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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범의 세계유산] 바티칸 시국_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San Pietro Basilica) : 베드로 무덤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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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베드로 대성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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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편집]

역사[편집]

건축[편집]

명화·명조각[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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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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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네로 전차경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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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 베드로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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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교황의 탈출로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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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베드로대성당주교황청 대한민국 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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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베드로대성당주교황청 대한민국 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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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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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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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티켓 – 로마 (동음이의 | Tiqet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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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가이드 투어

성 베드로 대성당 가이드와 함께하는 돔 등반

성 베드로 가이드 투어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 광장 교황관

로마 수퍼패스 – 대중교통 이용

성 베드로 대성당 공식 오디오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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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 함께하는 교황청 및 성 베드로 대성당 가이드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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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 Google Arts &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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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때의 성베드로 대성전

성베드로 대성전의 좌측 구조도

성베드로 대성전(라틴어: Basilica Sancti Petri, 이탈리아어: 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혹은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대성전(Basilica Vaticana)은 바티칸 시국 남동쪽에 있는 대성전을 말한다. 성지 가운데 하나이자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거대한 교회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2][3] 전승[4][5][6]에 따르면, 서기 67년에 순교한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로마의 초대 주교, 즉 교황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전을 건립했다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전이 로마의 수많은 교회 가운데 가장 유명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으뜸 교회는 아니다. 로마 교구의 대성전의 명예를 지닌 교회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성베드로의 시신이 대성전의 제대 아래에 묻혀 있는 까닭에 옛날부터 교황이 선종하면 그 시신을 제대 아래에 안치해오고 있다. 대성전은 4세기 이래 이 장소에 있었다. 대성전의 건설은 1506년 4월 18일에 시작되어 1626년에 완료되었다.[7]

성베드로 대성전은 그 종교성과 역사성, 예술성 때문에 세계적인 순례 장소로 유명하다. 르네상스부터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계의 거장들이 주임 건축가 직책을 계승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건축 작품으로서 당대의 가장 거대한 건물로 여겨진다.[8] 로마의 모든 초창기 성당들처럼[9] 성 베드로 대성전 역시 입구가 동쪽에 있으며 후진(後陣)은 서쪽 끝에 있다.

지위 [ 편집 ]

성베드로 대성전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과 더불어 로마의 주요 4대 성전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은 바티칸 시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다. 대성전의 돔은 로마식 지평선의 특징을 갖고 있다. 가장 거대한 기독교 성당에 속하며[10], 바티칸 영토를 포함하여 2.3헥타르(5.7에이커)의 넓이를 가졌다. 그리고 최대 6만 명 이상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 내부에는 500개에 달하는 기둥과 400개가 넘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따로 분리된 44개의 제대와 10개의 돔이 있으며, 1300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다.[11] 기독교 세계의 성지 가운데 하나인 이곳은 성 베드로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중에 로마의 첫 번째 주교, 즉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고 한다. 비록 신약성경에는 베드로의 로마 체류나 순교 장소에 관한 이야기가 없긴 하지만, 가톨릭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그의 무덤이 발다키노와 제대 아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연유로, 베드로를 시발점으로 많은 교황이 이곳에 같이 매장되었다. 낡은 콘스탄티노 대성당을 헐고 새로 지은 지금의 대성당은 1506년 4월 18일에 건축을 시작하여 1626년에 끝마쳤다.[7]

비록 성 베드로 대성당이 교황의 공식 주교좌이거나 대성당 가운데 제일의 지위를 가진 것도 아니지만(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위치가 바티칸 시국 벽 안에 있고 교황의 주거지와 인접해 있을뿐더러, 교황이 집전하는 대부분 의식이 열리는 장소가 이곳이기 때문에 교황의 가장 중요한 성당으로 여겨진다.[12]

역사 [ 편집 ]

성 베드로의 매장 장소 [ 편집 ]

신약성경의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1세기에 예수가 승천하고 나서 그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갈릴래아에서 태어난 어부 출신으로, 베드로라고 알려진 시몬이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였고 기독교 설립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사도 바오로라고 알려진 타르수스의 바오로는 자신의 선교 여행과 여러 지역 교회를 훈계하고 격려한 내용을 담은 많은 서신을 썼는데, 이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퍼져 나가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성 바오로가 로마로 선교하러 떠났다는 것도 여기에 적혀 있다. 오래된 전승에 따라 성 베드로도 성 바오로처럼 로마로 길을 떠났으며,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믿어진다.

대성당 안에 있는 성 베드로 청동상

베드로라는 이름은 라틴어로는 “페트루스(Petrus)”이며 그리스어로는 “페트로스(Petros)”인데, 그리스어로 “돌” 또는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petra)”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마태오 복음서 16장 18절에서 예수가 베드로에게 한 말에서 기인한 말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성 베드로는 머리를 아래로 두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역십자가형). 그의 유해는 바티카누스 언덕 위 비아 코르넬리아로 통하는 인근 길에 묻혔다. 위치는 이교도와 그리스도인의 공동묘지 장소로 알려졌다. 베드로의 무덤은 처음엔 기념비 하나 없이 그의 이름을 상징하는 붉은 돌만 있는 단순한 형태였기 때문에 비(非)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950년 12월 23일, 성탄절 전날에 교황 비오 12세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성 베드로의 무덤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는 9세기 이래 접근하기 어려웠던 대성당 지하실 아래 구역을 조사하며 탐구한 지 10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매장 장소는 1세기에 교황 아나클레토가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건물보다 위에 있는 지하 공간인 듯하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의 상상도, H.W.브루워, 1891

옛 대성당 [ 편집 ]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서기 326년에서 333년 사이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시로 건설된 4세기 성당이다. 대성당은 동쪽 끝에 나온 부분에서부터 넓은 중랑(中廊)과 양쪽 통로가 있는 전형적인 라틴 십자가 양식이었다. 당시 넓이가 103.6미터(350피트)를 넘었으며, 입구는 거대한 열주 안뜰 앞에 있었다. 이 성당은 성 베드로가 묻힌 곳이라고 믿어진 작은 성소 위에 건립되었다. 이곳에는 15세기까지 성 베드로를 시작으로 대다수 교황을 포함한 수많은 무덤과 기념비가 세워졌다. 지금의 대성당이 건립된 이후, 두 건물을 구별하고자 전에 사용했던 성당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고 부른다.[13] 본래 이 성당은 건물 안 중앙에 있는 성 베드로의 묘소를 방문하려고 찾아온 순례자들을 위한 거주용 목적으로 지어진 곳이었으며, 고대와 중세 시절 교황의 거주지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과 인접한 라테라노 궁전이었다.

개축 계획 [ 편집 ]

15세기 말, 아비뇽 유수기에 옛 대성당에 관리가 소홀하여 노후화가 극심해졌다. 그때마다 보수 작업이 뒤따르긴 했으나 원래의 모습은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다시 짓거나 최소한 기본 구조의 변경을 고려한 최초의 교황은 교황 니콜라오 5세(1447 – 1455)였던 것 같다. 그는 레오네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에게 옛 대성당의 보수 공사 권한을 주었으며, 특히 로셀리노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대성당의 설계 또는 옛 대성당의 과감한 변경 도면을 그릴 것을 명령하였다. 니콜라오 5세의 통치는 정치적 문제로 좌절되었으며, 그가 선종하자 별달리 이루어진 것도 없게 되었다.[14] 다만 그는 대성당을 짓는 데 필요한 2,522개의 돌을 콜로세움에서 가져오도록 하였다.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니콜라오 5세의 선종이 대성당을 훼손하려는 사람들에게 내린 하늘의 경고라는 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마의 영광을 위하여 옛 건물을 헐고 화려한 건물로 바꾼다는 결정을 내렸다. 곧 설계 공모가 시행되었으며, 수많은 후보작 가운데 우피치 미술관의 설계도가 끝까지 살아남았다. 이후 120년 동안 수많은 교황과 건축가들이 건축 사업을 이어갔으며, 그들의 노력이 한데 모여 대성당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율리오 2세 때부터 시작된 계획은 레오 10세 (1513 – 1521), 하드리아노 6세 (1522 – 1523), 클레멘스 7세 (1523 – 1534), 바오로 3세 (1534 – 1549), 율리오 3세 (1550 – 1555), 마르첼로 2세 (1555), 바오로 4세 (1555 – 1559), 비오 4세 (1559 – 1565), 성 비오 5세 (1565 – 1572), 그레고리오 13세 (1572 – 1585), 식스토 5세 (1585 – 1590), 우르바노 7세 (1590), 그레고리오 14세 (1590 – 1591), 인노첸시오 9세 (1591), 클레멘스 8세 (1592 – 1605), 레오 11세 (1605), 바오로 5세 (1605 – 1621), 그레고리오 15세 (1621 – 1623), 우르바노 8세 (1623 – 1644) 그리고 인노첸시오 10세 (1644 – 1655)의 치세 때까지 계속되었다.

건축 [ 편집 ]

계속된 계획들 [ 편집 ]

브라만테의 계획

라파엘로의 계획

미켈란젤로의 계획, 마데르나의 중랑과 외관 확장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고자 했던[8] 율리오 2세는 설계 공모를 시행했는데, 이 공모의 출품작들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아직도 남아 있다. 최종적으로 브라만테의 설계안이 선정되어 1506년에 공사를 시작했다. 이는 그리스 십자가 형태의 설계안으로 건물의 돔은 로마의 신전인 판테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8] 브라만테의 설계안과 판테온의 큰 차이점은 연속적으로 벽이 지지하는 판테온의 돔에 반해, 새 대성당은 네 개의 커다란 기둥으로만 지지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최종 설계안까지 유지되었다. 브라만테의 돔 위에는 작은 돔이 있는 정탑(頂塔)이 놓였는데, 이 정탑은 초기 르네상스 건물인 피렌체 대성당의 브루넬레스키의 돔 위에 미켈로초가 설계한 정탑과 그 형태가 매우 비슷하다.[15]

브라만테는 중앙부의 돔을 사선 축으로 다섯 개의 낮은 돔들이 둘러싸도록 설계했다. 성단소, 중랑, 익랑은 모두 후진에서 끝나는 두 공간 구획이 있었다. 건물의 각 귀퉁이에는 탑이 세워져, 전체적인 평면은 후진들이 동서남북의 기본 방위를 가리키는 정사각형이 되었다. 각각의 후진들은 두 개의 거대한 방사선상의 반원 형태를 취한 부벽(扶壁)을 갖고 있었다.[16]

율리오 교황이 1513년에 선종하자, 브라만테의 자리는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프라 조콘도, 라파엘로로 교체되었다. 상갈로와 프라 조콘도는 둘 다 1515년에 사망하였고, 브라만테는 그 전년도에 사망하였다. 중랑에 다섯 개의 공간 구획을 만들고, 복잡한 후진들이 한 열로 된 경당을 측랑 바깥의 양쪽 면에 설치하는 등 라파엘로의 설계안에 이르러 큰 변화가 일어났다. 라파엘로의 성단소와 익랑 설계도에는 탑들의 크기를 줄이는 것을 통해 외부 벽들을 더욱 명확하게 함으로써 완벽한 정방형 형태가 되었고, 반원의 후진들은 복도로 에워싸여 더욱 명확하게 경계가 한정되었다.[17]

1520년 라파엘로마저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죽자 그의 뒤를 이은 페루치는 라파엘로가 계획한 주요 후진 세 곳의 내부 배열에 대한 변경사항을 유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리스 십자가 평면과 같이 브라만테가 계획한 다른 주안점으로 돌아갔다.[18] 이 계획은 당시 교황령이 처한 여러 어려움 때문에 진행되지 못하였다. 1527년 로마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약탈당했다. 페루치는 1536년 그의 설계안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8]

이러한 때 (‘소(小) 상갈로’로 알려진)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가 설계안을 제출했는데, 페루치와 라파엘로, 브라만테의 특징들을 합친 그의 설계안에는 건물이 폭이 넓은 정면과 동적인 돌출이 엿보이는 열주 현관, 그리고 길이가 짧은 중랑을 갖게 하였다. 돔에 대한 그의 제안은 구조와 장식 양면에서 모두 브라만테의 그것에 비해 정교하여 외부에 가로로 된 보를 포함하였다. 브라만테가 그랬던 것처럼 상갈로도 돔 위에 정탑을 놓을 것을 제안했다. 이 정탑은 더 크고 정교한 형태로 상갈로가 다시 설계한 것이다.[19] 상갈로가 실제로 해낸 공적은 금이 가기 시작한 브라만테의 기둥들을 튼튼하게 한 것이었다.[14]

1547년 1월 1일, 바오로 3세의 치세에 70대에 접어든 미켈란젤로가 안토니오 다 상갈로의 수석 책임자 자리를 물려받았는데, 이 자리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 계획을 감독하는 자리였다.[20] 건설 과정을 지속적으로 감독한 점을 통해 그는 지금도 이 건물에서 가장 큰 위치를 차지하는 최고의 설계가로 인정받고 있다. 사실 그는 이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래 선정된 후보자인 줄리오 로마노가 죽고, 산소비노도 베네치아로 가야 했기 때문에 일을 거절하자 대신에 바오로 교황이 미켈란젤로에게 강제로 떠넘긴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나는 이 일이 오직 하느님의 사랑과 사도 베드로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라는 글을 썼다. 그는 최종목표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이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14]

미켈란젤로의 기여 [ 편집 ]

미켈란젤로는 고대 로마 이후에 지어진 그 어떤 기둥보다도 거대한 네 개의 기둥이 남은 옛 대성당의 중랑 뒤에 솟아 있는 건축 부지를 인계받았다. 또한, 그는 16세기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가들과 기술자들이 고안한 여러 설계안도 물려받았다. 이 설계안들에는 공통점이 많았다. 건축가들은 모두 한 세기 전에 브루넬레스키가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지평선을 압도하게끔 지은 돔이 대성당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베네치아에 있는 비잔틴 양식의 산 마르코 대성당과 같은 그리스 십자가 형태 모양과 두 익랑에서 성단소로 이어지는 피렌체 대성당과 같은 라틴 십자가 형태, 이렇게 두 가지 형태에서 보이는 강한 대칭적 평면 또한 필요하다고 여겼다.

40여 년간 작업은 조금밖에 진척되지 못했으나, 미켈란젤로는 앞서 건축가들의 발상들을 간단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지어질 위대한 건물을 위해 그는 이 발상들을 참고하였다. 무엇보다도,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원래 설계안이 가진 본질적 가치를 인식했다. 바로 그리스 십자가 형태로 돌아간 것이었다. 헬렌 가드너는 “브라만테의 계획안에서의 중심성을 무너뜨리지 않고서, 미켈란젤로가 펜으로 그은 몇 개의 필치는 복잡성을 단단하고 응집력 있는 통일성으로 전환했다.”라고 평가했다.[21]

지금도 남아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은 카를로 마데르노가 중랑을 확장한 것이다. 성단소의 끝(성당의 동쪽 끝)과 거대한 중앙에 배치된 돔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바티칸 시국 내에서의 돔의 위치와 광장 앞에서 건물을 보았을 때에 네이브가 돔을 가리는 것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멀리서 보았을 때에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미켈란젤로가 브라만테의 광장 계획안에서 분명히 정의된 기하학적 형태와, 반원형의 광장을 만들려던 라파엘로의 계획안을 상당히 축소해 버렸다는 것이다.[22] 미켈란젤로는 외부에 상당한 비례의 석조 건축물을 만들고 각 모퉁이에 제의실과 계단통을 둠으로써 기하학적 분명함을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하여 여러 각도에서 보았을 때에 연속하는 벽 표면이 접히거나 부러진 것으로 보이게 되었으나, 건물의 모퉁이에서 방향이 바뀌는 것을 알려주는 직각 형태는 부족해졌다. 외부는 조금씩 서로 다른 각도로 배치된 거대한 코린트식 열주의 벽기둥으로 둘러싸였는데, 벽의 표면에서 계속해서 바뀌는 각도를 따라가게 된다. 이 벽기둥들 위에는 연속하는 띠 장식에 굴곡이 있는 거대한 벽돌림띠가 압축된 상태에 있는 전체 건축물을 둘러싼다는 인상을 준다.[23]

돔- 성공적인 도안과 최종 해결책 [ 편집 ]

성 베드로 대성당 돔의 총 높이는 대성당의 바닥에서 바깥에 있는 십자가의 끝까지 136.57m에 이른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돔이다.[24] 돔의 안쪽 지름은 41.47m로 앞서 만들어진 두 개의 거대한 돔들(고대 로마의 판테온, 초기 르네상스의 피렌체 대성당의 돔)보다 조금 작다. 이 돔은 537년 완공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보다 지름이 약 9.1m 정도 더 크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가들은 어떻게 이 건물이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돔으로 보이게 할지 해결책을 찾으려고 판테온과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참고했다.

브라만테와 상갈로 [ 편집 ]

돔에서 내려다 본 브라만테가 세운 거대한 교각과 미켈란젤로가 세운 후진 끝.

지름이 43.3m인 판테온의 돔(19세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돔이었음)은 단 하나의 문을 제외한 어떤 출입구나 창문도 없는 원통형의 벽 위에 지지가 되어 있다. 판테온의 높이는 판테온의 지름과 같다. 판테온의 돔은 콘크리트로 된 한 겹의 외피로 건설되었는데, 콘크리트에는 화산암과 석회화, 부석을 많은 비율로 함유하여 무게를 줄였다. 돔 내부의 표면은 깊은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수직·수평으로 살을 만드는 효과를 내어, 전체 하중을 줄이는 효과를 낳았다. 돔의 최고점에는 지름 8m의 눈 모양의 개구부가 있어 건물 내부로 빛을 끌어들인다.[8]

브라만테의 대성당의 돔 계획안은 이러한 판테온의 돔을 본받아 매우 흡사하였는데, 그가 재발견한 제조 방식으로 만들어진 석회화로 된 콘크리트로 지은 돔이었다. 돔 위에 있는 정탑을 제외하면 두 돔의 윤곽은 매우 흡사하며, 또한 판테온의 지지벽은 대성당에서는 지면에서 네 개의 육중한 기둥 위에 올려진 원통으로 바뀌었다. 판테온에서 쓰였던 것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의 단단한 벽은 브라만테가 벽에 창문들을 뚫고 늘어선 기둥들로 벽을 둘러싸게 하여 가벼워질 수 있었다.

피렌체 대성당의 경우, 브루넬레스키가 돔의 공사를 실현하기 전까지 뾰족한 돔의 시각적 형태를 만들고 싶어하는 오랜 세월의 열망이 존재했다.[25](비잔틴 건축에서 재도입된) 능삼무늬 패턴으로 서로 맞물려진 벽돌들로 이루어진 두 겹의 외피를 건설했고, 여덟 개의 석제 뼈대의 완만하게 위로 올라가는 경사는 반구형의 아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육중한 목재 거푸집이 없이도 건설이 가능해졌다. 정탑의 세부 장식을 제외하면 이 돔의 모습은 완전히 고딕 양식의 것이었고, 돔에 쓰인 공학은 혁신적이었으며, 당시 남아있던 고대 로마의 거대한 돔과 볼트들을 연구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15]

상갈로는 앞서 돔을 계획한 두 전임자의 선례에 주목했다. 그는 판테온에 있는 우물천장과 피렌체 대성당의 외부에 있는 석조 뼈대의 가치를 이해했다. 그는 브라만테가 계획한 열주랑을 기단 주위의 잘 정돈된 아치로 이루어진 개구부들로 단순화하고, 강화했으며 확장하였다. 또한, 두 번째 아케이드는 첫 번째 아케이드의 층 위로 쌓도록 하였다. 그의 손에서, 피렌체 대성당에서 기초한 정탑의 섬세한 형태는 돌출한 토대들로 둘러싸인 육중한 구조물이 되어, 늘어선 기둥들이 원뿔형의 첨탑들로 둘러싸일 것이었다.[26] 전체 설계안은 수직적인 한 덩어리를 만들어냈고 가루 설탕 끈으로 완성된 세 층의 웨딩케이크와 같은 복합성을 갖게 되었다.

미켈란젤로와 자코모 델라 포르타 [ 편집 ]

미켈란젤로는 이전에 계획되었던 여러 가지 설계안들을 모두 참고하여 돔을 재설계했다. 미켈란젤로의 돔은 피렌체의 것처럼 벽돌로 된 두 겹의 외피로 건설되었으며, 바깥쪽의 것은 16개의 석조 서까래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피렌체의 것보다 두 배나 많았으나 상갈로의 설계안보다는 적은 숫자였다. 브라만테와 상갈로의 설계안에서처럼 돔은 원통형 부분 위에 있는 기둥들에 의해 들어 올려졌다. 브라만테가 계획한 원형으로 둘러싼 기둥들이나 상갈로가 계획한 아케이드는 각각 높이가 15m인 16쌍의 코린트 양식의 기둥들로 바뀌었으며 이 기둥들은 아치로 연결되었다. 시각적으로 이 기둥들은 각각의 서까래에 대한 버팀 벽으로 보이지만, 구조적으로 그것은 과도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돔이 피렌체 대성당의 것과 같이 가파르게 올라가는 달걀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판테온의 것과 같은 반구형 돔보다 바깥으로 향하는 힘을 덜 가할 수 있었다. 판테온은 비록 버팀 벽에 의해 지지가 되지 않았으나 둥근 벽 위에 뻗치는 무거운 구조 때문에 아래로 향한 힘에 직면하고 있었다.[8][14]

돔의 달걀 모양 윤곽은 지난 세기 동안 많은 학문적 논의의 주제였다. 미켈란젤로가 돔 아래의 원통형 부분을 완성한 채로 1564년 세상을 떠났으며, 브라만테의 기둥들은 원래 설계된 것보다 훨씬 부피가 커서 각각의 폭이 18m에 이르렀다. 교황 비오 5세는 미켈란젤로가 죽자 그의 조수였던 자코모 다 비뇰라를 조르조 바사리와 함께 감리로 임명하여 미켈란젤로의 설계안대로 정확히 공사가 이루어지도록 하여 계속하여 대성당의 건설 작업이 이어질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의도에 대한 비뇰라의 지식에도, 큰 진전은 없었다. 1585년 열성적인 교황 식스토 5세가 작업 책임자로 자코모 델라 포르타를 임명하였고, 도메니코 폰타나는 그의 조수가 되었다. 식스토 5세의 5년간의 임기 동안에는 상당한 속도로 건설 작업이 진전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미켈란젤로는 돔의 초기 도면들과 상세 도면을 포함한 얼마 안 되는 수의 도면을 남겼다. 또한, 1569년 스테판 뒤 페라크의 작품인 상세한 판화가 출판되었는데, 그는 여기에 미켈란젤로의 최종 설계안이 담겨 있다고 주장하였다. 전임자였던 상갈로처럼 미켈란젤로 역시 목재로 된 건물의 큰 모형을 만들었다. 자코모 델라 포르타는 이 모형을 여러 방법으로 고쳐 보고, 여기서 그가 만든 변경사항을 설계안에 적용하였다. 변경사항 대부분은 표면적인 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식스토 5세에 대한 경의의 표현으로 돔의 원통형 부분의 위에 있는 꽃 장식 위에 사자 머리를 추가한다거나, 정탑의 꼭대기에 상갈로가 이전에 제안한 것과 같은 장식 고리를 추가하는 것 등이었다. 델라 포르타나 미켈란젤로가 건물 모형에 만든 주된 변화는 안쪽의 돔 위로 높이 바깥쪽 돔을 올리는 것이었다.[14]

미켈란젤로가 그린 도면에는 반구 형태가 아닌 그의 초기 발상이 나타난 달걀 형태의 돔이 그려져 있다.[21] 판화에는 반구형의 돔이 그려져 있으나, 아마 이는 판화가의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나무 모형의 윤곽은 판화의 것에 비하면 달걀 형태에 가까우나, 완성된 돔에 비하면 덜 가깝다. 미켈란젤로가 임종할 무렵 돔을 더욱 뾰족한 형태로 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제임스 리스밀른은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변동사항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었고, 교황 식스토 5세는 미켈란젤로에 대해 그가 수용할 수 있는 과학적 이해가 부족하다고 보았다고 언급했다.[14]

헬렌 가드너는 미켈란젤로가 둥글게 늘어선 거대한 벽기둥들의 동적인 수직적 요소와 상대적으로 정적이고 안정된 돔의 균형을 맞추려고 아랫부분의 반구형 돔을 수정했을 것이라고 시사했다. 가드너는 또한 “(미켈란젤로에 의해) 건축물의 조각은 중층을 두어 땅에서 위로 확장하고 원통형 벽과 그 위에 있는 돔으로 나아가, 전체 건물은 기반부에서 최고점까지 단일한 개체로 함께 통합된다.”라고 언급했다.[21]

건물을 둘러싸는 벽 돌림띠를 통해 건물이 조각되고 통합되며, 조화된다고 하는 건물에 대한 의식으로 미냐카는 현재의 달걀형의 윤곽이 결정되었다고 보는데, 이는 미켈란젤로의 초기(와 후기) 개념에서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조각가이면서 건축가인 미켈란젤로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전의 설계안들을 가지고 각 설계안의 윤곽을 집약하여 건물이 찰흙 덩어리인 것처럼 다루었다. 건물의 각도를 직선으로 하고 건물이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것을 억제하려는 시각적인 압력 때문에 대성당의 돔은 “확실히” 위를 향해 상승하는 것으로 보인다.[23] 이런 설명이 정확한 것이라면, 돔의 윤곽은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생각했던 것처럼 구조적인 해결책만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시각적인 긴장과 압축에 대한 집적된 설계안 일부이다. 어떤 면에서 미켈란젤로의 돔은 피렌체 대성당의 고딕 양식의 윤곽으로 되돌아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나, 다른 면에서는 1500년대의 다른 어떤 건물들보다도 바로크 건축의 형상을 미리 예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완성 [ 편집 ]

돔 공사는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폰타나가 시작해 끝마쳤다.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폰타나는 교황 식스토 5세의 치세 마지막인 1590년에 대성당의 중앙 돔을 완공하였다. 새 교황 그레고리오 14세는 폰타나가 채광창을 완성한 것을 보고 식스토 5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명각을 돔 안쪽 틈에 새기도록 하였다. 다음 교황 클레멘스 8세는 대성당 안에 십자가를 세운 날을 기념하고자 온종일 축제를 벌이고, 모든 도시의 성당들에게 종을 울리라고 명령하였다. 십자가의 양팔 부분은 두 개의 납 용기로, 한쪽에는 성십자가의 파편과 성 안드레아의 유골이 들어 있으며, 다른 한쪽에는 거룩한 양의 원형 초상화를 담고 있다.

18세기 중반, 돔에 균열이 생기자 붕괴를 막고자 두 외관 사이에 네 개의 쇠사슬을 고리처럼 설치하였다. 여러 시대에 걸쳐 열 개의 쇠사슬이 설치되었다. 그 가운데 최초는 미켈란젤로가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에 한 예방조치처럼 고안했을 것으로 보인다.

돔 내부 둘레에는 2m(6.5 ft) 짜리 글자가 새겨져 있다:

“ TV ES PETRVS ET SV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TIBI DABO CLAVES REGNI CAELORVM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 16,18-19.) ”

밑쪽의 채광창에는 다음과 같은 명각이 있다:

“ S. PETRI GLORIAE SIXTVS PP. V. A. M. D. XC. PONTIF. V. (성 베드로의 영광을 위하여, 식스토 5세 교황, 교황 재위 제5년, 1590년.) ”

미켈란젤로의 도면 발견 [ 편집 ]

2007년 12월 7일, 미켈란젤로가 직접 그린 것이 확실한, 붉은색 분필로 그려진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단면도가 바티칸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되었다.[27] 이 도면에는 돔의 원통 부분에서부터 두 개의 원기둥 위에 있는 엔타블레이처(기둥이 떠받치는 수평 부분)의 설계도가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죽기 전에 수천 장의 도면들을 없애 버린 것으로 알려졌다.[28] 이런 도면들 가운데 이 단면도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작은 종잇조각에 불과한 데다가, 상세한 수학적 계산식이 도면의 윗부분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27]

입구 쪽 방향으로 바라본 네이브

계획 변경 [ 편집 ]

교황 바오로 5세의 치세인 1606년 2월 18일 사순시기 첫 주간, 콘스탄티노 대성당의 남은 건물을 파괴하였다.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 의해 박공벽 꼭대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상이 끌어 내려지고, 대신 대리석 십자가가 놓였다. 재목은 보르게세 궁전의 지붕을 보수하는 데 썼으며, 옛 대성당 건물 가운데 가장 큰 것이었던 귀한 검은빛의 대리석 기둥 둘은 정성 들여서 보관하다가 나중에 나르텍스를 지을 때 사용하였다. 새로 지은 대성당에 다시 묻는다는 계획에 따라 수많은 교황의 무덤들을 발굴하여 금은보석과 함께 옮겨 놓았다.

1602년 교황은 카를로 마데르노를 건설 총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도메니코 폰타나의 조카인 마데르노는 자신이 정력적인 건축가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건물을 경당들로 둥글게 에워싸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하지만, 교황은 미켈란젤로가 이미 40년 전에 죽었음에도 그의 고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주저하였다. 대체로 대성당을 모든 기독교도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로마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교황청으로부터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다양한 나라에서 모집한 건축가들로 구성된 모임인 건축 위원회(Fabbrica)에서는 앞으로 건축 작업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교황청의 생각에 영향을 끼친 것 가운데 하나는 가톨릭 개혁의 영향으로, 당시 그들은 그리스 십자가 고안을 이단과 연관된 것으로 취급하고, 라틴 십자가를 진정한 기독교의 상징으로 보고 있었다.

건축 위원회와 교황청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하나는 고대 건물을 파괴하는 것은 범죄라는 생각이었다. 그 땅 위에 오랫동안 있었던 제의실과 성구실을 여러 경당과 함께 축성하였다. 유일한 해결책은 전체 공간을 둘러싼 네이브를 짓는 것이었다.

1607년 위원들 가운데 호출받은 열 명의 건축가는 미켈란젤로의 건물 안 중랑을 확장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중랑과 외관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고안이 받아들여졌다. 건축은 1607년 5월 7일에 시작되었으며, 700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노동자를 고용한 덕분에 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다음해에 외관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1614년 12월 아치 천장에 치장 벽토를 바르는 것을 끝으로 다시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1615년 초기에는 두 구획을 나누었던 가운데 벽을 허물었다. 모든 파편들은 짐수레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으며, 중랑은 종려주일에 맞춰 개장하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외관은 마데르노의 설계도에 따라 1607년부터 시공하여 1614년에 완공했다. 대성당 외관은 높이 45.44m, 너비 114.69m의 대규모인데 그 앞에 높이 27m, 지름 약 3m의 거대한 대리석 기둥 여덟 개를 세워 놓았다. 외관 윗부분에는 중앙에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안고 있으며 좌우에 열한 제자의 모습이 대리석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성 베드로의 자리에는 성 요한 세례자의 대리석상이 대신 차지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성 베드로의 대리석상이 이미 성 베드로 광장 안에 성 바오로의 대리석상과 함께 서 있기 때문이다. 대리석상 하나의 높이는 약 6m에 달한다. 외관 표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IN HONOREM PRINCIPIS APOST PAVLVS V BVRGHESIVS ROMANVS PONT MAX AN MDCXII PONT VII(사도들의 으뜸의 영예로 선출된 바오로 5세 보르게세 교황, 교황 재위 제7년, 1612년)

대성당 외관에는 중앙 난간을 위시해 모두 세 개의 옥외난간이 있다. 중앙 난간에서는 일명 콘클라베라고 불리는 교황 선거에서 새로 선출된 새 교황이 군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 연설하는 공식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또 이 장소에서 매년 성탄절과 부활절 정오에 전 세계에 보내는 교황의 축하 메시지를 낭독하고 있는데, 교황의 이러한 행사를 우르비 엣 오르비라고 부른다.

나르텍스와 입구 [ 편집 ]

성 베드로 대성당의 외관 뒤에는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긴 열주 현관 또는 “나르텍스”라는 것이 있다. 이는 마데르노가 스스로 크게 만족한 설계안 일부이다. 이곳의 반원통형 둥근 천장은 화려한 회칠과 도금이 되어 있고, 삼각 궁륭들 사이의 작은 창들로 빛이 들어오는데 화려한 대리석 바닥이 광장에서 들어온 빛들이 반사되어 빛을 발한다. 나르텍스의 각 끝 부분에는 이오니아식 기둥에 의해 틀이 짜인 다소 극적인 공간이 있으며, 각각의 공간 안에는 기마상들이 있는데 남쪽에는 코르나키니의 샤를마뉴(18세기경)가 있고 북쪽에는 베르니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있다.

다섯 개의 입구들(그 가운데 셋은 거대한 고대의 기둥들로 틀이 짜여 있음)은 대성당으로 통하는 출입구이다. 가운데 입구는 안토니오 아베를리노가 1455년 옛 대성당을 위해 만든 청동 문으로 되어 있으며, 이는 새로운 공간에 맞도록 어느 정도 확장된 것이다.

마데르노의 중랑 [ 편집 ]

마데르노의 중랑, 성단소 방향

미켈란젤로의 그리스 십자가형 평면에는 베이가 하나만 있었지만, 마데르노에 의해 세 개로 더해졌다. 마데르노는 미켈란젤로의 베이와는 면적이 조금 차이가 나게 함으로써 두 건축 작업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또한, 그는 중랑(中廊)의 축을 약간 비스듬하게 하였다. 비평가들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바깥의 광장에는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는데, 이 오벨리스크가 미켈란젤로의 건물과 일직선으로 맞지 않아 마데르노가 두 건물을 일직선으로 맞추려고 축을 바로잡은 것이다.[14]

중랑은 미켈란젤로의 작업과 조화를 이루며 한 쌍의 거대한 벽기둥을 가지고 있다. 내부공간의 크기는 이곳이 건물 내부 규모라는 감각을 갖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게” 넓다.[14][29] 중랑의 첫 번째 기둥들을 등지고 날개를 퍼덕이는 두 쌍의 커룹상이 있다. 커룹상들 사이에는 두 개의 성수반이 있다. 높이가 모두 2m가 넘기 때문에 실제 어린이들은 대리석 커튼을 기어오르지 않으면 성수반에 닿을 수 없다. 측랑들은 각각 두 곳의 작은 경당과 그보다 더 큰 직사각형의 경당, 성사(聖事) 경당과 성가대석 경당을 갖고 있다. 이 경당들은 대리석, 치장 벽토, 금박, 조각과 모자이크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구역에서 눈에 띄는 몇몇 그림들이 있는데,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성모” 같은 경우는 모자이크로 다시 창작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귀중한 그림은 옛 대성당에서 옮겨 온 성모 마리아의 작은 초상화이다.[14]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마데르노가 한 마지막 작업은 지하실 비슷한 공간인 돔 아래의 콘페시오(Confessio)를 설계한 것으로, 이곳은 추기경들이나 특별히 허가를 받은 사람들만이 성 베드로가 묻힌 장소에 가까이 가도록 내려가는 곳이다. 이곳의 대리석 계단들은 옛 대성당에 있었던 것으로 계단의 난간 주위에는 95개의 청동 램프가 있다.

대성당의 가구 [ 편집 ]

교황 우르바노 8세와 베르니니 [ 편집 ]

어린 시절, 화가 안니발 카라치와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찾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는 성 베드로를 위해 거대한 옥좌를 세우고 싶어했다.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1626년 청년이 된 그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협찬을 받아 50년 동안 대성당을 꾸미는 작업에 매달렸다. 1629년 마데르노의 후임자로 정해진 그는 바로크 시대의 위대한 건축가이자 조각가로 평가받게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그의 작품은 발다키노를 포함하여 성체 경당, 네 개의 벽감 계획, 창문과 창문 사이의 벽 부분에 있는 로지아, 베드로의 의자 등이다.

베르니니의 발다키노와 제대

발다키노와 벽감 [ 편집 ]

대성당 한가운데에는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곳인 중앙 제대가 있고 그 위를 닫집 모양의 발다키노가 덮고 있는데, 그 높이가 꼭대기의 황금 십자가 부분까지 29m나 되며 무게는 자그마치 37,000kg에 달한다. 베르니니의 작품인 이 발다키노는 1625년 우르바노 8세의 명령에 따라 1633년 6월 29일 성 베드로의 축일에 완성했다. 발다키노의 지붕을 받치는 네 개의 나선형 기둥은 마치 소용돌이치듯 감겨 있는 모양을 띠고 있는데 이는 사람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내부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빛을 뿜어내는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고, 위쪽으로 네 명의 천사가 화관을 하늘로 끌어올리고 있다. 또 다른 작은 천사들은 삼중관과 열쇠, 칼과 복음서를 들고 있다. 삼중관과 열쇠는 성 베드로를, 칼과 복음서는 성 바오로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발다키노는 높은 예술성에도 제작 당시에는 과다한 청동 사용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판테온 내부 천장에서 수십 톤의 청동을 떼어와야 할 정도였다 한다.[30] 이 제대에 오르도록 설치된 일곱 개의 계단은 한 개의 대형 대리석을 깎아 만든 것이다. 중앙 제대 아래쪽의 작은 벽감 안에 은으로 장식된 작은 상자가 있다. 이는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봉헌한 것인데, 그 안에는 교황 리노가 사용했다고 전해오는 팔리움이 들어 있다. 이 팔리움은 성녀 아녜스 축일에 봉헌된 하얀 양털을 축성하여 그 실로 다시 짜서 만들었다.[31] 한편 이곳은 전통적으로 새로 임명된 주교 또는 로마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세계 각국의 주교단들이 자신들이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아울러 교계제도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이나 갱신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통은 6세기경부터 생겼다. 중앙 제대 밑에는 성 베드로를 포함한 역대 교황의 시신이 안치된 지하 묘지가 있다.[31]

중앙 제대를 사이에 놓고 쿠폴라를 받치는 네 모서리 벽에는 각각 네 개의 커다란 대리석상이 자리 잡고 있다. 1629년~1640년 사이에 조각한 작품들로 성 론지노(베르니니의 작품), 성녀 베로니카(프란체스코 모키의 작품), 성 안드레아(프랑수아 뒤케스노이의 작품), 성녀 헬레나(안드레아 볼지의 작품)의 석상들이다. 이 석상들 위 난간에 각각 두 개씩 모두 여덟 개의 대리석 원주가 있는데 이 원주들은 신축 이전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 기둥이었다.[32] 그 위로는 경당이 하나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사순절 마지막 시기인 성주간 동안에만 예수의 땀을 닦았다고 전해지는 수건, 예수가 못 박혔다고 전해지는 성십자가의 나무 조각, 예수의 허리를 찔렀다고 전해지는 성창 등의 성유물들이 일반인들에게도 특별히 공개를 허가하고 있다.[31]

베드로의 의자와 성체 경당 [ 편집 ]

베르니니의 “베드로의 의자”와 “영광”

베드로의 의자(Cathedra Petri)는 중앙 제대 뒤쪽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할 때 앉았던 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모아 5세기경 상아로 장식된 의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베르니니를 시켜 그 의자 위를 무게가 약 75,000kg에 달하는 청동으로 입히고 장식을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의자의 네 다리를 무게 39,000 kg, 높이 4~5m의 청동상들이 잡고 있는데, 앞의 두 명은 서방 교회의 교부들인 성 암브로시오와 성 아우구스티노이며, 뒤쪽으로는 동방 교회의 교부들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성 아타나시오이다. 의자를 받치는 네 인물 형상들은 망토를 펄럭이며 경배와 환희의 감정을 표현하는 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의자 위쪽을 보면 천연대리석을 얇게 깎아 유리처럼 보이는 타원형의 창 안에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하늘에서 비치는 빛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비둘기 날개의 폭은 1.75m에 달한다. 그리고 이 창을 잘 살펴보면 열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를 뜻한다. 그리고 타원형의 둥근 모양이 세 부분으로 구성된 까닭은 삼위일체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비둘기 주위는 구름에 둘러싸인 천사들이 에워싸고 있다.[31] 초로의 화가인 안드레아 사키는 베르니니가 이 형상들을 크게 만들도록 설득했으며, 그리하여 네이브의 중앙 입구로 들어섰을 때 이 작품들이 뚜렷하게 보이게 되었다. 베드로의 의자는 1666년 1월 16일 성대한 의식을 통해 대성전에 안치되었다.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한 마지막 작업은 1676년에 맡은 성체 경당의 장식이다. 그는 성체를 보관하기 위한 장소로서 브라만테의 템피에토를 축소한 형태를 한 경당을 도금한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이 작은 경당은 성 베드로가 순교한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양쪽에는 천사상들이 있는데 한 천사는 경외심으로 가득 찬 얼굴로 경배하고 있으며 다른 천사는 감상자를 향해 환영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베르니니는 1680년에 82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4]

성 베드로 광장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성 베드로 광장 입니다.

대성당 동쪽에는 성 베드로 광장(Piazza di San Pietro)이 있는데, 1656년부터 1667년까지 11년 동안 베르니니의 설계로 세워졌다. 설계자 베르니니는 단순한 균형미를 광장 설계의 중심 주제로 했다. 광장에 들어서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양쪽에 서 있는 타원형의 대회랑이다. 모두 284개의 원기둥꼴 대리석 기둥이 각각 네 줄로 양편에 당당히 서 있는데, 기둥 하나의 높이가 16m나 된다. 그 위에 성인과 교황의 모습들이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서 있는데 모두 140개이며 대리석상 하나의 높이는 3.24m의 거대한 석상이지만 순례자들의 눈에는 조그마한 모습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까닭은 광장과 대성당의 웅장한 규모 때문이다. 광장은 폭이 246m이며 광장 입구에서 대성당의 입구까지 길이만도 무려 300m나 된다.

광장 양 옆에 있는 두 개의 분수대.

광장 한가운데에 해시계처럼 우뚝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오벨리스크는 원래의 자리가 이곳이 아니라 대성당 정면을 바라보면서 왼쪽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네로 전용의 개인 경기장이 있던 자리인데 오벨리스크는 경기장의 장식을 위해 그 안에 세워져 있었다. 바로 이 경기장에서 성 베드로가 순교를 당했고, 이를 기념하여 훗날 이 자리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었던 것이다. 네로의 경기장은 대성당을 건립할 때 모두 철거되었지만, 오벨리스크만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 후, 식스토 5세 교황의 명령에 따라 1586년 4월 30일 이전 공사를 시작하여 130일 후인 같은 해 9월 10일, 지금의 위치에 세우게 되었다. 받침대를 제외한 순수한 오벨리스크의 높이만도 25m이며 약 300t의 무게인 이 건축물을 이전하려고 동원된 근로자만 900여 명이었고 그 밖에도 말이 140여 필, 이전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권선기 47대 등 당시로써는 엄청난 대공사였다고 한다. 난공사 끝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진 오벨리스크 위에 청동으로 십자가를 제작해 올려놓았는데, 이 십자가 안에는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원본의 일부가 들어 있다.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화려한 바로크 문양으로 장식된 두 개의 분수대가 자리 잡고 있다. 대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오른쪽 분수대는 지금의 대성당 정면을 설계한 카를로 마데르노의 작품이며, 왼쪽의 것은 도메니코 폰타나가 설계한 작품이다. 이 두 분수대는 광장의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을 위해 건축했다고 하는데 종교적인 의미로 생각한다면,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물로써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욱 크다. 실제로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대성당에 순례 왔던 사람들은 모두 양쪽 분수대의 물을 손으로 떠서 머리 위에 먼저 뿌린 후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한편, 오른쪽 회랑 너머에는 교황의 거처인 사도 궁전과 바티칸 미술관 등 바티칸 시국의 실체가 있다.[31] 성 베드로 광장이 끝나는 곳에 가면 산탄젤로 성과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긴 도로에 들어선다. 이 도로의 명칭은 “화해의 길”이라는 뜻의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이다. 1929년에 바티칸과 이탈리아가 체결한 라테란 조약을 기념하고자 1937년 착공하여 1950년 성년을 맞아 개통되었다.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 양편에는 아름다운 건물들이 나지막하게 줄지어 있다.[33]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에서 바라본 로마

무덤 [ 편집 ]

대성당 내부에는 백 개가 넘는 무덤들이 있는데, 대부분 대성당 바로 밑 지하 동굴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성 베드로를 시작으로 역대 교황의 대부분을 비롯하여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2세 황제, 작곡가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도 매장되어 있다. 본국에서 추방당해 교황 클레멘스 11세에게 망명을 신청해 의탁한 영국의 가톨릭교도 왕족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와 그의 두 아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그리고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도 이곳에 묻혀 있다. 또한,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아내인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와 왕위를 포기하고 가톨릭 신앙으로 회심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도 이곳에 묻혀 있다.

수공예품 [ 편집 ]

종탑과 나르텍스 [ 편집 ]

성년에만 열리는 성년의 문.

대성당 정면 양 측면에는 두 개의 시계가 있는 종탑들이 있다. 왼쪽에 있는 시계는 1931년 이후 전기로 작동하고 있다. 대성당의 종은 1288년대에 제작하였다. 중앙 입구 위에 있는 모자이크 그림은 대성당의 가장 소중한 보물 가운데 하나이다. “나비첼라(Navicella)”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조토가 설계를 기반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하는 배를 표현하였다. 건물 앞에 서 있는 본당으로 들어가려면 입구의 회랑을 통과해야 한다. 길이 71m, 폭 13m, 높이 20m의 장엄한 회랑이다. 바닥에는 교황 요한 23세의 문장이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대리석상이 오른쪽에 있다. 이 석상은 베르니니가 1670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그 반대편에는 1725년에 아고스티노 코르나키니가 만든 샤를마뉴의 대리석상이 있다.

입구 회랑에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다섯 개 있는데, 맨 오른쪽에 있는 청동 문이 ‘성년의 문(Porta Santa)’이다. 1950년 성년을 기념해 스위스의 신자들이 제작하여 기증한 이 문에는 열여섯 편의 성경 이야기가 부조되어 있다. 또 같은 해에 제작된 ‘성사의 문(Porta dei Sacramenti)’ 역시 성년을 기념한 것이었다. 가운데에는 ‘중앙문(Grande Portale Centrale)’으로서 유일하게 초기부터 있던 청동 문이 있다. 1455년에 피렌체 출신의 안토니오 아베를리노가 제작한 이 문 위쪽에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아래쪽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부조되어 있다. 중앙문 바로 왼쪽에 있는 문이 1977년 9월 2일 교황 바오로 6세의 80회 생일을 기념해 만든 ‘선과 악의 문(Porta del Bene e del Male)’으로 오른쪽에는 선한 것을, 왼쪽에는 악한 것을 상징하는 형상들이 부조되어 있다. 맨 왼쪽의 문은 ‘죽음의 문(Porta della Morte)’으로 교황 요한 23세가 조각가 자코모 만추에게 요청해 만든 예술작품이다. 그 이름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거행할 때는 이 문을 통해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이 출입하게 된다.[34]

전통적으로 성년의 문은 50년 주기로 성년이 되는 해에 1년 동안 열리는데, 오직 교황만이 이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 지금의 문은 1950년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비코 콘소르티가 설계한 것이다. 문 위에는 성년의 문 개방을 기념해 새긴 비문이 있다: PAVLVS V PONT MAX ANNO XIII 그리고 GREGORIVS XIII PONT MAX . 근래의 기념 장식판은 아래와 같다:

FRANCISCVS PP

PORTAM SANCTAM

ANNO MAGNI IVB MM- MMI

A IOANNES PAVLVS PP II

RESERVATAM ET CLAVSAM

APERVIT ET CLAVSIT

ANNO IVB MISERICORDIAE

MMXV- MMXVI

IOANNES PAVLVS II P.M.

PORTAM SANCTAM

ANNO IVBILAEI MCMLXXVI

A PAVLO PP VI

RESERVATAM ET CLAVSAM

APERVIT ET CLAVSIT

ANNO IVB HVMANE REDEMP

MCMLXXXIII – MCMLXXXIV

IOANNES PAVLVS II P.M.

ITERVM PORTAM SANCTAM

APERVIT ET CLAVSIT

ANNO MAGNI IVBILAEI

AB INCARNATIONE DOMINI

MM-MMI

PAVLVS VI PONT MAX

HVIVS PATRIARCALIS

VATICANAE BASILICAE

PORTAM SANCTAM

APERVIT ET CLAVSIT

ANNO IVBILAEI MCMLXXV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5~2016년 자비의 희년을 맞이하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2000~20002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여닫은 성문을 여닫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1976년에 닫힌 성년의 문을 1983년-1984년 인류 구원의 성년을 맞이하여 여닫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리스도 강생 사건 기념으로 2000년-2001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성년의 문을 여닫다. 바오로 6세 교황이 1975년 성년을 맞이하여 바티칸 총대주교좌 대성당의 성년의 문을 여닫다.

중랑 [ 편집 ]

성녀 헬레나

성 론지노

성 안드레아

성녀 베로니카

북쪽 측랑 [ 편집 ]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피에타》

베르니니의 《진실》, 그녀의 발아래에 잉글랜드가 놓여 있다.

남쪽 측랑 [ 편집 ]

남쪽 측랑의 제1경당은 세례대이다. 교황 인노첸시오 12세에게 임명받은 카를로 폰타나(도메니코 폰타나의 종손)가 설계했다.

측랑의 첫 번째 피어를 배경으로 스튜어트 일족의 무덤이 있다. 제임스와 “보니 공 찰리”로 알려진 그의 아들 찰스 에드워드와 추기경이자 요크 공작인 헨리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신고전주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의 작품으로 1819년 공개했다. 찰스 웨드워드 스튜어트의 아내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의 기념비가 무덤 맞은편에 있다.

제2경당에는 《동정 마리아의 자헌》 성화와 교황 베네딕토 15세와 교황 요한 23세의 기념 동상이 있다.

피어들을 배경으로 교황 비오 10세와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기념 동상들이 있다.

제의실 입구에는 교황 비오 8세의 기념 동상이 있다.

남쪽 익랑에는 성 토마스와 성 요셉의 제대와 ‘십자가에 못 박힌 성 베드로’ 성화가 있다.

측랑 끝쪽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기념상이 있다.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바로크 시대의 훌륭한 대리석상 가운데 하나”로 불리고 있다. 대리석상 위쪽에는 교황이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마지막 기도를 바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곁에는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삼중관이 놓여 있다. 그 아래에는 구겨 놓은 종이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천연대리석이 보이는데, 이는 교황의 시신을 덮은 천을 뜻한다. 천 속에 모래시계를 든 해골의 모습이 보인다. 모래시계는 이승의 마지막 순간을 상징하고, 머리를 천으로 감싼 해골은 죽음이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기념 동상 주위에 네 여인의 석상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는 정의, 현명, 자비, 진실을 각각 상징한다. 그 중 진실을 뜻하는 여인의 석상은 원래 나체로 조각된 것을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가 그 위에 옷을 입혔다.[31]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성 베드로 대성당

르네상스는 기독교와 손을 잡고 인류사에서 영원히 빛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바티칸 한가운데 자리 잡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 바로 그것이다.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브라만테, 마데르노 같은 거장들이 설계하고 건축하고 조각한 최고의 건축물이다.

해마다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순례를 위해 또는 관광을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찾는다. 대성당이 품고 있는 르네상스의 향기를 맡아보려는 사람도 많지만, 대다수 관람객은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기독교의 성지를 둘러보는 감격을 누리려고 이곳을 찾는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기독교를 세계적 종교로 만든 성 베드로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대부분 관람객은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스쳐 지나가 버리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갈 때마다 눈여겨 보는 특이한 건축물이 있다. 성 베드로 성당 앞에 우뚝 서 있는 높이 25m의 오벨리스크다.

사실 오벨리스크와 성 베드로 대성당은 개념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적 상징물이었다. 이집트의 신전 입구에는 대개 오벨리스크 한 쌍, 즉 두 개를 세워놓는 게 일상적이었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 한가운데에 이교도의 상징인 오벨리스크를 가져다 놓은 것일까?

기독교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의 순교 장면을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입니다.”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광경을 지켜보았다.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고통에 시달리던 성 베드로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오벨리스크였는지도 모른다. 오벨리스크의 뾰족한 끝이 가리키던 곳이 천국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인근에서 가장 위치가 높았던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가 인근에 몰래 묻히는 모습도 목격했을 것이다.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 순교의 유일한 목격자라는 이유 때문에 이교도의 상징이면서도 살아남았다. 처음에는 옛 성 베드로 대성당 바깥에 서 있었다. 그러다 새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1568년 자리를 100m 쯤 옮겨 성 베드로 광장 한복판에 세워졌다.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오벨리스크는 많은 기독교인의 숭배를 받았다. 15세기 스페인 코르도바 출신의 여행가 페로 타푸르가 1436~39년 7년 동안 오대양 육대주를 두루 여행하고 쓴 『여행과 모험』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성 베드로 성당 인근에는 석재로 만든 높은 탑이 하나 서 있다. 마치 구리로 만든 세 다리로 버티고 선 삼각형 다이아몬드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탑을 아주 성스럽게 여긴다. 그래서 탑을 지날 때에는 마치 땅바닥에 붙어 기어가듯이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

오벨리스크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그가 목격했다는 성 베드로의 최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을 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성 베드로 순교 이후 2천 년 동안 벌어진 일들을 알아보려면 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칼리굴라-네로 전차경주장

성 베드로 순교와 오벨리스크 건립 역사는 뜻밖에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에 이어 제정 로마의 3대 황제였던 칼리굴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칼리굴라는 고대 로마 초대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외증손자였다. 아버지는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맹활약해 로마인의 사랑을 받았던 게르마니쿠스였다.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인 아그리피나였다. 황제의 피를 물려받은 칼리굴라는 어릴 때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면서 차기 황제감이라는 소리를 듣던 게르마니쿠스는 병에 걸려 30대 초반에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모든 로마인이 훌륭한 장군이었고 성격이 쾌활하고 좋았던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어느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은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를 의심했다.

“황제가 자리를 빼앗길까봐 남편을 시기해 독살한 거야.”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피나 때문에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느꼈다. 결국 그는 참다못해 벤토테네 섬에 아그리피나를 유배시켜 버렸다. 아그리피나는 끝내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병들어 죽고 말았다. 그녀의 큰아들 네로 카이사르는 반역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었다. 둘째 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도 마찬가지였다.

“칼리굴라도 곧 티베리우스 손에 목숨을 잃을 거야.”

부모형제를 모두 잃은 칼리굴라는 로마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됐다. 다들 칼리굴라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카프리 섬의 별장에 데리고 간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곳에서 몰래 죽여 묻어버리려는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황제라도 게르마니쿠스의 가족을 몰살하는 모습을 로마인에게 보여주는 게 부담스웠을 거라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칼리굴라는 늘 죽음의 공포를 품에 안고 살아야 했다. 섬에는 그를 딱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를 죽이지 않았다. 카프리 섬에서 6년 동안이나 데리고 살았다.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이어졌다. 서기 37년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서 눈을 감았는데 뜻밖의 유언을 남긴 것이다.

“칼리굴라를 후계자로 지명하겠소.”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티베리우스가 암살당했다고 생각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 연대기 』에서, 수에토니우스는 『 열두 명의 카이사르 』에서 ‘티베리우스는 암살당했다’고 기록했다. 타키투스는 암살 용의자자로 그의 경호대장인 마르코를,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를 지목했다.

세상 경험이 부족했던 칼리굴라에게는 제국을 통치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로마인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로마인이 좋아하는 오락을 마음껏 제공해 인기 있는 황제가 되기로 했다. 칼리굴라는 원로원에서 황제로 인정받은 뒤 3월 28일부터 10월 말까지 7개월 동안 거의 매일 검투사 시합, 전차경주, 체육대회를 열었다.

칼리굴라는 특히 전차경주를 매우 좋아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펼쳐지는 전차경주의 엄청난 속도전은 티베리우스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살았던 그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짜릿한 쾌감을 주었다. 칼리굴라에게는 좋아하는 전차경주 팀이 있었다. 경기가 끝나면 마구간에서 열리는 그 팀의 파티에도 참석해 기수들과 술잔을 나눌 정도였다.

칼리굴라는 전차를 직접 몰아보고 싶었지만 경주에 출전할 기량은 갖고 있지 못했다. 고민하던 그는 혼자서 마음껏 전차를 몰 수 있는 개인용 경기장을 짓기로 했다.

‘혼자 달리면 1등도 없고 꼴찌도 없잖아. 내 실력만큼만 달리면 되니 힘들 게 없겠지.’

전차경주장 건설 장소는 테베레 강 건너편 서쪽에 있었던 바티카누스였다. 땅 주인은 티베리우스 때문에 목숨을 잃은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였다. 이곳에 그녀의 별장이 있었다. 칼리굴라가 지은 전차경주장의 길이는 161m였다. 일부에서는 무려 500m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칼리굴라가 전차경주장을 건설한 장소는 당시에는 로마 시내에서 멀리 벗어난 외곽이었다. 왕정이나 공화정 초기 외적이 로마로 쳐들어오는 걸 감시하던 야니쿨룸 언덕 인근이었다. 로마로 몰려온 적군이 강을 건너 공격하기 앞서 진지를 설치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칼리굴라가 로마 시내가 아니라 외곽에 경주장을 지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로마 시내에는 전차경주장을 새로 지을 땅이 없었다. 또 인기를 유지하느라 시민들의 눈치를 많이 봤던 그로서는 시내에 사설 경주장을 만들 배짱이 모자랐을 것이다.

바티카누스에는 원래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살았다. 바티카누스라는 이름은 라틴어 바테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보는 사람, 예언자’를 뜻하는 바테스는 에트루리아인들이 모셨던 바티카누스(또는 바기타누스) 신을 모시던 사제를 일컫는 말이었다.

바티카누스는 출산의 신이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갓 태어난 아이가 처음 말을 하는 순간, 즉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신이었다. 라틴어로 ‘운다’는 단어가 바티카누스와 비슷한 ‘바기투스’였다. 과거에는 의료 기술이 떨어져 갓 태어난 아이들이 울음도 터뜨리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갓난아기가 울음을 터뜨릴 수 있게 해주는 신까지도 만들었다. 그곳에는 바티카누스의 신전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나도 외증조부인 아우구스투스처럼 전차경주장을 멋지게 꾸며야지.’

칼리굴라는 전차경주장에 오벨리스크를 하나 세우기로 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크를 가져와 키르쿠스 막시무스 즉 대전차경기장의 스피나 한쪽에 세운 것을 모방하기로 한 것이다.

칼리굴라가 가져오기로 결심한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30~28년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이집트 총독 코르넬리우스 갈루스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율리우 포룸에 옮겨둔 것이었다.

문제는 오벨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배에 실어 바다를 건너 오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조각으로 잘라서 여러 배에 나눠 싣고 오는 게 최상책이었다. 하지만 칼리굴라의 생각은 달랐다.

“세상에서 가장 큰 배를 만들어라. 위대한 제국 로마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칼리굴라는 오벨리스크를 절단하지 않고 통째로 운반할 수 있는 초대형 선박을 만들기로 했다. 로마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선박이었다. 무게만 해도 800t에 이르렀다. 중앙 돛대는 엄청 굵어서 선원 네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배 길이는 오늘날 항공모함과 비슷한 105m, 너비는 20m였다. 배는 6층이었다. 선원은 700~800명 정도였다.

십자가에 못 박힌 베드로

“모든 로마 시민이 전차경주장을 다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소. 그것이 황제의 깊고 넓은 은혜요.”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뒤를 이은 제5대 네로 황제는 칼리굴라가 지은 전차경기장을 고쳐 시민들에게 오락장으로 개방했다. 사람들은 이 경기장을 칼리굴라-네로 경기장이라고 불렀다. 또는 가이우스-네로 경기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칼리굴라의 이름이 가이우스였기 때문이었다.

“시민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요. 한 명도 빠지지 말고 참석하시오.”

네로는 전차경주장에서 이색 체육대회를 열었다. 바로 육상대회였다. 대회 참가자는 지도 계층인 원로원 의원들과 기사계급이었다. 평민은 관중석에서 경기를 구경했다. 나이가 들어 운동을 하지 않아 살이 찐 의원들이 달리기를 하는 모습은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평민이 깔깔 웃으면서 재미있게 보기에는 충분했다.

네로 황제는 큰 궁지에 몰렸다. 46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얻기 위해, 또는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라는 저택을 지을 부지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로마 시민들 사이에 퍼진 게 이유였다.

“유피테르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의 소행이다. 그들을 모두 색출해 엄단하라.”

네로는 탈출구를 기독교에서 찾았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멸망을 꿈꾸면서 일부러 불을 질렀다고 몰아세운 뒤 수백 명을 붙잡아 처형했다. 많은 사람은 기독교도 처형 장소를 콜로세움이라고 오해하지만, 실제로는 ‘네로 전차경기장’으로 불렸던 곳이 바로 순교의 현장이었다.

당시 로마 대화재 때문에 대전차경기장(치르쿠스 막시무스) 등 큰 시설이 대부분 소실되는 바람에 처형에 이용할 만한 장소를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네로는 로마 외곽 먼 곳에 있는 칼리굴라-네로 전차경기장을 기독교도 탄압 장소로 고를 수밖에 없었다.

1~2세기 로마 원로원 의원이었고 역사학자였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는 『연대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사람들의 도움도, 황제의 자비도, 신을 달래려는 모든 노력도 불이 누군가의 지시로 일어났다는 소문을 잠재우지 못했다. 네로는 소문을 없애기 위해 가장 끔찍한 처벌을 내릴 희생양을 선택하기로 했다. 당시 로마인에게서 혐오를 받고 있던 기독교인이었다.

처음에 일부가 붙잡혀 죄를 자백했다. 그어 더 많은 사람이 붙잡혔다. 그들의 혐의는 방화가 아니었다. 다른 로마인을 향한 반감이 그들의 죄목이었다. 그들은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끌려 나가 개들에게 물어 뜯겨 산산조각 났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도 했고, 해가 져 어두워지면 밤을 밝히려고 산 채 화형 당했다.

기독교인이 본보기 처벌을 받았다는 연민이 로마인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기독교인은 로마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개인의 광기를 위해 처형당했다는 것이었다.’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시기도 바로 이 때였다. 그의 죽음을 다룬 최초의 기록은 96년 로마 주교였던 클레멘스가 그리스 코린트의 한 교회에 보낸 편지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베드로는 부당한 시기질투 때문에 한두 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고역을 겪어야 했다. 결국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에게 주어진 영광의 장소를 향해 떠났다.’

2~3세기 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의 기독교 작가인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는 『전갈 우화』란 책에 이렇게 기록했다.

‘성 베드로의 순교는 네로가 기독교도들을 처형할 때 일어났다. 기독교도 처형은 네로 대전차경기장 근처에 있는 황제의 정원에서 벌어졌다.’

성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그리스의 기독교 역사가 에우세비우스 팜필이 남긴 기록 때문이었다.

‘성 베드로가 로마에 왔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다.’

팜필은 그보다 이전 시대에 살았던 신학자 오리겐으로부터 이런 정보를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부터 성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게 됐다. 물론 다른 기록으로는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베드로 유해의 방랑

성 베드로가 순교한 뒤 시신을 수습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누구든 죽으면 무덤을 갖게 하는 게 고대 로마의 풍습이었다. 그래서 순교한 기독교인의 유족들은 순교자가 세상을 버린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시신을 묻을 수 있었다. 순교자들이 묻힌 곳은 대부분 기독교인이 소유한 땅이었으며, 도시 밖으로 이어지는 유명한 도로 주변이었다.

성 베드로는 바티칸 인근이던 비아 코르넬리아에, 성 바오로는 비아 오스티아나에 묻혔다. 당시 비아 코르넬리아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기독교인는 물론 이교도도 묻히던 곳이었다. 성 베드로의 무덤은 지하 납골소에 만들어졌다. 계단을 통해 걸어 내려가야 하는 곳이었다. 시신은 석관에 넣어 납골소 가운데에 모셨다. 라틴어로 성서를 번역한 성 제롬은 392년에 저술한 저서 『현인열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성 베드로는 로마 영광의 길 근처 바티칸에 묻혔다. 그곳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초대 교황 성 베드로에서 시작해 역대 교황의 일대기를 담은 『교황들의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교황 아나클레토가 성 베드로 순교 직후 지하 무덤 위에 기념물을 지었다. 서너 명이 무릎을 꿇고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이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무덤에는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 기독교 박해가 이어지는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순례자들은 성인의 무덤에서 예배를 드리다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혀가기도 했다. ‘배교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율리아누스 황제는 363년에 발표한 저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세 가지 책』에 이렇게 기록했다.

‘성 베드로의 무덤은 예배의 장소가 됐다. 물론 비밀리였지만.’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유해는 200년가량 지하 납골소에 안전하게 모셔져 있었다. 망자가 묻힌 곳은 절대 훼손하지 않는 게 고대 로마 풍습이었던 덕분이다.

하지만 258년 군인황제 시대에 상황은 돌변했다. 군인 출신으로 야만족을 물리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무덤을 보호하는 풍습의 특권에서 기독교인을 제외한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황제를 무시하고 로마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기독교인은 로마에 묻힐 자격이 없다. 불손한 기독교인의 무덤까지 보호할 이유는 없다.”

이교도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유해를 훼손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기독교인은 비밀리에 두 성인의 유해를 빼내 성 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베 깊숙한 곳에 숨겼다. 두 성인의 유해를 옮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 기독교인은 두 성인의 유해가 원래 무덤에 그대로 있다고 믿었다.

세월이 흘러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기독교 탄압이 시들해졌을 때에야 성 베드로의 유해는 바티칸으로, 성 바오로의 유해는 비아 오스티아나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

“폐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성전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로부터 성 베드로를 기리기 위해 대성당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짐도 성전 공사비를 보태도록 하겠소. 성전은 어디에 지을 생각이시오?”

“성 베드로의 성전은 바티카누스의 칼리굴라-네로 전차경주장 일대에 짓도록 하겠습니다. 성 베드로께서 순교하신 바로 그 장소에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게 기독교 전체의 뜻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성 베드로 성전은 바티칸의 칼리굴라-네로 전차경주장은 물론 주변의 언덕 지역을 허문 뒤 건설하기로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사재를 털어 성전 건설비에 보탰다. 또 성전 공사현장에 직접 나가 땀을 흘리며 일하기도 했다. 그는 무거운 벽돌을 지고 하루종일 바티카누스 언덕을 오르내렸다.

“폐하, 이제 그만 쉬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무리하시다간 건강에 탈이 나겠습니다.”

“헛헛, 이 사람아! 이래봬도 평생을 전쟁터에서 몸을 단련한 군인인데, 벽돌 몇 장 나른다고 탈이 난다면 사람들이 웃지 않겠나?”

콘스탄티누스가 공사 기간 내내 벽돌을 나른 것은 아니었다. 그가 땀을 흘린 시간은 불과 하루이틀이었다. 그래도 황제가 공사장에서 땀을 흘렸다는 사실은 로마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로마 왕정과 공화정 시대, 그리고 제정 초기에는 왕, 집정관, 황제나 원로원 의원 등 저명인사들은 중요한 공사장에서 일손을 보태는 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정 말기 들어 로마가 흔들릴 무렵에는 이런 공공의식은 바람 속의 먼지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시작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공사를 맡은 건축기사 등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찾아갔다. 그들은 아주 난처한 표정으로 황제에게 하소연했다.

“폐하, 저희들은 지상에 살고 있는 탓에 천상에서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과 성 베드로 성하의 뜻을 따라갈 수 없는 일이 가끔 생기는 법입니다. 지금 그런 어려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절대 저희들이 게으르거나 실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베드로가 순교한 자리에는 ‘바위’라는 뜻인 베드로의 이름에서 착안해 붉은 바위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곳이 베드로의 무덤이라는 걸 표시한 것이었다. 3대 교황이었던 성 아나클레토(재임 79~92년)는 바위가 놓여 있던 곳의 납골소 둥근 천장 바로 위에 3~4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을 지었다. 예배당은 이후 로마 기독교인의 마음속에 아주 소중한 성소로 자리 잡았다.

건축기사 등이 호소한 어려움은 바로 이 예배당이었다. 새로 대성당을 만들려면 예배당을 뜯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예배당은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만들어진 최초의 성소’라는 상징적 의미가 컸기 때문에 기독교는 예배당 철거에 반대했다.

건축기사 등은 예배당에 전혀 손을 댈 수 없었다. 이런 상태라면 공사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대성당의 구조를 희한하게 바꿀 수밖에 없었다. 건축기사 등이 호소한 하늘의 뜻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불렀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건축기사 등이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호소하는군요. 예배당을 없애지 않는 한 대성당 공사가 매우 어려울 거라고 하네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당을 뜯어내서는 안 됩니다. 오랜 박해 속에서도 지켜온 예배당입니다. 공사의 어려움을 이유로 없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대성당을 안 짓는 게 낫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할 수 없이 예배당을 그대로 둔 채 대성당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대성당은 건축기사들의 우려대로 아주 희한하면서 독특한 모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여러 차례 대성당을 증축, 개축할 때도 이 모양은 유지됐다.

예배당을 그대로 둔 채 대성당을 짓는 바람에 생각하지도 못한 부작용이 생겼다. 성 베드로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원래의 지하 납골소로 가는 게 매우 어려워진 것이었다. 게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지하 납골소로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은 모두 세상을 떠나 버렸다. 결국 아무도 그곳에 갈 수 없게 됐다. 1900년 교황 레오 13세(재임 1878~1903년)가 추기경들의 뜻을 모아 납골소를 찾아 문을 열어보려고 시도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교황들의 책』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성 베드로의 원래 무덤에 덧붙인 관의 장식이 묘사돼 있다.

‘석관은 구리로 덮여 있다. 각 면의 길이는 152㎝다. 석관 위에는 무게 68㎏인 황금 십자가가 놓여 있다. 십자가에는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와 헬레나 아우구스타, 황제의 영광으로 빛나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가 적혀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는 318~322년 사이에 시작됐다. 완공까지는 40여 년이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 총 길이가 110m 정도였던 대성당은 한 번에 3천~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후 두 세기가 지나는 동안 성 베드로 대성당은 기독교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로 성장했다. 9세기 무렵부터는 교황 대관식이 이곳에서 거행됐다. 역대 교황들은 나중에 새 대성당이 지어진 뒤에도 대관식을 계속 진행했다. 1963년 바오로 6세(재임 1963~78년)가 폐지한 이후에야 교황 대관식은 비로소 없어졌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공된 뒤 대성 당 안에 교황들의 무덤이 연이어 만들어졌다. 초대교황 베드로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교황들의 뜨거운 열망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대성당에 무덤을 만든 교황은 레오 1세(재임 440~461년)였다. 이후 수 세기 동안 교황들은 안마당, 예배당은 물론 중랑까지 뜯어내 무덤을 마련했다. 이 무덤들은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만들 때 대부분 부서져 없어지고 말았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846년 사라센족의 로마 침입 때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을 포함해 일부 성당은 야만족의 침입이 거셌던 3세기 말 군인황제였던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 주변에 세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바깥에 있었다. 그래서 외적이 쳐들어올 경우 약탈을 피할 수있는 방법이 없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값비싼 예배용품과 순교자, 성인 등의 유해를 담은 성 유물함 등이 넘쳐났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사라센족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즐거운 마음으로 약탈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4세(재임 847~855년)는 파괴된 성 베드로 대성당을 복구하는 동시에 여러 성당을 보호의 테두리 안에 넣을 수 있도록 이른바 ‘레오의 성벽’을 건설했다.

사라진 베드로의 무덤

성 베드로 대성당은 14세기 무렵 황폐해졌다. 교황이 아비뇽 유수 때문에 로마를 떠나 프랑스에 감금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거나 새로 지어야 했지만 이 일을 추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페인 여행가 페로 타푸르가 로마와 바티칸을 방문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는 『여행과 모험』에 직접 본 로마와 바티칸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성 베드로 대 성당은 엄청나게 크다. 지붕은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하지만 관리 상태는 매우 부실하다. 더럽기도 하다. 많은 곳이 부식됐다. 로마는 크기에 비해 인구가 무척 적다. 거의 내버려진 도시처럼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큰 건물 잔해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공기는 정말 나빠 사람의 건강에 큰 해를 줄 정도다.’

황폐해졌든 부서졌든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 자체만으로 성소였다. 여기에 손을 댄다는 것은 신성성을 파괴하는 행동이라고 기독교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늘 고정관념에 어긋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1447~55년 교황이었던 니콜라오 5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런 지시를 내렸다.

“수리 작업에 사용할 자재를 구해야겠소. 콜로세움을 해체하시오.”

이에 따라 콜로세움에서 수레 2천522대 분량의 석재가 뜯겨져 대성당 공사장 앞으로 옮겨졌다. 지금 콜로세움 내부가 엉망이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니콜라오 5세의 지시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 때문에 그가 죽을 때까지 대성당 수리 작업은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50여 년 뒤 교황 율리오 2세(재임 1503~13년)는 니콜라오 5세보다 더 획기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그는 취임 2년 만인 1505년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반대했지만 그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이대로 둬서는 안 됩니다.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 대성하의 유해를 모신 성당이 이렇게 엉망이라는 건 신성모독입니다. 대성당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짓도록 하겠습니다.”

율리오 2세는 새 대성당을 짓기 위한 설계 공모전을 열었다. 여러 가지 설계안이 참가했다. 그 중 상당수는 현재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이 중에서 이탈리아 출신 르네상스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공사는 1506년 시작됐다.

이후 여러 교황이 대를 이어 조금씩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를 이어나간 교황은 율리오 2세에 이어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 비오 4세와 5세, 그레고리오 13세, 식스토 5세, 우르바노 7세, 그레고리오 14세, 인노첸시오 9세, 클레멘스 8세, 레오 11세, 바오로 5세, 그레고리오 15세, 우르바노 8세, 인노첸시오 10세 등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비가 모자라 면죄부를 발행하는 바람에 반발을 사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공사는 계속 진행됐다. 마침내 성 베드로 대성당은 착공 120년 만인 1626년 완공됐다. 봉헌식은 그해 11월 18일 거행됐다.

그런데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공된 이후에는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찾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역대 교황은 무덤을 확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 부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40~49년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1세도 무덤을 찾는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그는 과거의 다른 교황들처럼 성 베드로가 묻힌 곳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영면하고 싶어 했다.

비오 11세는 성 베드로 무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고고학자들을 후원해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를 발굴하게 했다. 그 결과 5~12m 깊이에 있던 제정 로마 시대의 공동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차례 발굴 조사에서 많은 뼈가 발견됐다. 하지만 발굴조사단은 성 베드로의 무덤이 어느 것인지, 뼈 가운데 어느 것이 성 베드로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교황은 결국 1950년 12월 이렇게 발표했다.

“어느 게 베드로의 뼈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교황은 안전을 이유로 뼈를 비밀 장소에 보관했다.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뼈가 발견됐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1968년 마르게리타 과르두치라는 여성 인류학자가 뼈를 우연히 발견하고 연구를 다시 진행했다. 그 결과 비오 11세 때 발견한 뼈는 남성의 것이라는 게 확인됐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1세기 무렵에 살았던 61세 전후의 남성이라는 것이었다. 과르두치는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이런 사실을 보고했다. 교황은 바로 조사 내용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성 베드로의 유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 베드로의 유해로 추정되는 뼈는 다시 비밀 공간에 갇혀 버렸다. 일부 성직자 외에는 아무도 그걸 볼 수 없었다. 그러다 2013년 11월 24일 교황 프란체스코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미사에서 사상 처음 성 베드로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 6개를 대중에게 공개했다. 바티칸에는 스카비라는 지하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에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런데 그 사이 이런 일이 벌어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53년 예루살렘에서 뜻밖의 유해가 나왔다.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예루살렘 인근 감람산의 동굴에서 1세기 것으로 보이는 납골 항아리 수백 개를 발견한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예루살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물질적 증거입니다.”

항아리에는 성경에 자주 나오는 이름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 중 한 항아리에는 ‘Shimon Bar Yonah’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이었다. 성 베드로의 원래 이름이었다.

고고학자들이 이같은 발굴 결과를 발표하자 가톨릭, 개신교 등 모든 교회 학자들이 반박하고 나섰다.

“항아리에 세파, 또는 베드로라는 글자가 없으므로 베드로의 유해가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이 항아리 유해의 주인이 정말 베드로라면? 성 베드로 대성당을 포함해 기독교 역사는 완전히 새로 써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출입문이 다섯 개 있다. 문마다 이름이 다 다르다. 입구를 마주보고 섰을 때 맨 왼쪽은 ‘죽음의 문’이다. 대성당에서 장례식이 열리면 장례행렬이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다음은 ‘선악의 문’이다. 1970~77년 교황 바오로 6세의 8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문이다. 문의 오른쪽 부조는 선을, 왼쪽 부조는 악을 상징한다.

세 번째이면서 가운데 문은 ‘필라레테 문’이다. 다섯 개의 문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문을 만든 안토니오 아베룰리노의 별명이 필라레테여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네 번째는 1965년에 만든 ‘성례의 문’이다. 성당으로 들어갈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문이다. 문의 오른쪽 부조를 보면 천사가 세례, 견진성사, 보속(고해 신부가 정해주는 속죄 행위)을 거행하고 있다. 왼쪽 부조에서는 성체성사, 결혼, 신품성사, 병자성사를 거행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성스러운 문’ 즉 성문(聖門)이다. 또는 ‘대사면의 문’이라고 부른다. 이 문은 25년마다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 즉 성년(聖年)에만 열린다. 성년을 영어로 ‘Holy Year’ 또는 ‘Jubilee’라고 한다. 성문과 성년을 설명하려면 로마의 4대 메이저 대성당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라틴어로는 바실리카 마이오르, 영어로는 메이저 바실리카다.

바실리카 마이오르는 4곳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라테라노 대성당,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이다. 성당 네 곳 모두 교황청의 주권 구역인 바티칸 소속이다. 네 개 중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만 바티칸 영토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나머지 셋은 이탈리아 영토에 있다. 하지만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모두 외국대사관처럼 치외법권 적용을 받는다.

“성년에 완벽하게 죄를 고해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로마를 방문해서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을 순례해야 죄를 사면 받을 수 있습니다.”

바실리카 마이오르 제도는 1300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재임 1294~1303년)에 의해 도입됐다. 그는 ‘최고 신앙 보고’라는 칙령을 발표해 50년마다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를 뜻하는 성년 제도를 만들었다. 원래는 ‘노예와 죄수가 자유를 얻고, 모든 빚은 탕감되고, 하나님의 자비가 온 세상에 퍼진다’는 유대교의 전통이었다. 보니파시오 8세가 천명한 성년은 유대교 전통과 조금 달랐다.

다음 성년이었던 1350년 교황 클레멘스 6세(재임 1342~52년)는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바실리카 마이오르에 라테라노 대성당을 포함시켰다. 그는 신도들에게 이렇게 촉구했다.

“매일 세 개의 대성당을 찾아가 예배를 드리세요.”

다음 성년이었던 1390년에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도 바실리카 마이오르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역대 교황들은 “성년에 4대 성당을 방문하는 것은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중대한 조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슬람이 무슬림들에게 메카를 평생에 한 번은 순례하도록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바실리카 마이오르에 포함된 네 성당의 공통적인 특징은 성스러운 문인 성문을 각각 갖고 있다는 점이다. 성문은 평소에는 모르타르나 시멘트를 발라 안쪽으로 잠가 놓는다. 교황이 지정하는 성년에만 순례자들에게 개방한다. 순례자들은 이 문을 통과하면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다.

그런데 현직 교황 프란체스코는 2015년 전 세계 모든 교구에 매우 흥미로운 지시를 내렸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각 교구는 성문을 하나씩 지정해 성년에 굳이 로마로 오지 않더라도 절대적인 사면을 받을 수 있게 하세요.’

이에 따라 스페인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필리핀 마닐라의 산토 토마스 교황 대학교 예배당, 캐나다 퀘벡의 노트르담 대성당 등이 교황청으로부터 성문 지정 허가를 받았다. 다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 성당들이었다.

성년 첫날인 1월 1일 교황은 은 망치로 성문을 똑똑 두들긴다. 그러면 문이 열려 순례자들이 들어갈 수 있다. 성경에 ‘나는 문이니 누구든 나를 통해 들어오면 안전하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그래서 이 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예수의 자비를 통해 안전을 얻는다는 뜻이다.

성문은 성년 마지막 날 교황이 직접 닫는다. 성문은 지난 1975년과 2000년에 열렸다. 다음에 문이 열리는 해는 2025년이다.

피에타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가면 꼭 보아야 하는 작품이 있다. 입구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새긴 작품이다.

뜻밖에 성모 마리아는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어머니의 비통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낮잠을 자는 아들이 깨기를 차분하게 기다리는 모습이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화와 사랑이 넘쳐난다.

성모 마리아는 젊은 아들을 둔 50대 노파가 아니라 20대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미켈란젤로는 동료 조각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성모의 순수성과 순결성을 상징하기 위해서랍니다.”

미켈란젤로가 평소 존경했던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성모 마리아를 젊게 표현했다는 설도 있다. 신곡에 보면 “성모여, 당신 아들의 딸이시여”라는 표현이 나온다. 미켈란젤로는 이 구절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설명도 있다. 성모의 젊음, 차분한 표정, 그리고 침착한 자세는 관람객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다 큰 예수가 아니라 어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거꾸로 숨을 거둔 성인 예수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미래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현대적 분석도 있다.

“예수는 실제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묘사돼 있습니다. 엄마의 품에서 숨진 예수의 나약한 인간적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

피에타는 원래 로마에 가 있던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빌레레스가 미켈란젤로에게 부탁해 제작했다. 처음에는 추기경의 장례 예배당에 놓여 있었지만, 18세기에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져 현재 위치에 놓이게 됐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를 주제로 여러 작품을 만들었는데 대성당의 피에타가 가장 먼저 제작한 것이다. 원래 피에타는 프랑스에서 주로 다룬 주제였으며, 이탈리아 조각가들은 크게 선호하지 않았다.

피에타는 방탄 유리벽으로 보호를 받고 있어 제대로 보기가 쉽지 않다. 관광객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일정 거리 떨어져서 피에타를 감상할 수 있다.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조각은 피에타가 유일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972년 헝가리 출신의 라즐로 토스가 피에타를 부수는 반달리즘을 저지른 이후부터였다.

로마를 여행 중이던 그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다.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지질 탐사에 사용하는 망치를 15번이나 휘둘렀다. 이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팔 부분이 떨어져 나갔고, 코 부분이 손상됐다.

마침 옆에서 구경하던 미국 조각가 밥 캐실리 등 다른 관람객들이 그를 피에타에서 떼어내 제압한 덕분에 피에타를 산산조각의 위기에서 구했다. 토스는 분개한 다른 관람객에게 맞아 죽을 뻔 했지만 경찰이 달려들어 겨우 꺼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내와 두 아이까지 있었던 토스는 정신질환이라는 병원 진단에 따라 형사 처벌을 받지 않고 2년간 이탈리아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 호주로 강제 추방됐다. 이후 그의 행적은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일부에서는 토스가 교황을 만나 “파티마의 계시를 밝히라”고 말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피에타를 파괴했다고 주장한다. 파티마의 계시란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성모 마리아가 포르투갈 파티마에 나타나 내린 3가지 예언을 말한다.

3가지 예언 중 제1의 예언(지옥의 생생한 모습, 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제2의 예언(2차 세계대전 발발, 소련의 대두와 몰락)은 1942년에 교회에 의해 공표됐다. 그러나 나머지 세 번째 예언은 비밀에 부쳐져 교황청 말고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온갖 의혹과 추측의 대상이 됐다. 일부에서는 세계 멸망을 담은 게 아니냐고 추측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전 세계에 복제품이 많다. 교황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만든 복제품도 한 두 개가 아니다. 복제품 설치장소를 손꼽아보면 도미니카공화국 산티아고의 산티아고 아포스톨 대성당, 폴란드 포즈난 성모 마리아 대성당, 페루 람파의 라 피에다드 예배당, 호주 시드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등 모두 20여 곳에 이른다. 이중 포즈난에 있는 복제품은 1972년 원본이 훼손됐을 때 복원 작업에 참고용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발다키노

사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관람객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작품은 피에타가 아니라 발다키노다. 성당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면 앞을 가로막는 웅장한 청동 작품이다. 높이가 30m, 무게가 37t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청동 구조물이다. 일부 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엄청나게 큰 대성당과 그 안을 걷고 있는 조그마한 인간. 그 중간 크기인 발다키노는 인간과 신의 중재 역할을 상징한다.”

발다키노는 일종의 천개, 순 우리말로 닫집이다. 미사를 올리는 제단이나 교황의 옥좌, 또는 교황이 나들이를 갈 때 타고 다니는 마차 의자 부분이 비나 눈을 맞지 않고 먼지에 시달리지 않도록 위를 가려주는 지붕이다. 시보리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세 시대 로마 성당에서는 시보리움을 설치하는 게 일반적인 유행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를 만든 사람은 로렌조 베르니니다. 그는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프란세스코 보로미니, 아버지인 피에트로 베르니니, 형 루이기 베르니니 등 다른 건축가들의 도움을 조금씩 받아 발다키노를 제작했다.

베르니니에게 발다키노 제작을 의뢰한 사람은 교황 우르바노 8세였다. 베르니니가 빌라 보르게세를 지을 때 당시 추기경이었던 우르바노 8세는 베르니니를 아주 좋아하게 됐고 평생 후견인 역할을 했다. 교황이 베르니니를 좋아했던 것은 그의 예술성이 뛰어났던 이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예술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

우르바노 8세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55세에 교황이 됐다. 그는 로마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 정치적 기반이 약했다. 그는 교황으로서의 기반을 다지고 가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예술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베르니니는 우르바노 8세를 위해 발다키노를 다양하게 꾸몄다. 곳곳에 그를 위한 흔적을 남겼다. 기둥이 서 있는 받침대에는 그의 문양을 새겼다. 교황의 조카와 새로 태어난 아들 얼굴도 새겨 넣었다.

발다키노를 떠받치고 있는 ‘솔로몬의 기둥’은 우르바노 8세의 상징인 올리브 잎이 휘감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올리브 잎이 아니라 포도나무 잎이다. 당시에는 교회에 세우는 각종 조각물에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포도나무 잎을 새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베르니니는 포도나무 잎을 교묘하게 조작해서 올리브 잎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기둥에는 당시 유행이던 나비 대신 ‘바르베리니 벌’이라는 것을 새겼다. 당시 벌은 ‘성하’의 고귀함, 훌륭함을 상징하던 곤충이었다. 성하는 교황 같은 고위 종교 지도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베르니니는 솔로몬의 기둥 맨 꼭대기에는 ‘바르베리니의 태양’을 장식했다.

당초 발다키노를 만든 이유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있는 성 베드로 무덤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런 목적을 가진 발다키노에 우르바노 8세와 그의 집안인 바르베리니 가문의 여러 가지 흔적을 남긴 것은 ‘바르베리니-우르바노-발다키노-성 베드로’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 바르베리니 가문의 위대성을 고양시키려는 이유에서였다.

비록 우르바노 8세와 그 가문의 영광을 빛낼 필요성에서 출발한 작품이었다 하더라도 발다키노의 예술성은 부인할 수 없다. 당시 로마 성당의 시보리움은 흰색 대리석으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베르니니는 파격적인 디자인을 채택했다. 전체 구조는 교황이 행진할 때 이용하는 마차나 가마의 가리개에서 영감을 얻었다.

발다키노의 네 기둥은 꼬여 있다. 흔히 솔로몬의 기둥이라고 부르는 양식이다. 이 스타일을 로마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예수살렘의 솔로몬 사원에서 기둥 몇 개를 가져와 옛 성 베드로 성당에 기증했다. 하지만 이 기둥은 실제로는 그리스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베르니니가 솔로몬 기둥 양식을 택한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에 묶여 있었던 기둥이 바로 이런 양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발다키노의 기둥은 100%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기둥 속을 청동으로 채우지 않고 비워두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무거운 뚜껑을 지탱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자 빈 기둥 속을 콘크리트로 가득 채운 것이었다.

베드로의 의자

베르니니는 발다키노를 제작한 뒤에는 ‘베드로의 의자’를 만들었다. 역대 교황이 사용하던 의자였다. 중세에는 성 베드로가 사용한 의자라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875년 신성로마제국 샤를 2세 황제가 교황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라고 한다.

베드로의 의자는 교부 4명이 의자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의자 뒤쪽에서는 유리창을 통해 강렬한 햇빛이 들어오고 천사들이 노닐고 있다. 의자가 있는 반원형 부분에는 「마태복음」문구가 새겨져 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라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또 성 베드로 청동상이 있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만든 것이다. 성 베드로는 고대 로마 복장을 한 채 왼손에 열쇠를 들고 있다. 「마태복음」문구를 생각하게 하는 열쇠다.

수많은 순례자가 청동상 발에 입맞춤하고 손으로 만진데다 동상을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소문이 퍼져 관광객까지 그 행렬에 가세하는 바람에 오른쪽 발가락은 거의 다 닳아서 원형이 사라졌다. 왼쪽 발가락도 많이 닳은 상태다. 성 베드로의 축일인 6월 29일에는 이 청동상에 금실로 수놓은 제의를 입히고 미사를 집전한다.

교황의 탈출로

성 베드로 광장 오른쪽 열주 회랑 뒤편에는 성문이 있다. 성문을 지나기 이전은 바티칸시국 땅이고, 성문을 지나면 이탈리아 땅이다. 성문에는 긴 성벽이 연결돼 있다. 성벽 아래에는 차 두어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도로가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성벽 주변을 ‘외곽 지역’이라는 뜻인 보르고라고 불렀다.

겉모습은 평범하고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하는 성벽이지만, 실제로는 건립한 지 1천 년을 넘는 긴 역사를 가진 숨겨진 보물이다. 이 성벽은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산탄젤로 성을 연결하는 800m 길이의 비밀 통행로다. 더 정확히 설명하면 교황청에 위기상황이 발생했을 때 교황이 피난하는 통로다. 이름은 파세토 디 보르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단순히 파세토라고 부르기도 한다. 파세토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작은 통로’라는 뜻이다.

파세토의 역사는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스파냐를 점령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 본토로 진격해오던 이슬람군을 격파한 프랑스의 샤를마뉴 대제는 800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왕관은 교황 레오 3세(재임 795~816년)가 씌워주었다.

“성 베드로 성하의 무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새 성벽을 건설하시오.”

샤를마뉴 대제는 대관식을 마친 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킬 수 있는 새 성벽을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레오 3세는 그의 지시에 따라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산탄젤로 성을 연결하는 새로운 성벽 건설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16년 뒤 교황이 세상을 떠나자 성벽을 부수어 버렸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산탄젤로 성이 연결될 경우 산탄젤로 성이 새로운 권력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로마의 자치권은 크게 손상될 수밖에 없어.”

외적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성벽이 사라진 탓에 성 베드로 대성당은 830년과 846년 두 차례에 걸쳐 사라센 해적의 침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으로 둘러싸인 로마 시내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성로마제국 로타르 1세는 교황 레오 4세(재임 847~855년)에게 다시 성벽을 지으라고 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보호할 수 있는 성벽을 다시 건설하시오.”

공사를 서두른 덕분에 성벽은 850년께 완공됐다. 성벽의 길이는 3㎞에 이르렀고, 모두 44개의 감시탑이 세워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벽에 파세토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파세토를 처음 건설한 사람은 1277~1280년 교황으로 재임했던 니콜라오 3세였다. 그는 1277년 성벽 사이에 파세토를 추가했다. 교황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바티칸과 산탄젤로 성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면 외국 군대가 쳐들어올 경우 대피 통로로 삼을 수 있겠지.’

그로부터 200여 년 뒤인 1492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임 1492~1503년)는 파세토를 수리했다. 그는 직접 고친 파세토 덕분에 2년 뒤 목숨을 건지는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교황이 파세토를 통해 산탄젤로성으로 달아나는 사건은 역사상 두 차례 일어났다. 두 번 모두 기독교인 유럽의 군대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욕심이었다. 교황의 지나친 권력 욕심과, 교황을 누르고 세속 권력을 키우려는 유럽 지배자들의 욕심이 맞부딪힌 게 원인이었다.

첫 선례를 남긴 교황은 위에서 말한 알렉산데르 6세였다. 1493년 교황 자리에 오른 그는 교회와 평신도, 평범한 성직자보다는 가족, 측근을 먼저 생각했다. 그들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해 많은성직자와 로마인에게서 빈축을 샀다. 교황은 피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열일곱 살 아들 케사레 보르기아를 발렌시아 대주교로 서임했다. 다른 아들 지오바니 보르기아에게는 가문의 고향인 스페인 간디아의 공작 작위를 하사했다. 또 추기경 자리 열두 개를 새로 만들어 숨겨둔 연인의 오빠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에게 그 중 하나를 선물하기도 했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교회를 개혁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교황을 몰아내야 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자 나폴리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드 1세를 중심으로 하는 반대세력이 알렉산데르 6세와 마찰을 빚게 됐다. 페르디난드 1세는 교황에게 불만이 쌓여 있던 피렌체, 밀라노, 베니스를 끌어들여 반 교황 연합을 형성했다. 궁지에 몰린 교황은 프랑스의 샤를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지원군을 보내주면 나폴리 왕국을 프랑스 영토로 만들 수 있게 도와드리겠소이다. ”

샤를 8세는 프랑스 귀족에게 교황이 보낸 편지를 보여주면서 병력을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교황이 나폴리 왕국을 주기로 했소.”

귀족의 동의를 손쉽게 구한 샤를 8세는 교황에게 군대를 보내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쾌재를 부른 교황은 프랑스 군대가 로마를 지나갈 수 있게 비밀 허가를 내주었다. 그러면서 사정을 모르는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프랑스 군대는 나의 요청을 받아들여 오스만투르크로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로 가는 것이오.”

샤를 8세가 모은 프랑스 군의 총 병력은 2만 5천 명 규모였다. 엄청난 위세를 자랑하는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 인근까지 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교황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병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측근들도 교황에게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조언했다.

“샤를 8세는 나폴리 왕국 정복에 만족하지 않고 로마를 포함해 모든 이탈리아를 차지할 우려가 큽니다.”

다급해진 교황은 이번에는 거꾸로 나폴리 왕국에게 연합군을 꾸려 프랑스에 맞서라고 지시했다. 교황에게는 이런 명령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앞뒤를 재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는 단지 눈앞에 닥친 위기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교항이 반기를 들었다는소식은 곧바로 샤를 8세에게 전해졌다. 교황의 배신에 화가 난 그는 피렌체를 점령하자마자 바로 로마로 진격했다. 다급해진 교황은 여러 도시에 사절을 보내 군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얼마나 급했던지 이슬람교의 중심국가인 오스만투르크에도 도와달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샤를 8세의 프랑스 군대는 12월 로마에 입성했다. 교황 선거에 출마했다가 알렉산데르에 밀려 낙선한 델리 로베레 등 프랑스를 지지하는 추기경들도 그들을 따라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엉터리 교황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교황은 불안해졌다.

‘교황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샤를 8세가 나를 죽일 수도 있어.’

프랑스군이 로마에 입성하자마자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몰려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시내 곳곳에서는 시뻘건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교황은 황급히 파세토를 통해 몰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빠져나가 산탄젤로 성에 숨었다.

샤를 8세는 교황을 궁지로 몰아넣은 뒤 나폴리로 진격했다.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프랑스군은 나폴리 외곽의 몽 생 조반니 요새를 대포로 공격해 순식간에 허물어버리고 말았다. 나폴리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샤를 8세는 아주 손쉽게 나폴리에 입성해 나폴리 왕 자리에 올랐다.

역설적이게도 폐위 위기에 몰린 교황을 살린 것은 샤를 8세의 욕심이었다. 그가 로마를 점령하고 피렌체와 나폴리마저 정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여러나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됐다.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완전히 독식하게 될지도 몰라. ”

샤를 8세를 막는 일은 유럽 여러 나라의 공통 관심사가 됐다. 당시 이탈리아 최대 도시였던 베니스와 신성로마제국은 물론 같은 걱정을 하게 된 스페인이 함께 손을 잡고 연합군을 구성했다. 이들이 손을 잡으면서 대외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오스만투르크에 맞선다는 것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샤를 3세는 로마는 물론 나폴리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다. 덕분에 교황은 가까스로 자리를 부지함은 물론 구사일생으로 목숨까지 건질 수 있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엉뚱한 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일마다 사사건건 반대하는 여러 추기경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의 아들 케사레는 추기경들을 제거해 아버지를 도와주겠다며 독을 준비했다. 그런데 독을 넣은 물잔이 잘못 배달돼 엉뚱하게 알렉산데르 6세가 마시고 말았다. 그야말로 인과응보였던 셈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로마 시내 공기가 매우 나빠 교황은 물론 로마 시민들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해 교황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교황은 로마인들의 반대 때문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힐 수 없었다. 그의 유해는 고국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거기서도 떠돌아다닌 그는 몬세라트의 한 작은 교회에 겨우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파세토로 달아난 두 번째 교황은 1527년 클레멘스 7세(재임 1523~34년)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황제가 가장 큰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유럽 최고의 권력자가 되고 싶었던 교황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이간질을 하기로 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게 해야 나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어.’

교황은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끊임없이 거짓말을 했다. 그의 이간질은 큰 효과를 발휘했다.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는 교황의 말만 믿고 계속 전쟁을 벌였다. 이 때문에 유럽의 여러 지역이 황폐해졌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교황의 권력 욕심이 엄청난 부작용을 낳은 셈이다.

카를 5세는 뒤늦게야 교황의 교활한 책략을 깨달았다. 그는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의 군대를 괴멸시킨 뒤 스페인 주둔군을 곧바로 이탈리아로 보냈다. 독일에 있던 군대도 파견했다. 로마로 쳐들어간 황제 군대의 규모는 무려 3만 5천여 명에 이르렀다.

“교황에게 따끔한 교훈을 가르쳐주고 오시오.”

스페인에서 파견된 황제 군대는 부르봉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오랫동안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부르봉 장군이 그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겨우 막을 수 있었다. 사정은 독일에서 파견돼 온 증원군도 다르지 않았다. 카를 5세 황제와 부르봉 장군은 그들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로마 교황청을 약탈해서 전리품을 챙겨 넉넉하게 급여를 주겠다.”

교황의 입장에서는 설상가상격으로 독일에서 온 병사들은 클레멘스 7세를 극도로 싫어했다. 교황이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서 이간질을 일삼아 전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로마에 쳐들어가면 교황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교황 때문에 전 유럽이 긴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거야. 그 사람 때문에 우리는 전쟁에 끌려나와 목숨을 잃을 처지가 됐어. 고향에 남은 부모와 처자식은 굶주리게 된 거고.”

카를 5세의 군대가 분노에 사로잡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은 깜짝 놀랐다. 그는 서둘러 황제의 병사들에게 사절을 보내 이렇게 제안했다.

“로마 진군을 중단하고 돌아가면 금화 10만 듀캇을 주겠노라.”

하지만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병사들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그들은 교황의 제안을 무시하고 로마로 쳐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일부 병사는 교황이 보낸 사절의 멱살을 잡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교황이 주는 돈은 없어도 돼. 교황청을 약탈하면 그 이상을 벌 수 있거든.”

카를 5세의 군대는 1527년 5월 5일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밖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로마 일대에는 안개가 짙게 끼었다. 불과 2~3m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한 치 앞도 알 수 없게 된 로마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노래를 부르며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행군했다.

교황은 처음에는 달아날 생각이 없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대성당 한가운데에 의자를 놓고 앉아 쳐들어오는 황제의 병사들에게 호통을 칠 생각이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살인의 칼을 휘두르느냐?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한 죄로 너희를 모두 파문한다. 죽은 뒤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때 황제의 병사들이 성 베드로 대성당 인근 성 스프리토 병원에 몰려가 환자까지 죽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로마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은 물론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황제 군대와 맞서 싸우는 스위스 근위대의 대포 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지금 이곳은 현실의 세상입니다. 미친 병사들이 휘두르는 칼 앞에서는 아무리 종교라도 사람의 목숨을 구해줄 수 없습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교황은 유일하게 곁에 남아 있던 한 추기경의 권고를 받아들여 결국 파세토를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쳤다. 당시 기록은 달아나는 교황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클레멘스 7세 교황은 불타오르는 로마의 잔혹한 풍경을 보고, 또 연이어 터져나오는 비명을 들으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쏟았다.’

교황이 달아날 동안 스위스 근위대는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 앞에서 카를 5세의 병사들을 맞아 끝까지 싸웠다. 그들 중 단 한 명도 목숨을 건지려고 달아나지 않았다. 근위병 1천527명 중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42명에 불과했다. 교황청은 이들의 충성과 용기를 기념하는 뜻에서 이후 새 스위스 근위대 선발 시험을 매년 5월 6일에 실시하고 있다.

카를 5세의 병사들 중에는 개신교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가톨릭이었다. 이런 병사들이 분노와 욕심에 눈이 멀어 성 베드로 대성당뿐만 아니라 로마를 약탈하고 불태운 것이다. 이들은 추기경이나 사제들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 귀족이든 아니든 여자들은 모두 성폭행했다.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410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 450년 겐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은 물론 여러 차례 다른 야만족도 로마를 침략했다. 하지만 카를 5세의 군대는 어느 야만족보다도 끔찍하게 로마를 약탈했다.’

로마 주민들이 살해당하고, 여자들이 군인들의 노리개가 되고, 교회와 궁전이 약탈당해도 교황은 산탄젤로 성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안전만 챙길 수 있었을 뿐 신도들을 구할 수 있는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성 안에 갇힌 죄수 같은 신세였다.

로마가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베네치아, 피렌체에서 군대를 보냈다. 우르비노 공작이 긴급히 새로 모집한 스위스 근위대도 로마를 구하러 달려왔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카를 5세의 대군에 맞설 수 없었다. 게다가 우르비노 공작은 교황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사실 교황이 아니라 로마를 구하러 달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교황이 산탄젤로 성에 틀어박혀 목숨만 챙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터져나오는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 우르비노 공작은 군대를 돌려 그냥 돌아가고 말았다.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교황의 목숨과 로마의 운명도 하나님이 결정하시겠지.’

카를 5세의 군대가 쳐들어가기 전에 5만여 명이었던 로마 인구는 불과 수개 월 사이에 1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대다수는 목숨을 구하려고 로마에서 먼 곳으로 달아났지만 살해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고 지옥이 따로 없었다.

교황은 일곱 달 동안이나 산탄젤로 성에 닫혀 있었다. 그는 나중에는 행상으로 변장해 시종 두어 명만 거느리고 산탄젤로 성을 빠져 나가 오르비에토로 달아났다. 로마를 점령한 황제군은 아홉 달 동안 머무르며 행패를 부렸다. 하지만 시체가 썩어 부패한 탓에 시내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로마를 떠나야 했다.

클레멘스 7세는 1534년 56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다. 로마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많은 사람이 교황청으로 몰려가 정말 교황이 죽었는지를 확인했다. 사람들은 밤이 되면 교황의 묘를 습격했다. 한번은 교황의 묘가 완전히 파헤쳐졌고, 그의 시신에 칼이 꽂히기도 했다.

교황의 조카였지만 로마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추기경 이폴리토 데 메디치가 자제를 호소하지 않았다면 그의 시신은 갈고리에 꿰인 채 로마 시내로 끌려 다닐 형편이었다. 고대 로마 시대처럼 테베레 강에 버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매일 밤 무장한 군인들이 그의 묘를 지켜야 했다.

클레멘스 7세가 파세토를 통해 달아나는 일이 벌어진 이후 파세토의 문은 굳게 닫혀 버렸다. 아무도 파세토를 재건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상태는 매우 나빠지게 됐다. 파세토가 다시 깔끔해진 것은 지난 2000년 교황이 새 천년 시작을 축하하면서 보수, 수리를 지시한 덕분이었다.

파세토는 평소에는 문을 닫고 대중 접근을 막는다. 다만 여름철 일정기간에만 소수의 그룹 투어 신청자에게 부분적으로 탐사를 허용한다. 파세토 열쇠는 스위스 근위대가 보관한다. 만일의 경우가 다시 발생해 교황이 또 대피해야 할 경우 스위스 근위대가 문을 열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바티칸의 포르타 산타나에서 시작한 파세토는 골목길을 따라 이어진다. 골목길은 라르고 델 콜로나토 즉 콜로나토 광장과 코리도리 거리, 보르고 안젤로 거리로 이어진다. 파세토는 보르고 안젤로 거리 끝에 있는 피아자 피아 즉 피아 광장을 건너 작은 숲을 지난 뒤 산탄젤로로 들어간다. 종점은 산탄젤로 정면이 아니라 왼쪽 뒷부분이다.

파세토는 성벽 사이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에는 다소 좁다. 지붕을 덮어씌운 탓에 밖에서는 파세토 안을 보기 힘들다. 하지만 안에서는 곳곳에 만들어진 틈을 통해 테베레 강은 물론 도로로 달리는 차와 인도로 걷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이야기를 시작할 때 꺼냈던 오벨리스크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자.

오벨리스크 꼭대기에는 금으로 도금한 공이 하나 달려 있었다. 중세시대 이래 그 공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해가 들어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칼리굴라가 전차경기장에 오벨리스크를 세운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무덤으로 쓰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스크는 중세 시대에는 ‘카이사르의 바늘’이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다.

오벨리스크를 광장 한가운데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했던 도메니코 폰타나라는 사내가 공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공은 지금은 캄피돌리오 광장의 콘세르바토리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공이 달려 있던 꼭대기에는 대신 십자가가 설치됐다. 그러자 이런 소문이 나돌았다.

“공 안에 예수의 유해가 들어 있다는군요.”

성 베드로 대성당 — Google Arts & Culture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티칸 시국 남동쪽에 있는 대성당을 말한다. 바티칸 대성당이라고도 부른다. 성지 가운데 하나이자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거대한 교회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개신교를 제외한 기독교의 전승 에 따르면, 서기 67년에 순교한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로마의 초대 주교, 즉 교황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로마의 수많은 교회 가운데 가장 유명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으뜸 교회는 아니다. 로마 교구의 대성당의 명예를 지닌 교회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성 베드로의 시신이 대성당의 제대 아래에 묻혀 있는 까닭에 옛날부터 교황이 선종하면 그 시신을 제대 아래에 안치해오고 있다. 대성당은 4세기 이래 이 장소에 있었다. 대성당의 건설은 1506년 4월 18일에 시작되어 1626년에 완료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 종교성과 역사성, 예술성 때문에 세계적인 순례 장소로 유명하다. 르네상스부터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계의 거장들이 주임 건축가 직책을 계승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건축 작품으로서 당대의 가장 거대한 건물로 여겨진다. 로마의 모든 초창기 성당들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 역시 입구가 동쪽에 있으며 후진은 서쪽 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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