의 질적 저하와 인간 노동의 소외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전의 중세 사회을 이상으로 간주하고 기계생산을 부정했으며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했다.
또 그는 스승인 존 러스킨의 사상을 이어받아 ‘예술의 민주화’와 ‘예술의 생활화’를 열렬히 주장하였는데,
이는 바로 근대 디자인의 이념적 기초가 되는것이다.
1861년에는 모리스, 마샬, 포크너 상회를 설립하여 직접 공예품을 제작하는 등 이념의 실천에서도 매우적극적이었다.
1890년에는 캠스코트출판사를 설립하여 중세의 필사본 전통의 계승을 시도하였다.
전반적으로 낭만적이고 유미주의적인 의식의 소유자였던 모리스는 근대디자인의 선구자로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대체로 그의 사상과 실천은 복고주의, 엘리트적 실천, 시대착오적인 기계의 부정이라는 한계와 모순을 드러냈다.
아르누보는 1890년부터 약 20년간 벨기에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제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디자인등
모든 장르에서 새로운 생명과 풍부한 혁신을 불러일으킨 장식미술 운동이다.
이 운동을 통하여 선과 색채, 면과 형태라는 조형적 요소에 새로운 장식적 가치가 부가되었으며,
종합적인 디자인의 수단으로서 새로운 의의를 갖게 되었다.
또한 그것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예술의 세계에 끌여들여 조형 예술과 응용 미술의 구별을 없애려 한 운동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아르누보는 전체적으로 19세기적인 양식으로 부터 벗어나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 하였으며,
궁극적으로 20세기 반예술 운동의 선두에 위치하였다.
아르누보의 양식적인 기원은 영국의 미술 공예 운동에 두고 있으며 1892년 부터는 브뤼셀이 중요한 중심지 주의 하나가 되었다.
아르누보 양식의 발생 배경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면
산업혁명과 새로운 재료에 의한 공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새로운 건축 주제의 필요성에 관한 인식이라고 할수있다.
첫째로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으로 인해 철의 제조 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함과 동시에
방적, 섬유 공업의 발전으로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해져, 도시의 인구집중을 초래하게 되었다.
둘째, 건축에 있어서 철이 값싸게 공급되고 유리 기술의 진보로 빛이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돌을 이용한 축조 방법을 근본적으로 동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셋째, 이러한 새로운 재료의 발명과 이것을 구축하려는 공학 기술의 진보는 건축을 지금까지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
건축주제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동안은 사원이나 궁전이 대 건축을 지칭하였지만 산업 혁명에 의한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귀족이 아닌 노동자의 주택, 백화점, 증권거래소, 철도의 발달에 의한 정거장과 각종공장 등으로 건축의 주제를 확대시켰다.
아르누보는 새로움이라는 개념으로 해석되었으며 주로 곡선을 사용하여 식물을 모방한 까닭에
‘꽃의 양식’, 물결의 양식, 당초양식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아르누보 양식은 과거의 복고주의적 장식에서 탈피하여 상징주의 형태와 패턴의 미학을 받아들임으로써
미술을 모든 생활에 실용화하여 했던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아르누보의 명칭은 New Art(신예술)이란뜻으로, 모던 스타일(영), 유겐트 스틸(독)등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식물모티브에 의한 곡선의 장식가치를 강조하여 장식과 평면과의 유기적 연관성을 추구 했으며,
이론적, 사회적으로 ‘공예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상생활 환경의 혁신을 지향하였으나,
본질적으로는 유미적이고 개인주의적 경향이 짙어 기능 및 기계생산에 진정한 대응을 못한채,
20세기초 상업주의의 비속화속에서 자멸하였다.
19세기말 프랑스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아카데미즘 미술운동으로,
1897년 요젭 호프만, 요젭 마리아 올브리히, 구스타프 클립트 등이 빈에서 결성한 그룹이다.
분리파라는 이름은 아카데믹한 예술 그리고 과거의 모든 예술로부터의 분리를 목표로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으로서,
이들 중 다수는 요젭 호프만이 설립한 빈 공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과거 예술과의 단절을 주장하고 그들이 속도, 폭력, 전쟁의 영광스런 근대 세계라고 생각했던 것에다 예술을 통합시키고자 했다.
회화, 건축, 공예의 각 분야에 걸쳐 새로운 시대를 개척, 개성적 창조의 자유를 주장했다.
대표적인 작가는 오토 와그너로 보수적, 폐쇄적인 과학적 미술에서 벗어나서 개성적인 창조를 주장했다.
1907년 건축가이자 관리였던 헤르만 무테지우스를 중심으로 결성된 독일공작연맹은
예술가나 건축가 뿐만 아니라 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실업가를 포함한 디자인 진흥 단체였다.
단순한 공예 운동이나 건축 운동이 아니라 결집된 형태의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디자인의 근대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 이는 독일 공작 연맹이 미술과 산업의 협력에 의해 공업 제품의 질을 높이고 규격화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고 할수 있다.
– 규격화한 형태로서 대량생산하여 그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간결하고 합리적인 양식을 만들어 가고자 했다 .
미술과 근대공업의 결합을 시도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운동을 긍정한 새로운 공예운동으로
건축, 공예, 가구 일반의 합목적인 구성을 의도 하였으며, 미술과 공업을 수공작의 노력 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독일공작 연맹은 디자인이 개인적 실험상태에서 벗어나 보편적으로 인정된 표준스타일의 설정으로 향하게하여
현대의 디자인 역사에서 중요성을 인정 받았다.
1909년 죠르쥬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세잔느의 자연해석과 아프리카 원시조각의 형태감이 큐비즘의 동기이다.
세잔느의 이론이란 화가가 3차원의 세계에서 본 모든 측면들을 편평한 표면 위에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큐비즘은 지적인 예술, 양식의 혁명이며, 대상을 냉철하게 바라봄으로 형식에 근본적인 방향을 갖는 것이며
새로운 종류의 현실을 창조, 독창적인 반 자연주의적 형상으로
추상과 재현사이의 인위적인 경계선을 파괴 20세기 전반기에 중심축이 된 운동이다.
브라크는 실물을 기하학적 도형, 에스타크의 집과 같은 풍경화에서 입방체적 환원, 간결화시켜 단순함으로 표현하여
피카소보다 먼저 큐비즘의 양식을 마련했고,
피카소는 사물을 대담하게 변형, 면들의 분할, 형식감각을 살림으로써(형식에 대한 형식주의) 사물을 체계적으로 변형하였다.
러시아 혁명기의 대표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의 하나로서
1920~30년대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추상주의 예술운동으로, 말레비치, 로드첸코, 엘 리시츠키등에 의해 일어난 조형운동이다.
구성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열렬히 환영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미술상의 혁명(추상주의) 정치적 혁명(사회주의)을 동일시한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자연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전통적인 미술개념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현대의 기술적 원리에 따라 실제 산물을 생산하는 것을 예술적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일반생산과 예술 창작이 구별되지 않았다.
구성주의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조형을 통한 사외주의 문화건설에 있었으나,
당시 낙후된 러시아의 생산력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시도는 대부분 계획으로 그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예술의 추상적 소성(순수한 표면, 구성, 선과 색 등)을 과학적 실천적 입장에서 탐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미술을 건축과 관련시키고 또한 의상 디자인 등 다양한 여러 분야와 실험하면서
이시기의 사회적, 산업적 요구에 맞추어 적용하려 했다. 러시아의 구성주의는 특히 독일의 바우하우스에 큰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로드첸코, 타틀린, 리시츠키, 베스닌 등이며
1934년 러시아의 예술이념으로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식화됨에 따라 구성주의 운동은 막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구성주의는 현대미술사에서 매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최근 건축에서의 해체주의적 경향은 구성주의의 영향을 또 다른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예술가는 근대산업의 재료와 기계를 사용하는 기술자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기계적 또는 기하학적인 형태를 중시하여 역학적인 미를 창조하고자 하였다.
기계생산과 건축공학 및 그래픽, 사진 등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미술가들을 조화시킴으로써
사회 전체의 물질적, 지적 요구를 고양시키려는 신념을 가졌으나 공산주의 경제체제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스탈린에 의해 종식되었다.
독일의 표현주의, 소련의 구성주의와 함께 출현한 운동이 네덜란드의 데 스틸이다.
데 스틸은 데오 반 도스버그, 몬드리안 등이 1917년에 파리에서 결성한 그룹이자 잡지의 이름으로
새로운 기계시대의 상징으로 ‘기하학적인 형태가 기능적인 것’이라는 기능주의 철학을 대두시켰고
추상 회화의 수평과 수직으로 이루어진 단순화된 평면 구성을 회화의 영역을 넘어서
건축, 공예, 그래픽 디자인에 이용하여 새로운 형태를 부여한 운동이다.
입체파에서부터 비롯된 추상미술을 조형예술 전 분야에 걸쳐 본격적으로 추상미술을 전개시킨 최초의 운동이었다.
이들은 조형예술의 통합을 주장하였는데, 그 원리는 회화, 건축, 산업 디자인을 막론하고
모든 공간을 동일한 평면으로 간주하여 기하학적 형태와 삼원색을 기본적인 조형요소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들의 지도 이념은 순수성, 직관성을 중시하는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로부터 조형물의 효과나 구체성을 중시하는
반 되스부르크의 요소주의로 옮겨갔으며, 1920년대에는 네덜란드를 넘어서 국제구성주의운동으로 발전해갔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에 독일공작연맹의 멤버로 활동했던 월터 그로피우스를 중심으로
독일의 바이마르에 설립된 국립 디자인 대학이다.
독일공작연맹의 이념을 계승하여 예술적 창작과 공학적 기술의 통합을 목표로 삼은 새로운 교육기관으로서
현대 건축, 회화, 조각, 디자인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이상주의와 20세기의 현실주의를 결부시킨 그로피우스는 교육을 통한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바우하우스의 초기 이념들은 발전과정에서 많은 변화와 수정을 거쳤으며,
결국 바우하우스는 산업과 접촉함으로써 디자인의 사회와 운동에 기본이 되는
교육적 성취와 현대 디자인의 이정표를 정립하는데 공헌하였다.
제도상으로 볼때 바우하우스는 대공립공예학교와 대공립미술대학이 통합된 미술연구소이자 대학이었으며
처음부터 반아카데미적인 자세를 취하는 실제적인 수공 훈련에 중점을 둔 실용 교육 기관이었다.
개교후 2,3년이 안되어 공예가 양성이라는 교육 이상은
이미 대량생산을 위한 제품을 디자인할 수 있는 디자이너 양성교육으로 바뀌었으며,
심지어 바우하우스의 작업장에서 제품 개발에 착수하여 연구소의 이익을 꾀할 수 있는 경제적 기초를 확대하고자 노력하였다.
바우하우스는 “완벽한 건축물이 모든 시각예술의 궁극적 목표다.”라고 선언하였으며
교사와 학생이 함께 하는 공동사회적 책임을 지향하였고 1923년 이후 기계의 사용으로 예술과 공업기술의 통합을 목표로
합리주의적인 모던 디자인을 향한 새로운 시도를하였다는 점은 디자인사에 영원히 남을 일이다.
1925년 데사우로 이전하였다가 1932년에 다시 베를린으로 옮겨 간뒤 다음 해인 1933년 나치스에 의해 폐교되었다.
존속기간은 14년에 불과 했지만, 근대디자인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바우하우스는 예술과 기술의 분리를 근대문명의 모순으로 간주하고 조형적 실천을 통해 그를 지향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회화, 조각, 건축 등으로 분리된 근대 조형예술의 체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따라서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예술의 공작적 성격을 다시 확인하고, 순수 미술과 응용미술의 차별을 철폐하며,
건축을 통한 조형예술의 통합을 목표로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이념을 교육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하였는데,
교육과정은 기초과정, 공방과정, 건축 교육의 순서로 실시되었고,
성격은 중세의 공방과 근대의 조형 개념을 새롭게 접목시킨 것이었다.
한편 폐교 이후 유럽과 미국으로 이주해간 바우하우스인들에 의해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교육이 전세계적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바이마르 바우하우스(1919-1925)
그로피우스, 한스 마이어, 미스 반 데어 로에로 이어지는 3명의 학장과 함께 발전하였다.
마이어는 과학적인 기초 위에 건축을 체계화하기위해 전문가 초청 강연을 의뢰하여 디자이너 양성에서 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제시하였다.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바우하우스를 이상적인 건축 교육의 장으로 정리, 통일하는 것으로 기본 방침을 세우면서 공방보다는 강의 중심의 교육으로 바뀌면서 바우하우스는 건축 전문 공과 대학의 성격을 띠었다.
베를린 바우하우스 (1932-1933)
미스에 의해 시립 연구소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기초 과정과 전문 교육 후의 자유로운 디자인 활동으로 이루어졌으며 기금 조달을 목적으로 하는 카니발 행사도 이루어졌다.
1933년 해산되었다.
뉴 바우하우스 (1937-1938)
모홀리 나기가 학장으로 취임, 뉴 바우하우스의 교육은 이론적, 실천적 과정으로 분류되었으며 교육의 목표는 수공업 및 기계 공업 제품의 디자이너, 박람회, 무대, 전시, 상업 미술, 타이포그래피, 사진 등의 디자이너 그리고 조각가, 화가, 건축가의 양성에 있었다.
월터 그로피우스
1883-1969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이자 근대건축과 디자인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
베를린에서 출생. 뮌헨과 베를린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1908년과 10년 사이에 페터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일했다.
1914년 퀼른에서 열린 독일공장연맹 전시회에 파구스공장의 설계안을 출품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1919년에는 바우하우스 교장으로 임명되어 중심적인이물로 활동하다 1928년 사임하였다.
1929년에는 근대 건축 국제회의의 부의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바우하우스 폐교 이후 1937 년 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면서 미국 디자인계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어로 장식미술을 뜻하는데, 1925년 파리의 장식미술박람회에서 나온 명칭이다.
아르누보의 뒤를 이어 1920-193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세계에 전파되고 유행된 양식이다.
아르데코의 양식적 특징은 모더니즘과 장식미술의 결합에서 찾을 수 있다.
아르데코는 20세기의 입체파, 미래파 등에 의해 개척된 모더니즘 양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장식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장식적 가능성을 보여주며,
또 그 점에서 19세기의 아르누보와 구별된다.
따라서 유동적인 곡선을 애용했던 아르누보와는 대조적으로 아르데코는 기하학적인 형태와 반복되는 패턴을 보여준다.
한편 아르데코는 미국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는데, 할리우드 양식, 또는 재즈양식으로 불리운 미국의 아르데코는
프랑스와는 달리 대도시의 고층건물 등에 적용되는등 보다 웅장하면서도 사치스런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아르데코는 건축과 공예, 패션, 자동차, 콤팩트, 향수병 등 생활 디자인의 다양한 분야에 파급되었고,
그 때문에 아르데코는 아르누보보다 종합적이며 광범위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데코의 양식적 특징은 모더니즘과 장식미술의 결합에서 찾을 수 있으며,
아르누보가 비대칭으로 화려한 식물의 유기적인 곡선을 지향한 데 비해서
아르데코는 대칭으로 기계적인 추상적 형태와 기하학적 직선을 지향하여 모더니즘을 탄생시켰다.
1차 세계대전 중 미국, 스위스, 유럽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극단적 반이성주의를 내세우는 예술 운동으로,
1916년 취리히의 Cabaret Voltaire에서 잡지 ‘Dada’를 발간으로 시작되었다.
부르주아 계층의 고상한 취향을 강조하는 예술에 대한 확신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정치적, 도덕적, 미적인 위기에 대해서 개인적인 자유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위하여 이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여
옷벗기, 쌍소리, 자살 같은 공격적, 파격적, 희극적인 방법이 사용된다.
시문학과 조형예술에서 시도되어 얻은 형식적인 경험들을 연극, 영화, 건축, 음악 등으로 확산시켜
화가, 조각가, 배우의 단절된 개념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예술에서 새로운 민감성을 창조하고, 예술적 자유의 권리 주장, 창조적인 회의주의를 찾는다.
예술과 삶의 구분을 거부하여 관람자와 작품과의 대화가 시작되며
기성품이라는 오브제의 등장으로 금세기의 새로운 조형언어가 시작된다.
인간의 이성을 배제하고 우연의 제스츄어를 쓰면서 과거의 예술을 비웃고,
비합리적이고 무계획적인 예술 활동을 통하여 새로운 재료와 표현방법을
탐구, 전통적인 예술기법을 파괴하여 예술을 현실에 직접 통합하였다.
뒤샹과 다다이스트들의 반 전통, 반 부르주아적 의도는
네오다다 이후, 팝아트, 누보리얼리즘, 아르테포베라, 최근의 설치미술에 이르기까지
오브제의 긍정적 사용이라는 또하나의 전통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마르셀 뒤샹, 쿠르츠 슈비터스등이 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괴되는 물질세계의 실망에서 비롯된 전위적 예술운동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앙드레 브루통의 초현실주의 선언(1924)으로부터 시작된다.
경험적인 통상적 세계보다 더 참된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고,
무의식적인 정신세계를 통하여 초월적 세계를 확인하려는 예술적 시도, 프로이드의 학설의 영향을 받아
인간심리의 무의식을 발견하여, 심층심리학의 발달에 따라 이것과 관련된 인격이 지니고 있는 일체의 힘을 회복하는 예술을 주장한다.
초현실주의자는 꿈의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억압된 무의식의 내용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강구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유형의 미술에서 나타나는 의식적인 이미지와 형식적인 요소까지도 자유롭게 혼합한다.
초현실주의는 무의식 속에 숨겨진 샘이 있어서,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상상력에 고삐를 매지 않는다면,
이 샘은 솟아날 것이라고 믿는다.
이성의 지배를 배척하고 비합리적인 무의식의 세계,
꿈의 세계를 표현하는 예술운동으로 유럽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합리주의,
이른바 이성에 대한 도전과 재래의 예술형식을 격렬하게 파괴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무의식의 세계를 대중화한 작업으로 현실적인 사물의 개념을 비합리적이며 복합적 차원의 형태로 표현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발상법에서 초현실주의는 논리적 상호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각을 통한 지각의 확대와 증강이 이루어져
정서적 감정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미국 추상표현주의는 1940년대 말 뉴욕을 중심으로한 명백한 미국식 스타일의 회화로서
50년대 후반까지 미국 화단을 지배한 역사적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운동은 본질적으로 초현실주의의 이념을 차용하여 혼합하였고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들은 전쟁기간 동안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더욱더 엄밀한 미국적 개념인 개척적인 개인주의의 중요성, 특히 전통으로부터 예술의 해방을 강조하였다.
추상표현주의는 완전한 추상 또는 전적인 표현주의는 아니다.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적인 자동기술법을 차용하였으며, 이미지를 산출하기 위한 방식으로 새로운 극단을 감행하였으며,
동시에 입체파(큐비즘)의 개념인 ‘피상적 화면’을 탐구하였다.
전형적인 추상 표현주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회화를 파악하는 방법보다는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 감소되며,
두 개의 범주를 하나로 조화시킨다.
이 시기에 미국 미술은 역사상 최초로 지방주의와 유럽에의 의존에서 탈피한다.
그러나 30년대 뉴욕화파 발전에 가장 중요했던 직접적인 영향은
한스 호프만(1932년 이후 피카소의 드로잉과 마티스의 색채수업, 예술의 사회적 목적보다 자율성 주장)과
1940년 나치 점령하체 파리 미술인들인 샤갈, 에른스트, 레제, 마쏭, 몬드리안, 앙드레 브르통 등의 뉴욕으로의 이주를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뉴욕화파 화가들은 지칭하는 추상표현주의란 말은 지나치게 함축적이어서 그리 적절한 용어는 아니지만
이들 가운데 표현적 방법에 치중한 자들은 항상 추상적이지 않고 비 대상양식을 추구하는 자는 표현적인 붓작업을 피했다.
이들은 전쟁으로 노출된 비합리적 측면을 표현하기 위해 초현실주의를 따라 융과
그의 원형이론, 집단무의식으로 전환, 꿈을 도해하는 대신 자유연상과 자동주의에 의존,
큐비즘 추상의 지적 조행개념을 전도시키면서, 그 평면공간을 수단으로 생각한다기 보다
과정을 우선시하는 회화적 드로잉의 독특한 양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팝아트는 영국에서는 젊은 예술가를 중심으로 미국적 대중 이미지에 대한 학구적인 탐구에서 발단
1965년 Tomorrow전. R.hammilton 의 collage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미국에서는 추상 표현주의 양식으로
서서히 성장 1955년 neo dada, 1962년 new realist전시로 공식적인 팝아트가 시작되었고,
비평계의 저항을 극복하고 대중적으로 성공 1964년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팝 아트의 용어는 영국 비평가 Lawrence Alloway가 1954년 광고문화가 창조한 대중예술이란 의미로 사용하면서 처음 대두되었다.
대중문화와 소비영상으로 구성되는데(예로 만화, 장식용 포스터, 포장지), 역설과 찬미를 훌륭하게 조화시킨다.
1962년 순수미술의 맥락에서 대중적 이미지를 사용하는 예술행위로 확대적용 되었다.
빛나는 색채, 날렵한 디자인(때론 거대한 사이즈로 확대된), 기계적인 질감들은 대중들에게 매우 친근한 것이었다.
팝 아티스트들은 대량 소비시대의 산물인 행버거, 변기, 잔디깍는 기계, 립스틱 케이스, 스파게티,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경애등을 표현하였다.
186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난 추상미술의 한 동향으로 옵티컬 아트의 약칭이다.
시각과 그것에의한 시지각 심리를 바탕으로 하여 순수 형태와 색채의 시각적 현상을 작품의 주제로 사용하는 미술.
50년대 말 국제적인 미술 운동으로 발전한다.
팝 아트가 상업성, 상징성을 갖는 반면 옵 아트는 순수한 시각적 작품에 몰두하였으며 다이나믹한 빛과 색의 변조가능성을 추구하였다.
가장 큰 특징은 시각적 착각의 영역을 가능한 확대코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비재현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비대상적이고, 비재현적이고, 비이미지적이고, 비표현주의적이고, 비주관적인 것이다.”
애드 라인하르트, 1962년 미니멀리즘 회화에 대한 한 이야기
처음 미국에서 액션페인팅과 추상표현주의 양상에 대립되는 경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37년에 존 그래함이 (예술 체계의 변증법)이라는 책에서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을 이미 언급하였고, 1929년 데이빗 버리욱이 존 그래함의 전시 서문에서 이 말을 사용한 바 있다.
미니멀 아트는 표현적이거나 환영적인 모든 과장을 거부하는 미술 형태이다.
이 미술은 3차원적이며 우연히 생기거나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형성되며 똑같은 형태가 반복되는 특징을 지닌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버넷 뉴먼, 돈 저드등을 주요작가로 들수 있다.
이들 작품 특성은 예술의 모든 ‘기본적 조형어휘’만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
감상자들이 어떤 애매함도 없이 단일한 전체적 인상을 갖도록 극단적인 시각적 단순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극도의 축소화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미니얼즘은 주관적이며 풍부한 디자인이다.
참고: https://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3&dirId=313&docId=614177&qb=65SU7J6Q7J247Jet7IKsIOq4sOy0iA==&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UT6fjdprvh8ssF1wtl0ssssstE8-400997&sid=KD5ufrWNIRMRueONruCe1g%3D%3D
https://arin2459.blog.me/221101201647
[디자인] 디자인의 역사: 왜 디자인 역사를 배워야 하는가?
이전 글에서 디자인의 요소와 원리, 게슈탈트 형태 심리학, 그리고 디자인 프로세스와 함께 컴퓨팅 사고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제, 디자인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이야기할까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문장을 기억할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하고, 과거를 본보기 삼아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해야 하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 나는 이 말이 비단 실질적인 역사에만 통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그 분야의 역사를 알고 있다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그것은 디자인도 마찬가지이다. 디자인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된다면, 디자인을 더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한다.
Why Understanding Design History Will Make You A Better Designer Today
디자인 역사를 이해하면 더 나은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쓰고 있는 이 글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역사가 연도를 외우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외국이나 한국이나 역사를 연도 외우는 학문으로 알고 있는 것은 똑같은가 보다.
이 글의 필자는 역사를 알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떤 시간대의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 다른 시간대의 다른 곳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역사는 사람들이 저지른 실수와 그 실수로 인한 결과들을 보여줌으로 우리에게 좋은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말한다.
또한 역사를 통해 오랜 시간에 걸친 변화를 관찰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을 든다. 그 변화를 이해하고 오래 지속되는 패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맥락을 제공한다.
그리고 Alvalyn Lundgren의 말한 디자인 역사를 알면 좋은 이유 (alvalyn.com/ten-good-reasons-to-study-design-history/) 10가지 중 몇가지를 소개한다.
먼저, 가장 숙련된 멘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직접 질문을 할 수 없다는 단점은 있지만, 최고의 디자이너를 멘토로 둘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면서 역사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라고 이야기한다. 디자인 역사를 통해 대가의 경험을 배울 수 있고, 그것은 그 디자이너가 정리한 디자인 이론을 배울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 시대를 초월한 디자인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시간을 견딘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알 수 있고, 그를 통해 시대를 초월한 디자인의 원칙을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한다. 트렌드를 따라간다고 하더라도 트렌드 또한 완전 독창적인 것은 아니므로, 과거 추세의 패턴을 관찰하면 다음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이렇듯 디자인 역사를 배우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면서 역사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되었다고 안타까워하면서, 역사를 통해 더 큰 맥락을 얻을 수 있고, 사람과 사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글에서 강조한 이유들도 좋았지만 중간에 소개한 Alvalyn Lundgren의 10가지 이유 중 “Because other designers know design history and they’re the competition. 다른 디자이너들은 디자인 역사를 알고 있고, 그들은 우리의 경쟁자다.”라고 말한 문장이 재미있어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배워야 하는 이유가 많은 디자인 역사. 이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과연 디자인의 처음은 언제인가?
디자인의 기원
디자인의 처음은 어떤 부분에 초점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학문적 측면에서 디자인의 역사는 원시 사회부터라고 정의한다. 디자인의 사전적 정의가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형적으로 실체화한 것(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0942&docId=1086152&categoryId=33074)이라고 한다면 인류 문명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그 순간부터 디자인을 해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도구를 만들고,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주거지를 만들고, 주술적인 의미를 담아 벽화나 조각을 만들었다. 하지만 디자인의 기원으로 가장 많이 보이는 이미지들이 아래와 같다. 아래 이미지에서 왼쪽은 알타미라 동굴 변화이고 오른쪽은 발렌도르프의 비너스이다. 이 이미지들은 미술의 기원을 설명할 때에도 동일하게 보이는 이미지들이다.
출처: http://brainartkid.com/index.php?mid=community04&document_srl=1210&listStyle=viewer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 디자인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인 뗀석기에서도 디자인에 대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나무를 자르거나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만든 도구인 것이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하며 인류는 더 많은 것들을 만들어 냈다. 돌을 갈아 마제석기를 더 정교하게 만들었고, 정착생활을 위해 움집을 만들었다. 모두 필요에 의해 목적을 가지고 조형적인 실체화를 진행한 사례들이다.
모든 분야가 그러하지만 디자인의 역사 또한 인류 문명 역사와 같은 길을 걷는다. 그래서 각 문명을 살펴보며 디자인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자.
고대 문명
고대 문명 중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중동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주변 지역 (현재의 이라크)을 중심으로 발생한 문명이다. 두 강 사이의 비옥한 땅으로 인해 정착 생활이 시작되어 다양한 유적들을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개방적인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였고, 정치·문하적 색채가 복잡했다고 한다. 폐쇄적이었던 고대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개방적이고 능동적인 문명이었다. 그만큼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문명이다. 설형 문자를 개발하여 계약이나 규칙, 공고 그리고 통계나 법률 등을 기록했다고 한다.
출처: https://pixabay.com/
그렇다면 폐쇄적인 고대 이집트 문명에 대해 알아보자. 고대 이집트 문명은 이집트 나일강 하류와 수에즈 운하 일대에서 번성한 문명이다. 기원전 3200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3천 년 동안 고대 이집트가 막을 내리기까지 나일 강 유역을 비롯하여 시리아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한 문명이었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영혼불멸이 최대의 관심사였던 듯하다. 그런 관심을 반영하듯 거대한 이집트의 건축물과 예술품은 모두 파라오의 영혼의 영원한 영광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지상에서 누리던 것을 죽은 후에도 누릴 수 있도록 무덤에 값비싼 물건들을 함께 묻었고, 무덤 벽면에는 죽은 자의 생전 일상생활을 묘사해 넣었다고 한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시류가 있었지만 고대 문명은 주로 사후에도 영원하기를 바라는 의미의 건축물들이 많다.
출처: https://pixabay.com/
그렇다면 서구 문명의 기틀을 다지고 서남 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전역의 문화에 큰 영향을 준 문명이 고대 그리스 문명은 어때 했을까? 고대 그리스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그리스 철학의 중심 개념이었듯, 그리스 예술의 주요 주체는 인체 조각이었다.
또한 그리스 철학이 사고의 명석함과 조화 질서를 강조했 듯, 그리스 미술과 건축 역시 균형을 강조했으며 신화의 속 이야기를 현실적인 전쟁이나 파티를 소재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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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문명에 가장 영향을 끼쳤던 그리스 문화가 전성기는 헬레니즘으로 대표된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면서 마케도니아 왕국은 서남아시아 (근동 혹은 중동)에서 고대 이집트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하여 그리스 문화는 세계의 절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배자인 그리스인의 문화와 토착문화가 융합된 것이 헬레니즘의 문화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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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리스 문화에 가장 크게 압도당한 것은 로마인들이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미술뿐만 아니라, 시, 수사학, 철학 등에도 매료되어 많은 그리스인들을 고용하였다고 한다. 지적이고 이상적이었던 그리스 문화와 다르게 로마 문화는 현실적이고 기능적이었다.
건축에서도 크게 두드러졌던 로마 문화의 가장 큰 유산은 콜로세움일 것이다. 거대한 원형의 경기장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건축물로, 오늘날 스타디움 디자인에 많은 영감을 주고 응용되었다.
출처: https://pixabay.com/
이번 글은 디자인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며, 디자인의 기원과 고대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디자인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역사에 관련된 이야기에 디자인과 미술 이야기가 살짝 섞였다고 보는 것이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디자인사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진행이 될 것이다. 중세를 지나 산업혁명이 시작되면 디자인에 대한 개념은 점점 자리를 잡게 된다. 이번 글은 이런 흐름으로 왔구나 정도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글을 읽고 느꼈겠지만, 이번 글도 그렇고 다음에 쓸 글도 마찬가지로 디자인을 설명하고자 할 때는 확실히 서양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동양 디자인의 역사, 특히 한국 디자인사에 대한 정보는 찾기 어렵다. 다음에는 한국 디자인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려 한다. 오래 걸리는 일이 될 것이겠지만 재미있을 거라 생각한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때 또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디자인 역사 글은 계속 될 것이다.
디자인의 역사
디자인의 역사
1. 원시공동체에서의 디자인
구석기시대의 인간은 자연을 활용하고 관찰하고 모든 가능성의 발견과 사용하기에 알맞은 것을 고르는 인간 특유의 창조성으로 자연에 새로운 모양을 주려는 행동이 곧 디자인의 근원이 되었다. 여기서 조형의 이미지를 살리는 가장 좋은 소재는 흙이었는데 흑은 물을 섞으면 반유 동적인 상태가 되고 거조 해지면 딱딱해지는 성질을 갖게 되어 조형의 재료로 삼기 매우 좋아 벽, 그릇, 토우 등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목재도 가공 성형이 쉬웠으므로 중요한 소재가 되었고, 돌은 신비와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이 불을 쓰기까지에는 수천년이 걸렸고 신석기시대에는 금속과 유리가 발명되었다. 그 속에서 보다 투명하게 빛나고 매끄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였을 것이다.
B.C4000년대 신석기시대의 크로마뇽인은 동굴 벽화를 그렸는데 이는 사회적 주술적 종교적 의미가 담긴 디자인이며. 美(미)나 쓰임새를 구별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사회조직이 거대화됨에 따라 상형문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2. 노예제도에서의 디자인
메소포 타미야 문명은 상품에 메이커를 인식시키는 상호나 도장을 찍어 그것을 보증해 주었다. 이것은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집트에서는 색채 자체가 신을 상징하였고, 과학의 요소였으며 태양과 별을 상징하였고 병의 치료수단이었고 종교의 근본이었다. 이집트의 조각은 신과 왕의 권위와 힘을 시각화하고, 이상 속에서 개성을 발견하려 했고, 승려들의 초상화 형식이 많았다. 회화에는 주술적 기능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대상의 인상적인 부분을 조합으로써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인은 기호표시나 조형 표시를 기능별로 분화시킨다든가, 형태적으로는 명료함을, 철학적으로는 합리성을 추구하였고, 우주를 하나의 질서와 조화를 가진 완전한 것으로 표상했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스식으로 간결하면서 장중함과 정온함을 나타내고 있으며, 우주를 나타낸 디자인이 돋보인다, 시간에 대한 사고도 둥근 쇠고리같이 둥글었고, 후기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는 라오콘 군상처럼 인간의 감정이나 육체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디자인이 많이 등장했다.
호마인은 곡물상가, 구두상가, 유리 상가 등이 집단으로 몰려 있었는데 이것을 소개하는 행위는 일종의 그룹 광고의 최초 형식이라 할 수 있다. B.C20년경부터는 유리를 개발해 유리그릇이 일반적인 일용품으로 쓰이게 되었고 유럽 건축의 기본이던 아치 구조의 기술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로마인은 에트루리아나 그리스에서 완성된 알파벳을 돌에 새기며 일정한 모양을 만들었는데, 이 스타일의 문자가 오늘날 대문자 알파벳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당시에 책은 직접 손으로 써야 했는데 필 기자들은 가능한 쉽게 쓸 수 있는 자형인 필기체를 탄생시켰다. 로마의 조각은 그리스 후기의 디자인을 다시 살려 산 인간의 모습을 표현했고, 조각은 기록적인 성격인 강해졌으며, 자기 위엄을 전달할 목적으로 초상 조각이 유행하였다.
페르시아는 화폐경제 시스템을 도입하여 활발한 교역을 전개했는데 고대 페르시아의 금화인 다레이코스에 다리우스 왕의 초상을 디자인했다. 이것은 돈에 지배자의 초상을 새긴 시초였으며, 지배자가 자기의 이미지를 전능으로 하는 PR의 최초 예라고 할 수 있다.
3. 봉건사회에서의 디자인
중세의 유럽은 크리스트교 아래에 속박당해 있었는데, 천국이나 지옥을 본 사람이 없었으므로 교회의 이상을 어떻게 시각화하느냐가 큰 과제였다. 그리하여 신과 인간, 또 악마의 유혹에 찬 현세와 후세를 시각화하기 위해 이집트 시대의 주술적이고 섬직한 조형 양식과 같은 상징적인 표현이 다시 부활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각은 너무나 현실적인 느낌을 나타냈고, 회화는 풍부한 공상적 이미지를 나타냈다, 그 때문인지 점차 회화적인 표현이 애호를 받게 되었다. 조각에 있어서도 초상 조각과는 대조적으로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게르만 민족은 로마의 구상성보다 추상적인 것을 지향하였는데 이로써 유럽 중세의 로마네스크 예술의 디자인은 포르포션이 아니라, 추상성이나 문양 성에 있다고 해도 좋다, 크리스트교는 십자가를 심벌로 결정함으로써 현대의 모든 선전수단에 필히 사용하는 심벌마크를 인간생활에 최초로 실현하였다.
이렇듯 유럽에서는 확실한 사고에 따라 실용적인 기술의 진보도 눈부시게 발전하였고 특히 건축분야에서 돌을 곶처럼 만들던 구조에 반하여 아치나 볼트를 이용한 얇고 넓적한 돌 구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고딕건축이 선보이면서 위로 길게 트여 채광면이 확대되고, 다채로운 스테인드 글라스가 창에 끼워졌다. 이 시대의 유리는 옛날의 ‘밝은 전망’과는 반대로 외계로부터 빛을 차단하여 천국과 같은 공간을 만들기 위한 디자인이었다.
유럽은 르네상스 시기부터 무역상은 상점 밖에다 눈에 띄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때부터 전시의 방법이 주요한 요인으로 등장하였고, 문자 수공예 사인 기장 문장이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유명한 예술가가 상점이나 관청의 간판 디자인을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윈도 디스플레이도 이즈음부터 등장하였으며, 디렉트 메일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5세기에 쿠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하자 정보를 지구의 어디든 또 세대를 넘어 정확히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광고 분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세계적인 스케일로 배 보되 었고, 인쇄산업을 육성시켜 시각 교육에 앞장섰다.
한편 회화도 사상의 전환에 큰 역할을 했는데 인간 하늘 물 나무 실내 같은 환경을 나타내는 데 가장 적합했으며,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원근법에 의해 탁월하게 표현해냈다. 이리하여 회화의 세계는 비로소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본 궤도를 찾았다. 그리고 회화는 신학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활동으로 자리 잡았으며, 자율적이고 동시에 자연법칙을 객관적인 방법으로 파악하려는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에게 안내역을 했다 할 수 있다. 르네상스의 조형은 그대로 과학 발전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으며, 레오나르도의 투시에 관한 법칙 연구나 응용은 실험 광학적으로 주목할 만한 업적이었다.
한편 중세의 조형은 인쇄술의 실용화에 수반하여 판화 분야에도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이리하여 대중의 요망에 따라 섬세한 선의 판화가 생겨났다.
4. 공업사회에서의 디자인
18세기부터는 수공업이 아닌 기계로의 생산 생산력을 증대시켰고, 자본주의 생산체계를 확립시켰다. 따라서 교육도 인간적이고 창조적인 측면을 무시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자유로이 생각한다든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18세기 전반에 걸쳐 기계와 조형에 매달린 영국인으로 생각을 새롭게 한 사람은 웨지우드였다. 그는 손재주에 의해 만들어지던 도예를 기례로 생산하는 방법을 구상해내 싼 원가로 도자기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고 판매 대리점 조직까지 좌지우지할 만큼 현대적인 디자인을 창작해냈다.
이 시대부터 미술은 일반조형에서 구분되어 부유한 상인 정치인의 증가와 민속문화의 증대에 따라 회화는 일종의 상품화, 즉 액자에 집어넣어 실내 장식품으로 걸리게 되었다. 그 때문에 미술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자 화가들 사이에서 이성이나 고전에 반대하는 경향이 높아졌고, 꿈이나 시상의 세계를 나타내는 낭만주의 회화가 등장했다. 한편 사진술의 출현에 의해 회화는 자연을 기록하는 역할을 잃고 말았다. 여기서 인상파라는 새로운 회화가 탄생하였는데 인상파의 특징은 색채의 표현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인상파에 비해 사진기술은 대중 속으로 쉽게 파고들어 카메라 잡지는 날로 부수가 늘어났고, 대중은 사진 보도의 객관성과 신빙성을 과신하고 대사건 때마다 보도사진의 특성은 살아났으며, 정보사회의 단단한 밑바탕이 되었다, 이로서 화가들도 사진을 이용하여 풍경화나 초상화를 그렸고, 사진을 바탕으로 미술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5. 정보사회에서의 디자인
공업의 발전으로 기업 간의 경쟁은 증대하였고, 생산보다 판매에 치중해야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대량소비의 시대가 시각 소비의 시대와 더불어 닥쳐왔다. 그런데 근대 디자인 센스의 대부분은 시각 소비의 시대가 시작되면서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는 직인시대처럼 실제로 손을 움직여 컨트롤하는 게 아니라, 시각화된 디자인에 의해 컨트롤된다, 따라서 근대 디자인 속에는 판매 전략이 짙게 강조되어 있다.
(1) 미술공예 운동
러스킨은 당시 산업혁명의 결과로 나타난 자연파괴, 기계로 인한 제품의 범람, 수공예 기술의 저하를 비판하였으며, 특권계층에게만 이윤을 주는 기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도 산업에 의한 사회의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미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는데 이 점을 자극받은 모리스는 산업 예술품의 과잉 장식 디자인이 싫어 스스로 가구를 만들기로 했다. 그는 성실 미가 넘치는 수공예품 애용을 권장하고, 기계에 의한 노동을 윤리적인 입장에서 통렬히 비판하였다. 이 운동은 공예를 예술의 수준으로 높이고, 사회개혁운동으로 전개시켜 미래 디자인 운동의 시금석이 되었다, 실제로 모리스의 작품은 독일 공작 연맹이나 바우하우스의 조형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2) 아르누보
1890년경까지 대부분의 예술가는 대량 생산된 제품에 매력을 느끼는 대중의 취미를 저속하고 비예술적이라 경멸하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야말로 참예술을 아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극복해보려 노력한 화자가 이반 데 벨 데였는데 그는 1896년에 미술상인 빙그로부터 상점의 인테리어를 의뢰받아 곡선을 위주로 한 장식을 곁들여 주복을 끌었다. 빙그는 이 상점을 아르누보, 즉 신예술 양 식리라 불렀는데, 이때부터 화려한 색채와 더불어 추상 형식의 장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1895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프랑스 영국 미국 스페인 등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기계제품은 철저하게 장식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카메라의 출현으로 회화를 허둥대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고갱이나 고흐를 내면적인 상징 작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르누보의 또 다른 의미는 철이나 콘크리트 같은 재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당시까지 단순한 보조재료에 지나지 않던 철을 조형의 주역으로 클로즈업시켰으며, 새로운 시대는 기계만이 판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시켰다.
(3) 19세기 후반의 회화와 그래픽 아트
세잔은 자연은 원주 구 원뿔로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내리고 훗날 입체파 구성의 기초가 되었다, 이 진보적인 조형은 그래픽 아트의 세계에 가장 강한 영향을 미쳤다, 미묘한 색의 배합이나 분위기의 변화를 묵살하고, 평면상에서 면과 면의 대비에 의한 구성을 함으로써 당신의 인쇄 특성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때 영국에서는 자유로운 형식의 그림엽서가 유행하고 정교한 원색 인쇄가 개발되어 인기스타의 사진 엽서가 등장하는 등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4) 독일 공작 연맹 결성
1906년 독일에서는 종래의 독창적인 제작에서 기계 생산에 적합한 조형을 찾는 의식이 높아졌다,
그때 무테지우스는 신시대의 조형 창조는 ‘영국식’을 따라야 한다고 하고 소수의 제조업자와 건축가 예술가 저술가들에 의해 독일 공작 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911년 그는 규격화를 주장하고, 규격화가 될 때 비로소 대중의 취미도 향상될 수 있고 상품의 양질 화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5) 20세기 초반의 조형활동
세계대전 중에 조형분야에서는 여러 가지 운동이 폭발적인 기세로 전개되었는데 이 모든 조형 운동의 초점은 전통적인 인습을 완전히 배제하고 새로운 시각 디자인을 원리로 삼아 참신한 출발을 하는 데 있었다, 이 운동의 영향은 오늘날의 그래픽 디자인이나 타이포그래피에도 남아있다.
입체파는 2차원의 평면을 충분히 살리기 위해 투시 화법에 의한 입체도형의 표현을 부정하였지만, 자연과 완전히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해 꼬레 수법을 고안해냈다.
미래파의 중심인물은 이탈리아의 시인 마리네티였는데 反(반) 철학적 논리 아래 물질문명을 찬미하였으며, 전쟁이나 혁명, 현대 생활, 스피드 등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미래파는 활자 디자인의 변화에 의해 글자도 그림과 대등한 조형요소라는 시각 디자인의 근본적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 그룹은 콜라주나 포토 몽타주 등의 기법을 사용하여 풍부한 시각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새로운 길을 열었고, 이들 기법은 이미지의 경험을 시각화하는 방법으로 현재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19세기 말 경부터 모스크바의 예술 애호가들은 유럽의 전위예술에 주목했고 회화의 절대주의, 즉 회화에서의 모든 재현 요소를 제거하고, 단순하고 순수한 화면 구성을 제창했다. 1917년 10월 혁명 때 전위적인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은 정치 저인 행사에도 적극 참가했고, 노동조합과 협력하여 전시회의 포스터, 슬라이드, 우표 등을 디자인하였고, 신설된 노동자 그룹을 기하학적인 오브제로 장식했다. 이들 오브제는 대량생산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소재로 구성되었고, 종합 예술을 하려면 객관적으로 디자인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입체조형이 자본주의의 퇴폐적인 표현이라고 여긴 데서 생긴 트러블로 이들은 해체하였다.
독일에서는 철근이나 콘크리트 같은 새로운 소재가 벽돌을 대치하는 현상이 일어났고, 네덜란드의 디 스틸 경향에 압도되어 급속히 신소재 쪽으로 흘러갔다.
실내 디자인이나 책의 디자인도 종래의 균형을 깨트리고 정방형이나 장방형, 원색 회색으로 구성하는 특징을 보였다. 그리하여 타브로의 회화는 종막을 고하였고, 환경 자체가 회화라는 추상적 리얼리티의 비전이 바우하우스의 조형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현대 시각 시대의 있어 디자인의 핵심 요인이라 할 수 있다.
(6) 바우하우스의 등장
그로피우스는 1919년에 미술 아카데미와 공예학교의 운영을 위촉받아 두 학교를 통합한 새로운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바우하우스의 출발점에는 표현주의적인 로맨티시즘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었으나, 그 밑바닥에는 교육방법과 생산조직을 통일하려는 목적이 더욱 강하게 깔려 있었다. 그는
제1기 바우하우스의 중심인물 이텐은 자연의 세밀한 연구나 소재의 표현이 독특한 유명 회화의 분석에 온 힘을 쏟았고, 자유로운 구성과 형태 공간 색채 재질 감각을 익히는 학습을 펼쳤다.
그 후의 알버스는 기초교육 과정에서 재료와 도구에 익숙해지는 공작 실습과 자연과 조형요소를 익히는 실습을 담당했고 재료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발견하고 객관화하는 방향으로 교육했다. 나기는 자연의 법칙과 최소저항의 법칙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제2기 바우하우스는 조형대학으로 그 성격도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디자인은 단순한 발상이나 착상만이 아니라, 기계에 의한 공장 생산과 거기서 생산되는 품질 모두를 처음부터 계산해서 반복이 가능한 모델 타입을 만들어냈다,
제3기 하네스 메이어 학장은 예술은 집단 사회의 표현이라는 전제 아래 모든 사람이 알아보기 쉽도록 건축의 기본 선을 정했다.
그러나 1933년 바우하우스는 완전히 해산되었고 미국으로 이주한 그로피우스 등은 시카고에 ‘뉴 바우하우스’를 탄생시켰다.
(7) 미국의 디자인
19세기 후반의 유럽 디자인은 전통과 아카데미즘에 대응한 창조를 배경으로 전개하였으나 미국에서는 그런 구조적 저항이 없었다, 따라서 미국 사회가 요구하는 실용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과정은 편리한 것이 발명되면 그것에 연결하여 또 다른 것이 창조되는 식으로 주택의 내부 공간도 주부를 중심으로 디자인되었다.
그리고 플라스틱의 발명으로 나기는 빛을 색으로 또는 색을 빛으로 창조하는 한편 불투명하고 균등한 채색과 실제적인 면을 지닌 이 매개에 굉장한 매력을 느낀 그는 무대 디자인이나 영화에서 이 빛으로써 큰 효과를 보았다.
그로피우스는 미국으로 이주한 뒤 1928년 스위스에서 CIAM(근대 국제건축가 회의)를 결성하고 오늘의 젊은 건축가 그룹인 ‘팀텐’을 육성해갔다.
미국 광고대리점협회가 발족하고 과학 저인 시장조사에 의한 소비자의 구매 동기, 제품의 색채, 모양의 판매 효과 등을 끊임없이 평가하였고, 대중 기호의 흐름을 알아내어 광고의 안내문이나 유혹하는 카피 작성의 아이디어로 삼았다.
(8) 20~30년대의 유럽 디자인
유럽에서는 광고 디자인으로서 객관적인 정보내용의 커뮤니케이션을 노리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때문에 사진이 자주 사용되었고, 읽기 쉬운 꼴의 타이포그래피가 사용되었다.
얀 취홀트는 비대칭적인 질서 있는 배치에 의해 활자 전체의 다이내믹한 시각효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필요성에 의하여 시각적 심리적인 법칙에 따라 결정하고 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션과 일체화된 표현을 중시하여 디자인하였다.
올리베티는 진보적인 디자인 아이디어가 유럽의 규범이 되었는데 시종 일고나 세련된 디자인 수준을 지켜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그리고 공장의 근로자나 사무원의 후생시설에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팸플릿이나 카탈로그 포스터나 신문광 고의 조형적 표현도 세련되었고 패키지 외의 내용도 언제나 한 걸음 앞서 인식하였다.
막스 빌은 이론을 중시한 디자인을 시도해 수학적 비례를 적용하여 객관적이고 치밀하고 안정감이 있는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9) 20세기의 디자인과 미래
20세기는 회화의 조형적인 전통을 점점 파괴해갔다. 지금까지의 투시화 법적 시각 개념은 퇴색해졌고, 실내장식적 회화를 부정하는 경향이 명확해졌다, 모두가 전통을 부정하고, 한결같이 새로운 출발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변혁을 시도하였다.
한편 1920~30년대에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자 이에 따른 실용성의 심리 효과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측정 분석되었다. 이로써 광고산업은 폭발 저인 기세로 증가했으며, 디자인은 판매촉진의 매우 중요한 수단으로 부각되었다.
디자이너는 예전의 예술가나 직인들이 하던 일이 아니라, 과학적인 분석 방법과 고상한 디자인의 이론을 갖고 그에 근거하여 제품의 모양을 고안하고 설계하였다. 따라서 건축설계가나 공업 디자이너는 시각화와 기호와의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광고디자인은 시각을 통하여 대중에게 보다 많은 정보를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가능한 그 방법을 다양하게 동원했다.
각종 평면적 입체적인 시각화다 등장하고 시각에 호소하여 디자인되었을 뿐 아니라, 이들 각각의 매체에 있는 영상이 서로 강조되면서 감각적으로 연결되도록 계획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도 텔레비전의 스포츠 광고처럼 판매 증진을 위해 디자인되었다. 이처럼 시각 디자인은 교양 있는 현대인의 호기심 속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대해갔다. 현대 디자인은 컴퓨터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다, 이미 컴퓨터에 의해 2차원적 평면의 선도를 3차원으로 시각화하는 방법이 고안, 실용화되고 있다. 평면의 선도를 그리기만 해도 건축의 기능적 미적인 만족도까지 알 수 있다.
광고디자인의 변화는 더욱 변화무쌍할 것이다. 디자인은 한 가지의 능력을 초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정보를 선택하는 시대도 올 것이다. 그런 경우 디자이너에게는 보다 넓은 지식과 객관성이 요구될 것이며,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광고디자인은 신뢰성과 정확한 정보를 전하지 않으면 소비자는 이를 외면할 것이며, 그 기업도 성장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시각디자인은 미래 조형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높은 정보성을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가 놓여있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사회적 문화적인 책임, 즉 리더라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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