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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의 역사 – 라디오를 발명 한 사람 – 뉴스 – FMUSER FM / TV 방송 원 스톱 공급 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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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라디오의 역사 – 라디오를 발명 한 사람 – 뉴스 – FMUSER FM / TV 방송 원 스톱 공급 업체 라디오의 뿌리는 초기 1800s으로 추적. 한스 Ørsted, 덴마크의 물리학 자, 1819에, 자기 에너지와 직류 사이의 상대성 이론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 이론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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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Radio)의 역사 – 오디오와 컴퓨터 – 오디오와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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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라디오(Radio)의 역사 – 오디오와 컴퓨터 – 오디오와 컴퓨터 1895~1896년에 G.마르코니가 무선통신법을 발명한 이후 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꾸는 마이크로폰 개발에 따라 전파방송의 가능성이 열렸으며, 1906년 미국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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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Radio)의 역사 – 오디오와 컴퓨터 – 오디오와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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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óµð¿ÀÀÇ ¿ª»ç¡¦ 1896³â ¹«¼± Åë½Å ¼º°øÀ¸·Î ½ÃÀÛ – 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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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óµð¿ÀÀÇ ¿ª»ç¡¦ 1896³â ¹«¼± Åë½Å ¼º°øÀ¸·Î ½ÃÀÛ – munhwa.com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는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에서 1959년 11월 15일 생산한 진공관식 라디오(모델 A-501)로 당시 가격은 쌀 50가마니에 해당하는 2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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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라디오의 모습.
라디오(radio, 문화어: 라지오)는 전파의 변조를 통해서 신호를 전달하는 기술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주로 라디오는 소리 신호를 수신하는 기계나, 관련 기술을 가리킬 때가 많다. 기술적으로는, 변조 방식에 따라 AM, FM으로 나뉘며, 중파, 단파, 초단파 등을 사용한다.
개요 [ 편집 ]
라디오 방송을 송출하는 전용 관제탑 (스웨덴)
대화와 음악 등의 음성 신호를 전파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방송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지만, 가장 역사가 긴 것은 진폭 변조에 의한 중파 방송의 기본적인 방식은 100년 동안 변하지 않고 있으며 지금도 라디오 주류이다. 이 방식 및 수신기는 일반적으로 “AM 방송” 혹은 “AM 라디오”라고 불린다. 또한 주파수 변조에 의한 초단파 라디오 방송 역시 널리 청취되고 “FM 방송”, “FM 라디오”라고 불린다.
TV와 달리 전송 시스템은 비교적 간단한 구조로, 만일 재해로 방송국이 파괴 되더라도, 어깨에 멜 정도 크기의 소형 송신기에서 방송도 가능하고, 이것을 활용하여 재해 발생시 임시 방송국을 개설할 수 있다.
역사 [ 편집 ]
라디오의 역사는 우선 무선통신 기술의 발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8년 헤르츠가 처음으로 전자기파를 발견하고, 이를 기초로 하여 마르코니가 1897년 모스 부호를 이용하여 무선 전신을 발명하여 장거리 무선통신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 때 사용된 전신기는 전압을 높이는 유도 코일과 불꽃 방전기 등을 이용한 것이었으므로 단절적인 신호전송이라는 한계점이 있었다.
무선 전신의 실현된 이후 사람들은 전신을 통한 메시지의 암호화-해독화를 거치지 않고 음성을 직접 전달 하면 어떨까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음성은 매우 복잡한 전자기파의 변동으로 이뤄지는 것이므로 이것을 공기가 아닌 전류를 통해 전달 할 수 있는 변조장치를 개발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1876년 벨이 유선방식에 의한 음성 통신 장치인 전화를 발명하고, 1878년 에디슨이 음성을 기록하는 장치인 축음기를 만듦으로써 무선 방식에 의한 인간 음성의 전달도 그 실현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1년 캐나다의 레지날드 페든슨(1866~1932년)이 최초로 전파에 음성을 전달하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마이크를 통해 소리를 전기 신호로 바꾼 뒤 연속적인 전파와 결합시키는 방법이었다. 그 해 12월 23일 메릴랜드주 콥 아일랜드에 위치한 자신의 기지국에서 최초의 무선 음성 송신을 진행하였다. 당시의 내용은 상대편에게 눈이 오고 있다면 전보를 쳐서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후 마르코니가 1904년 파장조정기 특허를 얻어내면서 수신자들이 직접 원하는 주파수를 조정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1906년에는 미국의 디포리스트가 전류의 증폭을 가능하게한 3극 진공관을 발명하였다. 이로서 음성을 전달하는 라디오 방송이 가능해지게 되면서 1906년 12월 24일에 페든슨이 진폭 변조를 이용한 최초의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였다.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 군의 브렌트 락 지역으로부터 수 마일 떨어진 대서양의 선박을 대상으로 자신의 목소리와 녹음된 음악을 전송하였다.[1]
1909년 파리 에펠탑에서 유럽 최초로 음성 송신을 하였고, 이듬해인 1910년에는 카루소의 노래를 방송하였으며, 1911년 뉴욕의 선거결과를 방송하였다. 이후에 미국에서는 새너제이의 KQW, 디트로이트의 WWJ, 피츠버그의 KDKA를 비롯한 여러 실험방송이 계속되었다.
1912년 미국 의회는 라디오 법안을 입법하여 정부의 승인 없는 전파 사용을 금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은 미국 해군이 방송을 독점하도록 하였다.[2]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방송의 성격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격론이 벌어진 결과, 유럽에서는 방송을 공공 서비스로 취급하여 국가 독점의 방송사 설립을 추진한 한편, 미국에서는 개연 영리 사업 대상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0년 1월 미국 워싱턴 D.C. 근교의 아나코스티아 해군비행장의 군악대 연주가 방송되었고, 같은 해 11월 2일에는 웨스팅하우스사에서 피츠버그에 세워진 KDKA가 100W 출력을 통해 세계 최초의 정규 라디오 방송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KDKA에서 그 해 실시된 제29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방송하였다. 1922년에는 뉴욕에서 광고방송을 하는 최초의 상업 방송인 WEAF(이후 WNBC (AM)를 거쳐 현재의 WFAN이 됨)가 개국되었다.
유럽의 경우 영국에서는 1920년 마르코니 무선회사에서 실험방송을 행하고 1922년 BBC의 첫 뉴스 프로그램 방송을 시작하였다. 이후 1921년에 프랑스의 국영방송이 개국되었고, 독일에서도 1923년에 개국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라디오 방송은 진폭 변조(AM)로 송출되었으나 1933년 암스트롱(영어: Edwin Howard Armstrong, 1890년 12월 18일 – 1954년 1월 31일)이 주파수 변조(FM)를 이용한 라디오 방송 송출 기술을 발명하여 특허를 취득하였다.[3] 암스트롱은 1935년 11월 「주파수 변조 시스템으로 라디오 신호의 간섭 현상을 줄이는 방법」이라는 논문을 무선기술사협회에 제출하였으며, 그로부터 2년 후 최초의 FM 라디오 방송국인 W1XOJ(현 WAAF)을 설립해 방송을 시작하였다.[1]
1990년대까지만 해도 라디오 방송은 AM, FM을 통한 아날로그 방송이었으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DAB, DRM, IBOC의 디지털 라디오 방송이 실시되기 시작하였고,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기존 라디오 방송국들이 인터넷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스마트폰 등에서는 팟캐스트라는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로만 송출하는 음성 방송이 등장하였고, 실시간 방송도 데이터 통신망을 이용하여 인터넷 방송을 들을 수 있는 관련 애플리케이션도 나오고 있다.
1950~1960년대까지만 해도 방송의 중심은 라디오였으나 1970년대 이후 텔레비전에 밀리기 시작하고, 1990년대 이후 인터넷의 등장으로 그 위상이 크게 줄면서 AM, FM 라디오 송출국의 수를 줄이거나 방송국을 폐국시키는 경우도 있다.(이중에서 특히 단파 방송이 상당수 송신소를 폐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대규모 재난시의 비상 방송 같은 분야에서 아직까지 라디오는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라디오 방송 [ 편집 ]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시기인 1915년경에 한국 최초의 무선전화 송수신 시험이 경성우편국(현 중앙우체국)과 조선총독부 체신국(현 세종로 광화문우체국) 건물과의 직선거리 약 800m 사이에서 실시되었다. 이후 최초의 정규 라디오 방송은 1927년 2월 16일 조선총독부에 의해 설립된 사단법인 경성방송국(호출부호:JODK)이 주파수 690 kHz, 출력 1kW로 방송을 시작하였다.[4] 방송 초기에는 일본어 방송을 중심으로 약간의 한국어 방송이 있었다. 1933년 4월 26일 한국어 방송이 별도로 방송을 시작하였고, 이후 각 지역별로 라디오 방송국이 개국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1947년 1월 2일, 국제무선통신회의에서 HL라는 호출부호를 할당받으면서 JODK는 HLKA(현 KBS 1라디오)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국내 최초의 민간 방송인 CBS기독교방송, 1954년 12월 15일에 개국하였고, 부산에서 최초의 상업 방송인 문화방송(MBC)이 1961년 12월에 개국하였다. 그리고 국내 최초의 FM 방송인 서울FM방송국(현 KBS 쿨FM)은 1965년 6월에 개국하였다. 그리고 미국, 일본식의 민방 중심의 방송으로 이어지다가 1980년 12월 언론통폐합에 의해 수많은 민방들이 공영 방송에 흡수되면서 유럽식의 공영화 형태로 전환되었다.
1990년대 이후 민영 방송국이 부활하였고 교통방송, 평화방송, BBS불교방송 등의 특수 방송국이 개국하였다. 2000년대에는 인터넷의 보급으로 많은 라디오 방송국들을 인터넷으로 들을 수 있게 되었고, 2005년 12월 1일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을 실시하여 라디오의 디지털화를 꾀하고 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스마트폰의 보급률이 늘어남에 따라 라디오 어플을 통해 스마트폰으로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
작동 원리 [ 편집 ]
라디오 방송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는 음성을 마이크로폰을 통하여 전류로 바꾼 후 이를 전파나 통신 케이블을 통해 송신 한 후 수신기에서 받아들여 본래의 음성으로 바뀌어 들을 수 있게 한다. 본 문단에서는 AM/FM 라디오 방송을 기준으로 설명한다.
송신 [ 편집 ]
AM/FM 라디오 방송의 작동 원리 (영어)
라디오 방송국에서 목소리와 음악 등의 소리(original sound)를 마이크로폰(microphone)을 통하여 음성 전류로 바꾼다. 이 음성 전류를 송신기(Encoder)에 보내어지면, 송신기에서 음성 전류를 전파로 바꾸어 송신하기 위해 변조(modulation)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변조 과정은 먼저 발진기에서 수십 kHz~수백 MHz의 일정한 주파수를 가진 고주파 전류를 만들어내는데, 이 고주파 전류를 반송파라고 한다. 이 반송파를 음성 전류와 함께 변조기로 보낸 후 결합하는 과정, 즉 변조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음성 전류는 수십 kHz의 저주파이기 때문에 전파를 통해 전송하기 적합하지 않다. 이 반송파를 통하여 변조를 하여 음성 전류를 멀리 전송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렇게 변조된 신호를 송신 안테나(Transmitting antenna)에 보내어 전파를 내보내게 된다.
수신 [ 편집 ]
송신 안테나를 통해 내보내진 전파는 수신기(Receiver)의 수신 안테나(Receiveing antenna)가 잡으며, 이 수신 안테나를 통해서 앞서 변조된 신호가 흐른다.
수신 안테나에서 수신된 전파는 여러 방송국에서 보내온 전파를 모두 잡기 때문에 원하는 방송국의 주파수를 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원하는 방송국의 주파수만을 잡는 과정을 동조(Tuning)라고 하고, 원하는 주파수를 잡는 장치를 동조기(튜너, Tuner)라고 부른다. 동조 과정을 거친 신호는 증폭기를 통해 신호를 강하게 만든다.
이후 검파기(Decoder)에서 신호의 반송파를 제거하고 음성 전류만을 골라내는 검파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렇게 남은 음성 전류가 스피커를 통해 원래의 소리가 나게 된다.
수신방식 [ 편집 ]
AM 라디오 [ 편집 ]
스트레이트 방식
수신기 구성의 일종으로, 수신한 전파의 주파수는 바꾸지 않고 그대로 고주파 증폭하든가, 즉시 검파기에 넣어서 원래의 신호파를 꺼내는 방식의 수신기. 수퍼헤테로다인 수신기에 비하면 감도, 인접 주파수 선택도가 나쁘지만 구성이 간단하고 조정도 초월적이다.
슈퍼 헤테로다인 방식
슈퍼헤테로다인 수신기는 안정되고 선택도가 좋다. 비교적 간단한 구조기로는 국부발진기와 입력동조회로(入力同調回路)를 연동(連動)으로 하면 간단히 수신주파수를 바꿀 수 있으므로, 수신입력을 직접 주파수변환기에 넣고 있으나 잡음이 많고 또 스퓨리어스감도가 생기므로, 통신용 수신기에는 주파수변환기 앞에 고주파증폭기를 놓는 경우가 적다. 주파수변환을 3회 수행한 것을 3중(트리플)슈퍼헤테로다인이라 한다.
리플렉스 방식
라디오 수신에서 수신된 전파가 동조 회로를 거쳐 고주파 증폭 회로에서 증폭되는데 이것을 다시 증폭시킬 때,트랜지스터 1개(1석)로 증폭을 하기 때문에 1석으로 2석의 증폭 효과를 갖게 하는 우수한 회로 방식을 리플렉스 방식이라 한다.
FM 라디오 [ 편집 ]
형식 [ 편집 ]
변조 방식에 따른 분류 [ 편집 ]
전파에 음향 정보를 실어 보내기 위해서는 저주파의 음향 신호를 고주파의 전파로 변조(modulation) 할 필요가 있다. 변조 방식의 차이에 따라 몇 가지 라디오 방송 방식이 존재한다.
아날로그 방식 [ 편집 ]
진폭 변조 (AM) : 주로 장파, 중파와 단파 라디오 방송에서 사용된다.
주파수 변조 (FM) : 주로 초단파 이상의 주파수에서 사용된다. 주파수 변조는 진폭 변조에 비해 점유 주파수 대역 폭이 넓은 것이 그 특징의 하나이다.
디지털 방식 [ 편집 ]
위성(BS/CS 등) 디지털 오디오 방송 : 대한민국에서는 스카이라이프 위성방송을 통한 전용 오디오 방송이 실시되고 있다.
지상파 디지털 오디오 방송 (지상파 디지털 라디오) :
영국에서는 1995년 시험방송을 시작하여 2015년에는 라디오의 전면 디지털 전환(지역단위 소규모 FM방송을 제외한 전국 단위 주요 FM방송 송출 중단)이 계획되어 있다. 또한 UHF 디지털 지상파 TV인 프리뷰(Freeview)를 통한 라디오 방송 송출도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 국외에서는 이미 본 방송이 시작되었고, 일본에서도 2003년 10월 10일, 도쿄 오사카에서 실용화 시험 방송을 시작했다. 대한민국에서는 DMB의 V-Radio(Visual Radio)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와 별개의 디지털 라디오 방송 및 전면 전환은 아직 확실하게 계획되지 않았다.
기타 : 영국에서는 지상파 아날로그 텔레비전 방송에 스테레오 음성부에 한해 NICAM이라는 오래된 형태의 디지털 오디오 방송을 채용하고 있는데, 전면 디지털 전환과 함께 폐지.
주파수에 따른 분류 [ 편집 ]
또한, 방송에 이용되는 전파의 주파수의 차이에 따라 분류하는 수도 있다.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중파 방송, 단파 방송, 초단파 방송의 3 종류의 방송이, 유럽과 러시아, 마그레브 국가들은 이것 이외에 파장을 가진 장파 방송이 행해지고 있다.
또한 극초단파 이상을 가진 라디오 방송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행해지고 있지 않는데, 이는 전파의 특성상 부적절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단,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 전파를 실어서 디지털 라디오 방송을 송출하는 경우는 있으나, 주 주파수로 활용하는 경우는 없고 거의 모두 보조 주파수로 활용하는 경우이다.
장파 방송 (LF, LW) – 고위도 (북위 60도 이상) 지역의 대한민국 라디오 방송에서 사용. AM 변조. 주파수 대역은 148.5~283.5KHz
중파 방송 (MF, MW) – 대한민국 라디오 방송 역시, 이웃 나라를 위한 국제 방송에서 사용. 소위 AM 방송. AM 변조. 주파수 대역은 535~1605KHz
단파 방송 (HF, SW) – 국제 방송과 광역 대한민국 내 라디오 방송에서 사용. AM 변조. 주파수 대역은 3000~30000KHz.
초단파 방송 (VHF) – 대한민국 내 및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 사용. FM 변조. 주파수 대역은 (일본: 76~94.9) 국제:88.1~107.9 MHz.
라디오 방송에서는 크게 진폭 변조(AM)와 주파수 변조(FM)를 사용하며, 그 주파수 대역은 다음과 같다.
진폭 변조: 중파(MW) 535~1605KHz, 단파(SW), 3000~30000KHz
주파수 변조: 초단파 87.5부터 108까지 (FM 라디오 주파수는 최대 30개까지 가능)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가 나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상을 바꾼 발명품 1001》. 마로니에북스. 2010년 1월 20일. ↑ 강인규, 뉴미디어인가 올드미디어인가 , 오마이뉴스, 2009-7-31 ↑ 존 라이트, 박상은 역,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교양 7. 역사인물, 이지북, 2006, 213쪽 ↑ 조양욱, 일본 지식 채널, 예담, 2008, 314쪽
외부 링크 [ 편집 ]
본래는 넓은 의미에서의 무선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이것이 변천되어 근래에는 전파에 의한 음성방송과 이를 수신하는 기계, 즉 수신기를 가리키게 되었다.
1895년 이탈리아의 마르코니(Marconi,M.G.)가 무선통신기를 발명함으로써 라디오가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 뒤 1906년에 미국인 드 포리스트(de Forest,L.)가 삼극진공관을 발명하게 된 것을 계기로 무선통신기술은 급진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방송과 더불어 수신기의 보급이 늘어났고, 이로 인하여 진공관을 포함한 통신공업의 성장이 촉진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처음으로 방송전파가 발사된 것은 1920년 1월 미국 워싱턴의 아나고스티아 해군비행장으로부터의 군악대 연주방송이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문화사업은 아시아에도 곧 파급되어, 1925년 3월 22일에 일본의 동경방송국이 개국되었고, 이어 우리 나라에서도 1925년 11월 총독부 체신부 구내에 설치한 무선방송실험실에서 출력 50W로 최초의 무선실험방송이 실시되었다.
1926년 11월 31일에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이 설립되어 이듬해인 1927년 2월 16일 출력 1㎾, 주파수 870kHz로 첫 라디오방송을 개시하였다. 초창기의 라디오방송은 단일 채널을 통한 한국·일본 양국어의 혼합단일방송으로 그나마 한국어와 일어방송 시간비율은 1:3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뒤 시간비율은 몇 차례의 변화를 겪었다.
방송내용은 주로 일본어방송인 경제시황보도와 한국어방송의 물가시세·일기예보·공지사항 등이었다. 이 당시의 수신기보급상황을 보면, 우선 개국한 1주일 후인 1927년 2월 22일 현재 등록된 라디오수는 총 1,440대이고, 이 중 일본인이 1,165대, 우리 나라 사람이 275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1) 광복 이전의 상황
방송초창기부터 무선기기 제작공업 부문의 기술적 지식이 전무하였던 당시의 우리 나라로서는 라디오수신기의 제작이란 꿈도 꾸기 어려웠다.
이 무렵에는 고작 광석검파수신기가 제작되었을 뿐이지만 이 신비한 광석검파수신기조차 그다지 흔하지 않았다. 방송이 개시된 얼마 뒤에야 시중에 몇 대 퍼져서 수신기를 귀에 대고 혼자서 즐기곤 하였다.
특히 나팔(확성기)이 사용되는 수신기는 고급수신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극히 드물었다. 당시 수신기는 감도조절이나 음량조절을 위하여 공중선선륜과 동조선륜을 원접(遠接)하여 이동하면서 적당한 감도점을 찾아내어야 하였는데, 황철검파기를 사용한 수신기는 감도점을 찾기가 불편해 잘 이용되지 않고 전지식 광석수신기가 감도의 양호성 때문에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전지식 진공관수신기는 외국제품으로서 나팔을 울릴 수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은 여행용가방 정도의 크기(길이 60㎝, 높이 25㎝, 너비 30∼35㎝)이며 무게가 육중하였다.
그런데 당시 수신기의 소리를 내게 하기 위해서는 공중선결합장치동조·고주파동조조절회로·검파회로동조 등과 음량조정까지 합하여 최소한 4개 소는 만져야 하였으며, 이 중 1개소만 조정이 변동되어도 수신감도는 저하되는 등 그 조정이 매우 불편하였다. 또한, 이 때의 라디오수신기 한 대의 가격은 수십 원에서 수백 원까지 하여 당시 쌀 1가마 가격이 4원인 것과 비교해볼 때 매우 큰 액수였으며, 이 수신기를 유지하는 데 드는 전지소모량 또한 막대하여 일반대중용으로 보급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여기에 한국어와 일본어인 양국어혼용 단일방송으로 인하여 처음부터 청취자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수신기 보급은 극히 부진하였다. 1929년 말에 간신히 1만 대를 넘어섰고, 1932년말에는 고작 2만562대에 머물렀다. 따라서 경성방송국(JODK)은 유일한 재원인 청취료수입이 미미하여 심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경성방송국은 수신기 보급을 위한 근본적인 타개책을 강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중방송실시(한국어방송과 일본어방송)와 전국 방송망 확충계획이 추진되었다.
이중방송실시 이후 방송시간도 1일 16시간으로 늘어났으며 수신기보급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1933년 말에 3만2000여 대에서 1936년에는 7만3000여 대, 또한 1937년 말에는 11만2000여 대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기술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라디오수신기의 전원은 대형전지에서 가정용교류전원으로 대체되고, 1938년에는 전지식 진공관수신기는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 수신기도 가정의 장식물과 같은 구실을 할 정도로 외형이 변해갔다.
또한,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진공관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고성능화·소형화되었다. 그리하여 수신기도 소형화되어 전쟁이 끝나자 다시 전지를 사용하는 휴대용라디오가 등장하게 되었다.
광복 당시 방송협회에서 판매보급하는 수신기로는 교류전용인 보급형 1호 수신기(3구, UY56, UX12A, KX12F)와 보급형 2호 및 3호 수신기가 있었다. 보급형 2호는 제1호에 UZ·57관을 하나 더 쓴 4구라디오로서 중거리용으로 쓰이는 것이고, 보급형 3호는 여기에 UZ·58관을 더 부가해서 제작한 것으로서 원거리용으로 보급되었다. 이 밖에도 방송협회의 보급형도 지정품도 아닌 여러 가지 수신기가 시판되기는 하였으나 그리 많지 않았으며 광복 당시 재고도 거의 없었다.
일제강점 말기에 이르러서는 『동아일보』·『조선일보』 양민족지의 강제폐간으로 인해 세상소식을 오직 방송에만 의존하였던 때이므로 역설적으로 수신기의 보급은 큰 증가를 보였다. 1945년 8월 15일 현재 38선 이남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이 소유한 수신기는 15만1817대였고, 이북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이 소유한 수신기는 모두 7만6168대로 우리 나라 사람이 가진 수신기는 22만7985대였다. 한편 방송국도 확대되어 1945년에는 전국에 방송국이 17개 소, 그리고 방송소가 3개 소에 이르렀다.
(2) 광복 이후의 상황
광복 당시의 경성중앙방송국은 국민생활에 직결되는 프로그램 편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과학적 자료가 없었다. 더욱이 중앙방송국이 미군정청의 감독을 받게 되면서, 우리의 방송은 미국의 상업방송적인 유형을 그대로 도입하게 되었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북한으로부터 전기 공급이 중단되어 전기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방송청취가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지방방송국은 방송을 중단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 무렵 수신기의 보수용 진공관·저항 및 콘덴서 등이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진공관 하나만 못 쓰게 되어도 수신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수신기 진공관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방송협회는 월간 5000개의 진공관을 재생할 수 있었던 재생공장에 역점을 두고 일본 와타(和田)진공관제작소와 기술제휴를 하여 재생공정을 그대로 도입하는 등 생산설비체제를 갖추는 데 힘썼다.
이어 조선전기산업주식회사와 범아전자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되어 미군용건전지를 개조하여 라디오수신기에 맞도록 재조립하였으며, 라디오수신기 부품을 도입하여 수신기수리와 진공관재생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라디오 보급현황을 보면, 1947년 8월에 집계된 수신기는 18만5700여 대로서, 서울과 경기지역에 68%, 주요 도시에 27% 등으로 지역적 편중성이 매우 심하였다. 이 중 진공관이 없어 사장된 라디오수신기도 약 5만 대로 추산되는데, 방송협회는 군정의 연합사령부를 통하여 약 2만 대를 보수할 수 있는 물자를 미국과 일본에서 조달하기도 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이전에는 안정도와 감도가 나쁜 스트레이트식(straight式)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세계대전중의 군사통신기술발전에 힘입어 1950년대부터는 안정도와 감도가 뛰어난 슈퍼헤테로다인식(Super·heterodyne式)으로 모든 수신기가 바뀌었다. 한편 정부수립 당시부터 해외교포·선교사 및 미군전용 PX 등을 통해서 각종 라디오수신기가 많이 유입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미국제품이었으며, 그 종류로는 대체로 직류전용·교류전용 및 교류직류 양용 라디오 등 세 가지 유형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교류직류 양용 라디오가 전압이 낮고 정전이 심했던 당시에는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이어 중파용뿐만 아니라 단파대까지 2밴드용 라디오수신기가 많이 나돌게 되었다.
6·25전쟁 직전인 1950년 초부터는 신형진공관인 소형진공관을 쓴 수신기가 들어왔으며, 또한 중파와 FM을 겸한 라디오수신기도 서울의 해외공관 등에 모습을 나타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라디오방송은 시설확장 및 방송망구축 등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가면서 발전기반을 다져나갔다. 또한, 이 때부터는 민간방송 및 상업방송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1954년 12월에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CBS)이 출력 5㎾, 주파수 700kHz로 개국하였고, 1961년 12월에는 문화방송(MBC)이 5㎾, 900kHz로, 또 동아방송(DBS)이 1963년 4월에 10㎾, 1,230kHz(나중에 792kHz로 변경)로 개국하였다. 1964년 5월 20㎾, 1,380kHz로 개국한 라디오서울이 같은 해 6월에 주파수를 640kHz로 바꾸고, 1966년 동양방송(TBC)으로 개칭하였다.
FM방송은 서울 FM방송국이 1965년 6월 1㎾, 89. 1MHz로 개국한 것이 시초이며, 그 뒤 문화FM·한국FM 등의 민간FM방송도 개국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라디오방송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한편, 이와 더불어 국내에서도 1957년에 삼양전기, 1958년에 금성사가 최초의 라디오생산업체로 등장하여 수신기부품을 수입하여 라디오생산을 시작하였다. 이처럼 방송의 활성화와 국산품제조에 따른 수신기의 가격하락에 힘입어 1960년대 이후 수신기보급율은 급격히 증대하였다. 1959년에 겨우 30만 대를 넘어섰던 보유대수는 1960년에는 42만여 대로 늘었고, 1961년 9월에는 89만3000대, 1961년 말에는 100만 여대를 돌파하게 되었다.
이 무렵 금성사는 진공관식 수신기의 제작에 이어 트랜지스터라디오수신기 생산에 착수하였으며, 1962년에는 처음으로 라디오를 홍콩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한편,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는 특정외래품의 판매금지조처를 단행하고 ‘농촌라디오보내기운동’ 등을 전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국산품의 판로가 더욱 증대되었다. 게다가 1963년 이후에는 전해콘덴서·MP콘덴서·가변콘덴서·스피커 등의 부품이 국산화됨에 따라 국내의 라디오생산은 점차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966년을 전후하여 이 수신기의 생산이 급격히 증가하여 심한 경쟁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원자재의 국산화비율은 수출용과 내수용을 합하여 1967년에는 27.5%였으나, 1968년도부터는 크게 개선되어 57.5%로 증가되었고, 1970년에는 70%로, 다시 1971년에는 90%를 초과할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한편, 1966년 동양방송의 FM방송을 계기로 해서 1966년 금성사는 일본의 히타치(日立)와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1967년부터 FM수신기 생산에 착수하였다.
또한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진공관식은 자취를 감추고, 트랜지스터라디오만을 생산하게 되었다. 1973년에는 AM과 FM의 2밴드 및 시계가 부착된 탁상용 라디오수신기를 생산하여 1974년부터는 대량으로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 세계 라디오수신기 시장에 대한 미국의 EIA(Electronics Industries Association) 추정은 22억6000달러인데, 우리 나라의 생산실적은 2.7%에 불과하였다.
선진국에서 수신기생산을 기술집약화하는 추세에 따라 우리 나라에서도 1980년대 초반에 FM 수신기를 IC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982년부터 미국에서는 중파를 이용한 원거리 AM스테레오방송이 시작되어 서비스를 다양화하는 추세이므로, 우리 나라도 새로운 방송방식의 연구가 미래에 대비한다는 측면에서 신중하게 진행되고 있다.
정보화 사회로의 진입에 따라 폭발적으로 증가될 많은 정보처리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새로운 방송체제로 개편하게 되였다. 예를 들면 방송개념은 전파를 이용하는 일방적인 기존의 방식(broad cast) 외에 계약된 가입자를 대상으로 하는 협대역방송(narrow cast)이 병용 또는 병존하는 새로운 방송시스템이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AM스테레오는 인접국간 보호가 훨씬 더 보장된 미국에서 중파를 이용하여 원거리까지 스테레오방송 서비스를 하는데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FCC는 방식을 통일시켜 표준방식을 선정하지 않고, 1982년에 제안된 모토로라(Motorola)방식·해리스(Harris)방식·카한(Kahn)방식·마그네박스(Magnavox)방식·벨러(Belar)방식을 모두 허가하여 방송사업자가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방식을 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AM 스테레오방식의 설계에서도 모노 수신기와 양립성 유지, 국제협약과의 조화, 복사 제한과 입접 채널과의 혼신 보호비, 스테레오 분리도 등의 4개 사항으로 된 최소한의 기술 기준만을 제시하였다. 최근에는 Motorola방식이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1883년에는 국내 최초의 말하는 시계 라디오가 생산되었고, 1985년도에 들어와서는 AM방송을 좌우 채널로 분리해 스테레오 효과를 내는 기술을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는 라디오와 카세트의 일체형이 주종을 이루는 추세이다.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생활 > 라디오 방송
1999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영문학 교수 존 닐(John D. Niles)은 『호모 나랜스』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호모 나랜스, 즉 ‘인간은 이야기하려는 본능이 있고,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이해한다.’는 특성으로 인간을 정의했다. 호모 나랜스는 정보에 대한 사실적 전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을 뜻하는데, 요즘처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다양한 UCC, 동영상 등을 공유하며 이야기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의 분석은 상당 부분 일리가 있다.
라디오 방송의 탄생 역시 인간의 이러한 욕구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라디오’는 기존의 정보전달 방식과 다른 형태인 ‘사람의 말’ 즉, ‘목소리’를 통해 전달한다. 사람의 목소리로 정보를 전달받다 보니 쌍방향 대화방식은 아니어도 소통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제38회전국체육대회라디오방송관계자
(1957) 라디오청취 광경(1957) 라디오청취 광경(1957)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방송은 1927년 2월 16일 사단법인 경성방송국(JODK, 출력 1kW, 주파수 690kHz)에서 시작되었다. 이때의 라디오 방송은 일본인들과 일부 한국 부유층들의 전유물이었다. 라디오 가격이 쌀 50가마니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후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같은 해 9월 서울중앙방송국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이때부터 국영방송이 시작되었다.
동아방송 개국(1963)
새로운 뉴스와 오락이 있는 라디오를 통해 일제 강점기의 아픈 기억을 빨리 털어내려는 듯 사람들은 라디오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와 함께 라디오 방송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때 라디오에선 다양한 퀴즈 프로그램과 어린이 방송을 선보였다. 그 중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던 것은 바로 어린이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서구 열강들에 둘러싸여 여러 위기를 겪었던 조선은 미래를 위한 해답을 ‘소년’에게서 찾았다. 육당 최남선이 잡지『소년』을 창간하면서 소년들을 강인한 육체와 지식습득의 자세를 지닌 존재이자 미래를 이끌어 갈 사람으로 그렸고, 이후 ‘소년’ 서사는 다양한 작품에서 나타났다. ‘똘똘이의 모험’ 역시 그 ‘소년’ 서사 중 하나였다. 1936년 동아일보에서 처음 연재된 소설이 라디오 전파를 타면서 사람들은 똘똘이의 아픔에 울고, 기쁨에 함께 웃으며 내일을 향한 희망을 품었다.
한국 라디오 방송사가 독립 호출부호를 배당받은 것은 1947년이었다. 라디오를 듣다 보면 “OO HL, Mhz OO방송입니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HL이 바로 한국 라디오의 호출부호다. 그 전까지는 일본 배당의 ‘JO’를 써야 했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 6.25전쟁이 터지면서 라디오 방송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옮긴 라디오 방송사들은 미군의 기자재를 사용하게 되고 그와 함께 기술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라디오프로그램이 제작되어 방송되기까지의 과정(1957)
이후 1954년 12월 15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방송사인 기독교방송(CBS)이 첫 전파를 발사하면서 라디오 방송사들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 착안한 ‘다이얼을 돌려라‘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며 CBS는 국영방송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그 인기 비결은 예산 부족으로 LP판이 한정적이었던 KBS와는 달리 미국 선교단체의 원조를 받는 CBS는 음악자료가 방대하다는 점이었다.
그러자 KBS는 다른 분야로 승부수를 띄우는데, 바로 라디오 주말연속극이었다. 1956년 조남사 작가의 극본 ‘청실홍실’이 방송되자 KBS는 실로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이 인기에 힘입어 KBS는 일일연속극까지 편성하는데, 1957년 ‘산너머 바다건너’를 선보이며 장민호, 이혜경, 이춘사 씨 등의 성우를 스타 반열에 올려놨고, 훗날 영화배우로 이름난 성우들도 많이 배출했다.
남산 스튜디오 시대가 열리면서 라디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청취자의 참여를 유도하는 형식의 방송포맷을 만들어갔다. ‘누가누가 잘하나’, ‘스타 탄생’ 등 청취자가 직접 참여하는 공개 방송들이 대거 등장했으며, 음악방송과 음악 DJ들이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TV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라디오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부산문화방송국 방송 광경(1959) 부산문화방송국 개국기념식 공연(1959) MBC라디오방송국 개국(1961)
“라디오 방송의 골든아워가 변해가고 있다. (중략) TV가 등장하기 전에는 가장 청취율이 낮던 시간이 TV의 보급에 따라 가장 청취율이 높은 시간으로 변해가고 있다.”(「서서히 바뀌는 라디오 골든아워」, 경향신문 1974년 9월 16일자 기사)
사람들 사이에선 ‘라디오’란 매체가 사라질 것이란 성급한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그 결론에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자동차였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자가용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라디오는 새 생명을 얻는다. 늘어나는 자동차 수에 비례해 라디오는 더욱 많은 청취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서울에서만 하루 3백여 대의 자동차가 새로 거리에 등장하고, 1천 3백여 명이 운전면허를 따는 ‘자동차 홍수의 시대’를 맞아 교통정보는 이제 어떤 형태의 라디오 프로그램도 빼놓을 수 없는 메뉴가 됐다.”(「교통시대 운전자의 귀를 잡아라」, 한겨레 1997년 3월 11일자 기사)
이전에 누렸던 드라마와 공개방송의 인기는 TV에 빼앗겼지만, 실시간 교통정보, 도로상황, 속보 등을 가장 빠르게 들려주고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 사는 이야기를 신속하게, 그리고 허물없이 주고받는 라디오의 특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거기다 라디오는 귀로만 듣는 특성을 버리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매체로 변화하고 있고, 라디오 수신기 역시 이제는 스마트폰 어플 속에서도 만날 수 있다.
시대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살아남은 매체답게 지금도 라디오는 진화하고 있다. 과연 많은 방송학자가 예언한 대로 라디오 방송이 우리 생활 속에서 사라지는 날이 올까? 라디오 탄생 120년째인 지금, 라디오의 진화는 계속될 것이다.
(집필자 : 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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