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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Las Meninas, The Maids of Honour)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스페인 예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1656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시녀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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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편집]
회화 양식[편집]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해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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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 시녀들(Las men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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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 시녀들(Las men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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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걸작 ‘시녀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시각예술] – 아트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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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의 ‘시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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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Las Meninas, The Maids of Honour)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스페인 예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1656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복잡하고 수수께끼 같은 화풍은 어느 것이 실재하는 것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며,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사물 사이의 관계를 불확실하게 만든다. 이러한 복잡함으로 인해, 이 작품은 가장 많이 연구된 서양화 작품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 작품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마드리드 궁전에 있는 큰 방을 그린 것이며, 스페인 왕실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들을 마치 스냅샷 사진을 찍은 것처럼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몇몇 인물들은 캔버스 밖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다른 몇몇 인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동작을 진행하고 있다. 어린 마르가리타 왕녀를 담당하는 시녀들, 샤프롱, 호위병, 그리고 두 명의 난장이가 에워싸고 있다.
그들 바로 뒤에, 벨라스케스 자신이 큰 캔버스에 작업 중인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벨라스케스는 작품 내부의 공간을 넘어 이 그림을 감상할 누군가가 자리할 캔버스 밖 저편을 바라보고 있다. 배경에는 거울이 걸려 있으며, 거울 속에는 왕과 왕비의 상반신이 보인다. 이 왕과 왕비는 감상자와 마찬가지로 “작품 내부가 아닌 바깥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몇몇 학자들은 이 왕과 왕비의 모습이 “그림 속에서 벨라스케스가 캔버스에 작업 중인 그림 속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 중의 하나로 손꼽혀 왔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 루카 지오다노는 이 작품을 가리켜 ‘회화의 신학’이라고 표현했으며, 19세기 토마스 로런스 경은 이 작품을 ‘예술의 철학’이라고 일컬었다. 최근에는 “회화로서 무엇을 나타낼 수 있는가를 자신감있고 치밀하게 표현한 벨라스케스의 걸작이며, 이젤을 사용한 회화 방식이 가진 가능성을 가장 철저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배경 [ 편집 ]
펠리페 4세 왕실 [ 편집 ]
본 작품에 그려진 마르가리타 왕녀 . 1734년에 발생한 화재로 손상을 입은 왼쪽 볼 부분은 이후 다시 채색되었다.
17세기 스페인에서 화가들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화가는 시인이나 음악가와 같은 예술가가 아닌 기술자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 왕실을 통하여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개척해 나갔으며, 결국 1651년 2월 왕궁에서 시종으로 일하게 된다. 이 자리는 그에게 많은 물질적, 사회적 혜택을 주었지만, 동시에 많은 의무를 지웠다. 사망하기까지 8년 동안 그가 완성한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작품들 중 대부분은 왕실 구성원들의 초상화이다. 펠리페 4세의 첫 부인인 부르봉 가의 이사벨 왕비는 1644년에 사망하였으며, 그들 사이에 난 외동아들인 발타사르 카를로스 역시 2년 뒤에 사망하였다. 대를 이을 후계자가 없게 되자 펠리페 4세는 1649년 마리아나 왕비와 두 번째로 결혼하였으며, 마르가리타 왕녀는 그들의 첫 아이이자 그림이 완성될 당시의 유일한 자녀이다. 마르가리타 왕녀 이후로 어릴 때 세상을 떠난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5살 때 사망)와 카를로스 왕자가 있었으며, 카를로스 왕자가 4살 때 왕위를 물려받아 카를로스 2세로 등극하였다. 벨라스케스는 마리아나 왕비와 아이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펠리페 4세 자신은 만년에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거부하였으나 이 작품에는 자신이 등장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하였다. 1650년대 초반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에게 죽은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살았던 방을 하사하여 이를 궁정 박물관으로 조성하게 함으로써 그의 작업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시녀들’이 전시되었던 곳이 바로 이 곳이다. 펠리페 4세는 이 곳에 전용 의자를 마련해 놓고 벨라스케스가 작업하는 모습을 종종 지켜보곤 했다. 엄격한 궁내 예절로 인해 다소 제한적이긴 했지만, 예술을 사랑했던 이 왕은 벨라스케스와 평범하지 않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벨라스케스의 죽음 이후, 펠리페 4세는 왕위 후계자 선택을 위해 작성한 비망록에 “난 희망을 잃었다”라는 내용을 남겼다.
1640년대와 1650년대 사이에, 벨라스케스는 궁정 화가 겸 펠리페 4세의 수많은 서양화 컬렉션을 담당하는 큐레이터 역할을 맡았다. 그는 업무에 있어 상당한 자유를 보장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거울, 조각상, 융단 등을 사용하여 가장 값비싼 그림들이 자리한 전시관들의 내부 장식을 관리하였다. 또한 펠리페 4세가 소유한 많은 작품들의 감정 및 관리 업무 역시 그의 일이었다. 1650년대 초, 벨라스케스는 미술 분야의 권위자로서 모든 스페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현재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 중 티티안, 라파엘로, 루벤스 등의 작품을 포함한 많은 작품들은 벨라스케스가 직접 수집, 정리한 것이다.
보관 및 보존상태 [ 편집 ]
이 작품의 최초 작품명은 ‘가족(La Familia)’이었다. 작품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 이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스페인 황금시대의 바사리’라고 불리는 안토니오 팔로미노가 1724년에 완성한 스페인 화가들의 일생을 기록한 작품집에 수록되어 있다.
적외선 관찰 결과 자잘한 펜티멘토(작가가 작품을 수정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작품 속 벨라스케스의 머리는 원래 왼쪽이 아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 작품은 왼쪽과 양쪽 모두가 잘려나갔다. 1734년 발생한 화재로 인해 알카사르가 완전히 불타 없어지면서 이 작품 역시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왕실 소속 화가인 후안 가르시아 데 미란다가 복원하였다. 마르가리타 왕녀의 왼쪽 볼 부분은 안료가 크게 소실되어 완전히 새로 채색하였다. 화재에서 빠져나온 이후 이 작품은 1747년부터 48년까지 왕실 소유가 되었는데, 이때 그림 속의 마르가리타 왕녀가 이복 자매인 마리아 테레사로 잘못 밝혀졌으며 이러한 실수는 1772년 새 마드리드 왕궁에서 이 작품을 접수한 후에도 반복되었다. 1794년에 작성된 왕실 소유 작품 목록에서 이 작품의 이름은 ‘펠리페 4세 가족’ 이었으며, 1814년에 작성된 목록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기재되었다. 1819년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졌으며, 1843년에 제작된 프라도 미술관 카탈로그에서 처음으로 ‘시녀들’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였다.
최근 이 작품은 질감과 색상의 손실로 고통을 겪고 있다. 오염과 관중들에 노출됨으로 인해 시녀들이 입은 옷이 만들어내었던 흰색과 파란색의 선명한 대비가 바래었다. 1984년 미국 미술품 복원 전문가 존 브릴리의 감독 아래 19세기에 실시된 복원작업 중 생성된 황색 먼지층을 제거하기 위한 마지막 작품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미술사학자 페데리코 제리의 말에 따르면 이 작업은 ‘분노어린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작품이 손상을 입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의 모습이 변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페즈-레이의 의견의 따르면, ‘복원은 불가피했다’. 작품의 크기, 중요성, 가치 등의 이유로 인해 이 작품은 전시회를 목적으로 한 외부 대여를 금하고 있다.
회화 양식 [ 편집 ]
주제 [ 편집 ]
작품 내 인물들의 위치(본문 참조)
이 작품은 펠리페 4세의 마드리드 알카자르 궁전 내부에 위치한 벨라스케스의 작업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천정이 높은 방은 실비오 가끼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소실점이 하나인 구도를 잡을 수 있는 심플한 박스형 공간”이다. 앞부분 중앙에는 마르가리타 왕녀(1)가 서 있다. 당시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 사이에 난 유일한 자식이었던 이 다섯 살짜리 공주는,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였다. 왕녀는 두 명의 시녀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이 중 왕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녀가 도나 이사벨 데 벨라스코(2), 왕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금쟁반 위의 붉은 컵에걸린 독일인인 마리바르볼라(마리아 바르볼라)(3), 그리고 장난스럽게 발로 개를 깨우려 하는 사람이 이탈리아인인 니콜라스 페르투사토(5)이다. 이들 뒤로 상복을 입은 채 호위병에게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이(호위병의 신원은 파악되지 않았음) 왕녀의 샤프롱인 도나 마르셀라 데 울로아(6)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해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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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녀들(las meninas)>은 원래 제목이 없는 그림이었다. 그러다 여러 이름이 붙여졌다. (<시녀들과 함께 있는 마르가리타 공주와 난쟁이 여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의 자화상>, <펠리페 4세의 가족>) 1819년부터 프라도 미술관에 보관된 이 그림은 1834년 처음으로 <시녀들>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시대에 따른 이름의 변화는 각 시대별로 이 그림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즉 <시녀들>의 이름 변천사를 보면 시대별로 미술 연구가가 어떤 관심사를 가졌는지 알 수 있다.
2/ 그림 속 공간은 펠리페 4세의 아들인 카를로스 왕자의 침실이었다. 그가 사망하자 펠리페 4세는 이 곳을 벨라스케스의 화실로 지정한다. 펠리페 4세의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향한 총애는 이 뿐만이 아니었다.
구글/ 펠리페 4세 초상화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로 일하면서 여러 차례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당시 예술 좀 하는 사람들은 이탈리아 여행을 꿈꿀 정도로 이탈리아는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꼽혔다. 벨라스케스가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에는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리페 4세는 그의 궁정화가로서의 봉급을 모두 유지해줬다.
3/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궁정 화가라는 직책 말고도 여러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 문 담당 왕의 하인
– 의상 보관실의 관리(왕이 옷을 입고 벗을 때 의상을 운반하는 일)
– 왕실의 시종(왕의 처소의 열쇠를 맡았음)
– 왕궁 공사 감독 등
프라도 미술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벨라스케스의 허리춤에 벨트가 있고 거기에 달려 있는 것들이 왕실 문의 열쇠로 보인다. 왕실 문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왕실 곳곳을 누비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당시 왕실에서의 그의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 같은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그의 왕궁 관직들은 사실상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벨라스케스는 위의 업무를 수행하느라 그림을 그리는 일에도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관직을 유지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벨라스케스가 살던 시기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향한 두 가지 시선이 공존했다. 하나는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기술직’으로서의 삶이자 하대 받는 삶이었다. 만약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고상한 기호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는 것을 간절히 바라던 디에고 벨라스케스에게 화가라는 직업은 쓸모가 없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고귀함을 드러내기 위해 위의 직책들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프라도 미술관
4/ <시녀들> 속 벨라스케스의 가슴팍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는 산티아고 성인의 이름을 걸고 산티아고 순례객들을 지키는 산티아고 기사단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시녀들>이 완성된 연도는 1656년이고,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산티아고 기사단이 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이다. 다시 말해, <시녀들>이 완성됐을 시기에 그림 속 벨라스케스의 가슴 팍에는 붉은 십자가가 그려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두고 “누가 완성된 그림 위에 붉은 십자가를 그렸을까?”라는 의문이 생겨났고, 현재까지는 화가 자신이 직접 그렸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정설로 꼽힌다.
산티아고 기사단원이라는 것만큼 ‘고귀하고 명예로운 신분’을 증명하는 일은 없었다. 산티아고 기사단원이 되고자 하는 신청자들은 아래와 같은 조건들을 지켜야 한다.
– 적자
– NO 이교도(부모, 조부모도 무슬림, 유대인이면 안됌)
– 육체노동 생활자가 아니어야 함
– 종교재판을 받은 적이 없어야 함(부모, 조부모도 마찬가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조부모들은 포르투갈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순혈을 중시하던 스페인 기사단은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로 받아드릴 수 없었다. (더불어 그의 부친이 교회 공증인으로 일했다는 사실(당시 교회 공증인은 유대인들이 주로 종사하던 직업이었음)이 그가 귀족 혈통이 아님을 증명하는 증거로 역할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산티아고 기사단이 되었다. 어떻게? 그를 총애하는 펠리페 4세가 적극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이다. 1659년 펠리페 4세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뛰어난 자질”을 이유로 들며, 교황에게 (그를 산티아고 기사단 으로 임명해줄 것을) 탄원했고 교황이 이를 인정하였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로써, 그는 순결하고 고귀하며 명예로운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죽기 1년 전 최고의 명예를 맛 본 그는 왕실 초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팍에 붉은 색 십자가를 더했다. 이것만큼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신분상승에 눈 먼 이라는 사실을 잘 나타내는 일화가 어딨단 말인가?
* 이은해, 스페인 바로크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신분과 혈통에 대한 집착 참고
* 정은경, 벨라스케스 프로이트를 만나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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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벨라스케스 – 시녀들 ( Las menias)
17세기 스페인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서 전세계적으로도 위대한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자연주의 양식으로 묘사한 벨라스케스의 인물과 정물작품들을 보면 그의 뛰어난 관찰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6세기 베네치아의 회화를 연구하면서 여기에 영향을 받아
사물의 특성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시로서는 독특하게도 시각적 인상을 강조한 걸작들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벨라스케스 ( Velázquez, Diego Rodríguez de Silva : 1599-1660) 는
화려하고 다양한 붓놀림과 미묘한 색의 조화를 이용하여
형태 · 질감 · 공간 · 빛 · 분위기의 효과를 내는 데 성공했으며,
그로 인해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의 주요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작품에 서명이나 날짜를 거의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작자와 연대를 밝히는 데는 양식상의 증거만을 기초로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의 초상화들은 분명히 그의 화실에서 조수들에 의해 모사된 것이 많으며
그 자신의 작품은 많지 않으며,
그의 자필서명이 들어 있는 작품들 중 남아 있는 것은 150점도 채 안 된다.
그는 그림을 천천히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기에는 마드리드에서의 궁정관리직에 대부분의 시간을 바쳤다.
“당시 스페인 왕가는 특이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의 능력을 활용하는 데 앞장섰어요.
궁으로 데려와 일을 시키거나 궁 밖의 민심을 전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맡겼죠.
벨라스케스 같은 궁정화가들은 이런 시대상을 반영하는 작품을 여럿 남겼습니다.”
궁정의 ‘정책홍보’를 그림으로 표현한 셈이다.
흔히 17세기를 스페인 회화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놀라운 회화의 솜씨를 발휘한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드리드는 16세기 스페인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유럽 미술의 중심지의 하나로 부상하였고
당시 펠리페 4세의 궁전에는 티치아노를 비롯한 수많은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루벤스와 같은 국제적인 화가도 이곳을 방문하였다.
이곳에서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왕실의 공적을 알리는 선전화나 왕가의 초상화를 제작하며
화가로서의 입신을 이루었다.
1623년 필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평생 왕의 예우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궁정의 요직까지 맡았다. 필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가 아니면 절대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지 못하게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1628년 첫 이탈리아여행에서 받은 베네치아파의 영향으로 밝고 선명한 색조와 경묘한 필치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왕족, 신하 그리고 궁정의 어릿광대, 난쟁이 등을 그린 다수의 초상화는 그를 미술역사상 초상화가의 대가로 만들어주었다.
1651년 펠리페 4세는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안나와 재혼하고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로서 펠리페 4세의 젊은 왕비와 그의 자녀들 그림을 주로 그렸다.
벨라스케스는 왕실화가여서 당연히 왕가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궁전에 걸려 왕실의 존엄함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공주들의 초상화는 다른 왕가와의 결혼 전에 얼굴을 소개하기 위해 제작되기도 했다. 벨라스케스는 마르가리타(Margarita) 공주의 모습을 유아적 모습부터 어린아이 때까지 여러 점 남겼다. 벨라스케스의 마지막 작품은 1660년 봄, 프랑스로 가서 루이 14세와 마리아 테레사(Maria Teresa)공주의 혼인식을 거행할 스페인풍의 파빌리언을 장식한 것이었다.
Philip Ⅳ in Brown and Silver
1631-2, Oil on canvas, 200×113㎝, National Gallery, London
Queen, Dona Mariana of Austria
(1652-3), Oil on canvas, 231×131㎝, 프라도미술관, 마드리드
벨라스케스는 왕실화가로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그림을 그렸지만
한편으로 왕실의 노리개감이었던 난쟁이, 시종들 그리고 걸인들의 모습도 많이 남겼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에는 왕실 주문자를 만족시켜 영예를 얻고자 하는 공적인 화가로서의 희망과,
대상을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화가의 시선이 공존한다.
그러나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순수한 회화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보다도 붓의 자유로운 흐름과 물감의 흔적을 통해 얻어지는 생생함이다.
<라스 메니나스 ( Las menias) > 의 황녀의 빛나는 금발과 레이스를 표현한 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벨라스케스는 단 몇번의 붓질로도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개의 보드라운 털, 그리고 화려한 의상의 반짝임을 표현해 낼 수 있었는데
이러한 시각적인 효과를 누구보다도 높이 샀던 이들은 근대의 인상주의 화가들이었다.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2층 중앙홀에 방탄 유리로 보호된 채 걸려있는 최고 명화로 꼽히는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 L as menias)> 는
필리페 4세(Philip Ⅳ, 1605-1665)의 개인사무실에 걸려있을 만큼 그가 아꼈던 그림이다.
벨라스케스 말년, 57세 되던 1656년에 그려진 최고의 걸작 <라스 메니나스(Las Meninas)>를 그렸다. ‘메니나스’란 ‘소녀들’ 이라는 뜻으로, 스페인 왕실에서는 ‘왕비의 시중을 드는 젊은 귀족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벨라스케스 생전에는 이 그림에 대해 따로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지 6년이 지난 1666년, 그의 사위이자 제자화가인 후앙 보티스타 델 마소(Juan Bautista del Mazo, 1612-1667)는 마드리드의 알카사르 성 소유의 미술품 목록에 벨라스케스가 그린 이 그림을 <마르가리타 공주와 시녀들, 난쟁이 여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다가 1686년과 1700년 목록에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의 자화상>이라고 기록되었다. 이후 이 그림은 <필리페 4세의 가족( The Royal Family of Philip Ⅳ)> 으로 기록되었고, 1734년 알카사르 궁의 화재로 일부분 다시 복원했으며 1819년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지고, 1843년 <라스 메니나스(Las Meninas) >라고 언급되어 지금까지 그 제목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 <시녀들(Las Meninas)>은 벨라스케스의 집단 실물초상화로 마르가리타 공주와 주변 인물을 그린 사실주의 기법의 대표작품이다. 거울 속(왕과 왕비) 인물까지 포함하면 모두 11명이다. 1985년 예술가와 비평가들 사이에서 세계 최고의 걸작,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칭송을 받게 되었는데, 궁 정의 분위기를 잘 포착한 그림의 구성을 살펴보면 우선 이 그림은 상당히 크기가 크다(3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인물들은 앞쪽에 배치되고 뒤쪽은 거의 천정과 뒷벽이 차지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공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또한 이 그림에서 오른편 첫 번째 창과 다섯 번째 창을 통해 빛이 들어와 실내를 비추고 그 빛이 온화하게 실내를 감싸며 또한 뒤쪽 남자가 커튼을 걷고 있음으로 해서 빛을 추가해주고 있다. 흥미진진한 구성과 회화적인 솜씨로 인하여 벨라스케스의 화업을 결산하는 대표작이다.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는 44번이나 모방작을 발표해서 특별한 경의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벨라스케스 – ‘ 라스 메니나스(Las menias, 시녀들)’ Las Meninas or the Family of Philip Ⅳ 1656 , Oil on canvas, 318×276㎝, Museo del Prado, Madrid
배경은 죽은 왕자 발타사르 카를로스(Prince Baltasar Carlos, 1629~1646)의 침실이었던
마드리드의 알카사르 궁전이다.
그림의 중앙에는 어린 마르가리타 테레사공주가 있다. 뒤쪽 거울에는 그녀의 부모인 필리페 4세와 왕비 마리안나가 비치며 공주는 그녀의 부모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마르가리타 공주의 뒤에 있는 거울에는 공주의 부모인 왕 필리페 4세와 왕비 마리안나가 그려 있는 모습이다. 서양에서는 거울이 여러 의미를 지닌다. 거울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허영’을 의미하기도 하고, 거울은 진실을 보여주며 반영과 숙고의 의미로 ‘지혜’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시녀들>에서 왕과 왕비가 반사된 ‘거울그림’은 군주의 지혜로움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로, 왕에 대한 벨라스케스의 애정과 헌정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는 독자적 위상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화가의 시선, 난쟁이 마리 바르볼라, 마르가리타 등의 시선에 의해 존재가 입증된다. 왕과 왕비는 직접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왕실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그 존재가 증명된다는 것이다. 화면에 왕과 왕비가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구경꾼들이 오히려 주된 인물로 그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세미센과 슈바이카르트(Schweickart)는 그들의 책에서 벨라스케스가 이 그림을 전면에 설치한 큰거울을 보고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벨라스케스나 마르가리타 공주, 난쟁이, 또 공주 오른쪽의 시녀들이 모두 앞쪽을 보고 있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바로 거울을 보고 있기 때문에 벨라스케스가 비록 공주 뒤에 서 있지만 거울에 비친 공주를 그릴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두 학자의 주장은 일반론과는 한참 동떨어진 이론인데, 사실 빈의 미술사박물관에 소장된 마르가리타 공주의 또 다른 초상화를 보면, 그들의 주장이 어쩐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라스 메니나스>의 마르가리타 공주는 가르마가 오른쪽에, 머리장식이 왼쪽에 있고, 빈 미술사박물관에 소장된 그림은 가르마가 왼쪽에, 머리장식이 오른쪽에 있다. 거울은 대상을 좌우로 뒤집어 비춘다. 그래서 사진의 모습과 거울에 비친 모습이 다르다.
Infanta Margarita Teresa (1653) –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Infanta Margarita Teresa (1655) – 128×100cm, 파리 루브르박물관
Infanta Margarita Teresa (1656) –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 라스 메니나스(Las menias, 시녀들)> 中, 1656,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Infanta Margarita Teresa (1659) –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Infanta Margarita Teresa (1660)
캔버스에 유채, 212×147cm, 프라도박물관 , 마드리드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사위 마소(Juan Bautista del Mazo)가 완성하였다.
■ Margaret Theresa of Spain – 스페인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1651-1673)
German, Margarete Theresia von Spanien – 신성로마제국 마르가레테 테레지아 황후
스페인-합스부르크의 공주 마르가리타(Margarita)는,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그의 조카이자 두 번째 부인인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의 마리안나의 딸이다.
필리페 4세는 앙리 4세와 마리드 메디치의 딸인 엘리자벳 드 부르봉(이사벨라 왕비)과 결혼했다.
마르가리타 공주의 어머니 마리안나는 마르가리타가 후일 결혼하게 될 레오폴트 1세의 동생이었다. 필리페 4세는 후계자인 아들 발타사르와 자신의 조카인 마리안나를 결혼시키려 계획하고 있었는데, 발타사르와 이사벨라 왕비가 죽는 바람에 조카인 마리안나와 결혼한다. 결국 마리안나는 약혼자였던 발타사르의 아버지 필리페 4세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는 이를 배경으로 한다.
합스부르크가는 정략결혼으로 영지를 확장해나갔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처럼 복잡한 근친결혼을 했던 것이다.
마르가리타 공주의 이복언니 – 마리아 테레즈( Maria Teresa, 1639-1683, 프랑스 루이 14세 왕비)
1651~52년, 캔버스에 유채, 34.3×40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펠리페 4세의 첫 번째 부인 엘리자베스(1602-1644,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치의 딸)의 딸.
마르가리타가 9살이 되던 해 이미 21살이던 그녀는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에게 시집을 갔다.
베르사이유궁에서 그저 조용한 왕비로 20여 년을 살았다고 전한다.
마르가리타 테레사에게는 이복언니 마리아 테레즈(루이 14세의 왕비)가 있었으나
스페인의 숙적인 프랑스 왕비가 되었기 때문에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유력한 스페인의 왕위계승후보였다.
그러나 스페인을 잃지않기 위해 마르가리타 테레사도
어머니 마리안나의 동생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레오폴트 1세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아버지 필리페 4세가 죽은 직후인 1666년 15살의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오스트리아로 가서 레오폴트 1세(Emperor leopoldⅠ, 1640-1705)와 비엔나에서 결혼하였는데
나이 차이가 많았음에도 둘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마르가리타는 어린 나이에 많은 아이를 낳고 유산을 한 것이 원인이 되어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1673년 21살의 나이로 4번째 아이를 낳다 사망하게 된다.
사랑한 부인을 잃은 레오폴트 1세는 무척이나 상심했다고 한다.
레오폴트 1세는 오스트리아의 왕족 합스부르크家으로 신성로마 황제로서의 지위를 유지한다.
대표적인 계몽군주의 한 사람으로 신앙심도 깊고 교양도 매우 높은 인물이었다.
음악을 너무 사랑하여 ‘음악황제’라 불리던 그는 오스트리아의 빈을 음악의 도시로 만드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정치적 수완도 상당히 좋아서 프랑스의 스페인 왕위계승전에서
루이 14세와 동등한 싸움을 벌였지만 종전 전에 사망하고, 둘째 아들 카를 6세에게 왕위를 계승한다.
<시녀들> 그림의 인물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1724년 스페인 회화미술관에 대해 집필한 안토니오 팔로미노(‘스페인 황금시대의 바사리’라 불림) <미술관과 시각적 단계, El Museo pictórico y escala óptica>의 제3권〈스페인 파르나소, El Parnaso español〉덕분이다. 이 그림이 1656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화면 중앙에는 왕위 계승자인 마르가리타 공주가 드레스를 입고 벨라스케스를 외면한 채 서 있다. 마르가리타 공주는 펠리페 4세의 딸로 당시 4세였다. 왕비의 시녀 마리아 아구스티나 사르미엔토가 무릎을 꿇고 공주에게 물잔을 건네고 있는데, 이 아가씨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1659년에 아길라르 백작과 결혼했고, 나중에 바라하스 백작과 재혼했으나 두 번의 결혼생활 모두 행복하지 못했다고 알려졌다. 공주의 뒤에 서 있는 시녀는 이사벨 데 벨라스코, 예기치 못한 방문객이 있음을 알고 예의를 표하는 중이다. 이 여자 역시 불행했다. 푸엔살리다 백작과 결혼했지만 1659년에 궁정에서 죽었다.
마르가리타 공주 옆에 있는 두 명의
시녀들(마리아 아구스티나 사르미엔토/ 이사벨 데 벨라스코)도 공주 못지않은 인형같은 얼굴에 그들의 공손하고 참한 자세가 돋보인다.
화면 오른쪽에는 두 난쟁이와 조용히 엎드린 커다란 개가 있다.
시녀 이사벨 앞에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난쟁이 여인은 마리 바르볼라이다.
얼굴이 넓고 납작하다. 이 여자 난쟁이는 놀란 듯한 일그러진 표정이다.
이 그림이 그려지기 5년전부터 알카사르 궁정에 살았다고 한다. 그 전에는 비예르발 백작부인의 광대였다.
여자난쟁이 마리 바르볼라 그 앞쪽 가장자리에 있는 또 한 명의 꼬마남자 난쟁이는
이탈리아인 니콜라스 데 페르투사토이다. 개의 등에 발을 얹어 놓고 있는 모습으로
바닥에 점잖게 배를 깔고 누워 있는 커다란 개에게 공연한 발길질로 장난을 걸고 있다.
이 작은 남자는 1650년부터 궁정에 있었다. 그러다 1675년에 왕의 몸종이 되었다.
당시 유럽의 왕가에는 소위 궁정 광대들이 궁정의 오락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난쟁이가 광대의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왕이나 그의 어린 자녀들에게 좋은 말벗이었다.
한편, 뒤로 희미하게
어둠 속에 서 있는 두 여인은 역시 공주를 보필하는 시녀인데
한 여인은 마르셀라 데 울로아, 다른 사람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혹 어느 책에서는 사제와 수녀로 밝히고 있기도 하다.
그림에서 가장 뒷부분, 열린 문으로 계단이 보이고 한 사람이 보이는데,
왕비의 집사였던 호세 니에토 벨라스케스(화가 벨라스케스와 성이 같을 뿐)이다.
그림 속 공간은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Prince Baltasar Carlos, 1629~1646)가 쓰던 방으로
1646년 그가 사망한 후 벨라스케스가 아틀리에로 사용했다고 한다.
인물이 모여 있는 장소는 좀 어두운 편으로, 벽면에는 그림이 많이 걸려 있고 천장도 꽤 높은 편이다.
작업실 뒤편, 마주 보이는 벽면 위에는 대형 그림 두 개가 걸려 있는데
루벤스(Rubens, 1577-1640)의 <아라크네를 벌주는 팔라스 아테나>와
요르단스 (Jordaens, Jacob 1593-1678) 의 <아폴로와 판, Apollo, Hermes and Pan>이다.
이 작품들은 벨라스케스의 사위이며 제자인 후앙 보티스타 델 마소(Juan Bautista del Mazo, 1612-1667)가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모작들로 알려져 있다.
두 그림 모두 신성한 예술은 지상의 권력도 어쩌지 못하며 자신은 그러한 신성한 예술을 주관한다는
화가로서의 자부심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벨라스케스는 자신을 이젤을 당당히 들고 서있는 화가의 모습으로,
동시에 가슴에 붉은 기사훈장이 선명한 귀족의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
그는 상류사회의 일원인 궁정화가로서 성공한, 자의식이 강한 화가가
자기 세계를 자랑스럽게 반추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왼쪽에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는 벨라스케스 자신의 모습이다. 화면 왼쪽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작업실로 꾸민 알카사르 궁전의 한 방안에서 대형 캔버스 앞에 서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는 궁정에서의 일상의 단조로운 한 장면을 통해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얼굴도 사뭇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은색 비단셔츠에 검정 상의를 걸쳤으며 가슴에는 승리의 상징인 산티아고 성 야고보 기사단의 문장인 붉은색 십자가, 칼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이 완성된 1656년 그는 기사단에 소속되지 않았다. 그 상징은 벨라스케스가 1659년 기사단에 입단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한 다음 그를 총애한 필리페 4세가 그려 넣게 했다고 한다.
근래, 독일의 한스 벨팅(Hans Belting) 교수의 내한 때 공개화상 대화가 개최되었는데 그는 이 <라스 메니나스=시녀들>의 왼쪽에 놓인 대형캔버스와 벨라스케스 사이의 거리에 대해 언급했다. 그 거리를 생각할 때, 벨라스케스는 붓을 잡은 오른팔을 펴서 제대로 붓질을 할 수 있을 만큼 캔버스와 가까이 있지 않다. 벨라스케스는 어쩌면 그냥 캔버스 앞에 근사한 폼으로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주와 왕 부처, 또 왕실과 가장 친근한 난쟁이 광대와 함께 자신도 왕실과 아주 사사로운 관계라는 사실을 그림이라는 형식을 빌려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 외에도 벨라스케스는 자신이 생활수단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정신적인 창작 작업을 하는 자유인이라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벨라스케스 자체가 워낙 신비로운 캐릭터여서 이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주제로 <벨라스케스의 거울>이라는 추리소설도 있으며, 라헐 판 코에이의 소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속에서는 <시녀들>에 등장하는 개가 사실은 난쟁이 바르톨로메로서 그가 공주의 인간개 노릇을 했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벨라스케스의 자화상(Self-Portrait) (1640), Oil on canvas, 46×38㎝, Museo de Bellas Artes, Valencia 디에고 로드리게스 벨라스케스는 독특하게 시각적 인상을 강조하면서 화려하고 다양한 붓놀림과 미묘한 색의 조화를 이용하여 형태, 그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힘과 직관, 뛰어난 기법은 마네와 들라크루아, 피카소, 베이컨 등 후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라스 메니나스, Las Meninas > Las Meninas. After Velázquez.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1656)를 재해석한 그림 1957. Oil on canvas. Museo Picasso, Barcelona, Spain 그는 유럽에서 19세기초부터 명성을 얻었으나 직계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았으며, 그 무렵 주로 영국의 수집가들은 그가 세비야에서 그린 초기 그림들을 대부분 입수하였으며 그가 후기에 그린 공식적인 작품들 대부분은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유럽 3대 미술관(런던 내셔널 갤러리,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손꼽히는 프라도미술관(Museo del Prado)은 18세기말 자연과학박물관으로 지어졌다가 1819년 왕립미술관으로 바뀌었으며, 중세부터 18세기까지 스페인 및 유럽회화를 전시하고 있다. 루벤스, 반 다이크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회화, 리베라, 무리요, 수르바란 등 스페인화가의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프라도미술관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화가는 고야(100여 점이 넘는 유화가 소장되어 있다.) 프라도미술관이 자랑하는 주요 작품들은 대부분 2층에 전시되어 있다. 고야(Goya) /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L as menias) 모사(after Velazquez) 동판화/ 1778 Francisco de Goya y Lucientes(1746–1828)/ Las Meninas, after Velazquez 마드리드 궁정은 지난 17세기의 위대한 화가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많이 남아있던 곳으로, 옛 대가의 명성은 고야에게 존경심과 경쟁심을 함께 자극했을 것이다. 벨라스케스 역시 화가의 모습이 포함된 왕실초상화 <라스메니나스( L as menias) > 를 그렸는데,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그 크기도 흡사하다. 고야 (Francisco de Goya y Lucientes, 1746-1828) 는 <라스메니나스( L as menias) > 를 동판화로 모사하였는데, 왕족들을 이처럼 속물처럼 그리게 된 것도 왕실화가로서의 높은 자부심 때문이었는데, 고야의 이 왕실초상화에서, 권력자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버리지 않았던 벨라스케스의 유산을 보게 된다.
– <인간의 얼굴, 그림으로 읽기> 홍진경, 예담, 2002
–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라헐 판 코에이, 박종대 역, 사계절출판사, 2005
– <벨라스케스의 거울 1, 2> 페드로 J. 페르난데스 지음, 김현철 옮김, 대교베텔스만, 2004, 2006
– <벨라스께스 미스터리> 엘리아세르 깐시노, 정창 역, 북스페인, 2006
————————————————————- Pavane Pour Une Infante Defunte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작곡가, 라벨(Joseph Maurice Ravel) ————————————————————– 17세기의 이름 높은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끔찍하게도 사랑한 모리스 라벨 (Joseph Maurice Ravel, 1875-1937)은 흥겨운 관현악곡 <볼레로>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작곡가다. 그는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미술에도 역시 소양이 깊어 시적이고도 회화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그중 하나다. 라벨은 천재답게 루브르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그림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을 보고 감동한 나머지 24세 때 이 피아노곡을 썼다. 한편, 라벨은 62세에 죽기까지 이렇다 할 애인도 없이 오직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인생을 마칠 때까지 사춘기에 본 벨라스케스의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을 음악으로 즐겨 그렸다. 루브르 미술관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대리석 조각인 <밀로의 비너스> 외에 많은 여인상을 그린 미술품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라벨이 유달리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홀린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벨라스케스의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은 프랑스의 궁정화가 다비드의 작품보다 더 뛰어난 솜씨로 그지없이 우아하고도 신비롭게 그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색채와 구도에 있어 음악적인 요소가 푸짐해 라벨은 이 그림에서 얻은 영감을 피아노곡으로 꾸밀 수 있었다. 스페인에는 16세기의 일 그레코, 19세기의 고야, 그리고 20세기의 피카소, 달리, 미로 등 위대한 화가들이 많지만 그는 유달리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음악적인 영감을 얻었다. 그리스 신화에는 어떤 조각가가 스스로 만든 애인상에 반하여 그 조각을 애인 겸 아내로 삼고 일생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같이 작곡가 라벨에게는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이 고스란히 연애의 대상이 되었다. 벨라스케스가 온갖 정성을 쏟아서 그린,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의 모델이 된 바로 그 왕녀는 벌써 옛날에 세상을 떠났건만, 라벨은 그림 속의 왕녀를 영원히 살아 있는 인물로 느꼈다. 철학자 플라톤은 자기보다 2백여 년 전에 태어난 BC 6세기의 그리스 서정시인 사포를 짝사랑하여 일생동안 독신으로 살며 이 옛 여류 시인과 플라토닉 러브를 누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라벨이, 서민인 자기 신분과는 다른 왕녀를 영원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하나의 플라토닉 러브일 것이다. 그는 그림 속 왕녀의 기품 있는 얼굴이며 몸의 아름다움에서 남몰래 새로운 짝사랑의 대상을 발견했다. 라벨은 24세 때 피아노곡으로 작곡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11년 뒤 관현악곡으로 편곡했다. 이 편곡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일류 오케스트라들이 즐겨 연주하는가 하면 디스크도 굉장히 많이 나와 있다. 이젠 작곡자 라벨마저 저승으로 갔기 때문에 이 곡은 <죽은 라벨을 위한 파반느>로 둔갑했다고도 볼 수 있다. 라벨은 이미 학창시절에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와 미국 시인 에드거 앨런 포의 문학을 사랑하여 오리지널인 피아노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미술적인 여운과 함께 시적인 표현이 풍부한 관현악곡으로 편곡했다. 그는 30대 무렵인 20세기초 프랑스 화가 보나르와 매우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아틀리에를 자주 찾았다. 이 때문인지 편곡에는 오리지널 피아노곡보다 한층 풍부해진 미술적 색채가 넘쳐 흐른다. 한편, 파반느란 것은 느린 2박자의 춤곡으로, 16세기에 꽃피었다가 18세기 이후에 거의 잊혔다가 라벨이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을 음악으로 그리면서 되살아났다. 이 곡은 멜랑콜리하지 않게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데다 섬세한 화음이 인상적이다. 플루트 2개, 오보에 1개, 클라리넷 2개, 바순 2개, 호른 2개, 하프 1개에다가 약음기를 낀 현악 5부의 편성으로 되어 있는데 벨라스케스 그림의 색채보다 더 강렬한 초상을 그려준다. “라벨이 서민인 자기 신분과는 다른 왕녀를 영원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하나의 플라토닉 러브일 것이다. 그는 그림 속 왕녀의 기품 있는 얼굴이며 몸의 아름다움에서 남몰래 새로운 짝사랑의 대상을 발견했다” 이 곡의 실제 주인공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펠리페 4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마리안나의 딸인데 금발머리에 푸른 눈, 창백한 피부를 가진 매우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필리페 4세는 ‘나의 기쁨’이라 부르며 특별한 애정으로 아꼈다고 한다. 15살에 비엔나에서 레오폴드 1세와 정략결혼했으나 둘은 매우 사랑하였다. 출산과 유산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21살에 사망한 비운의 황녀 마르가리타 테레사. ‘파반느(Pabane)’ 란 음악의 하위장르의 하나로써 2박자 또는 4박자 춤곡의 일종이다. 16세기초 스페인의 느릿한 2박자 궁정무곡인데 18세기 이후에 거의 잊혀졌다가 라벨이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을 음악으로 그리면서 되살아났다. ‘공작새(pavo)’를 흉내 낸 기품 있는 자태의 춤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라벨의 ‘포레’ 존 다울랜드의 ‘파반느’가 유명하다. 라벨은 자신이 쓴 피아노곡들을 상당수 오케스트라곡으로 편곡해 원곡보다 더 사랑을 받고 있다. 1899년 피아노곡으로 작곡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도 그 중 하나이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선율미는 라벨의 음악이라고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섬세한 매력이다. 이 피아노곡은 원래 라벨이 에드몽 드 폴리냑(Edmondde Pollignac)공작부인을 위해 작곡되어 그녀에게 헌정한 곡으로, 전체 연주시간은 약 6분 정도이다. 이 피아노곡은 1902년 4월 국민음악협의회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그로부터 8년 뒤 1910년 라벨 스스로가 편곡한 관현악용 파반느는 12월25일 초연되어 피아노곡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라벨은 이 음악에 매우 엄격한 비판을 가하여 여러 가지 결점을 지적해 놓고 있다. – 월간미술, 김원구 음악비평, 죽은 왕녀를 위한 라벨의 서정시
그림을 사랑한 소설, 소설들 “그는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걸 주지 못하고 있다는 두려움으로 내 얼굴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트.’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그게 다였다.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래, 움직이지 마라.’ 그는 나를 그리려 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고 말하고 그가 그린 그림은 ‘진주 귀고리 소녀’. 그가 화폭에 담은 그림 속 그녀는 푸른 두건을 두른 채 몸을 옆으로 살짝 돌리고 정면(그러니까 우리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누구라도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멎을 듯, 숨이 막힌다.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맑고 촉촉한 큰 눈동자, 그리고 무심한 듯 살짝 벌린 입술. ‘움직이지 마라’고 말하고 그녀를 그린 그의 이름은 베르미르,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다. 캐나다의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여성은 젊은 시절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가, 미술관에서 이 화가의 이 그림을 보게 된다. 그녀는 유럽 여행 중에 그 그림뿐 아니라 수많은 걸작을 보았다. 그리고 돌아왔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한 편의 그림이 있었다. 바로 옆으로 몸을 살짝 돌린 채 무심히, 그러나 간절히 무엇인가를 호소하듯 그녀를 바라보던 맑고 촉촉한 큰 눈의 소녀, ‘진주 귀고리 소녀’. 그녀는 그림 속에 담긴 신비로운 표정의 소녀의 환영에 사로잡혀 자신의 방에 그 그림을 걸어놓고 15년을 동고동락한다. 그 끝에 그녀는 마침내 베르미르의 그림과 똑같은 제목의 또 다른 작품을 창조한다. 바로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가 그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전세계의 독자에게 ‘진주 귀고리 소녀’의 신비를 전한다. 소설은 다시 영상으로 옮겨져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똑같은 제목으로 스크린에 펼쳐진다. 17세기 북유럽 네덜란드에서 베르미르라는 화가가 그린 한 소녀의 초상은 21세기 북미의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여성 작가에 의해 소설로 다시 태어나고, 소설은 영국의 감독 피터 웨버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소설의 이야기와 그림의 풍경을 정교하고 아름답게 재현한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처럼 일상에서 멀리 떠나 낯선 장소에서 마주친 한 장의 그림으로부터, 또는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건네받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소설이 탄생하는 예는 소설사에서 종종 있는 일이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의 소녀’가 한 편의 그림으로부터 잉태되었다면, 한국의 젊은 작가 김연수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출발한다. “처음에 나는 그 사진이 남양군도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카우치 위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세상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담긴, 가장자리가 불에 그슬린 사진이었다. 불길의 자취는 사진 아래쪽에 반원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검은 그 반원의 양 옆으로는 ‘Pier…s 1895’라는 글자가 남아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 눈의 거리만큼 떨어진 한 쌍의 조리개로 찍은 흑백 누드사진 두 장이었다. 사진을 눈에서 멀찌감치 떼어놓고 두 사진이 서로 겹쳐지도록 만들면 그 가운데 환영처럼 여인의 나체가 입체적으로 드러났다.” 또 우리 시대의 유쾌한 이야기꾼 성석제의 단편 ‘욕탕의 여인들’은 아예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의 아름다운 그림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르누아르의 ‘목욕하는 여인들’로부터 소재를 빌려 쓴 소설로, 돈 많은 과부나 부잣집 여자를 만나 팔자 좋게 살아보려는 보통 남자의 로망을 그린다. 르누아르의 ‘바느질하는 여인’ ‘파라솔을 쓴 소녀’ 그리고 ‘도시에서의 춤’ 등 소설 갈피갈피에 제시되는 그림들은 독자에게 소설을 읽는 재미와 함께 미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의 첫 장 ‘바느질하는 여인’의 시작은 이렇다. “스무 살 무렵 내 꿈은 그 당시 유행하던 농담처럼 ‘돈 많은 과부하고 결혼해서 평생 놀고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과부가 대자연의 순리에 따라 나보다 일찍 죽으면 젊고 예쁜 여자를 새로 만나서 남은 인생을 구가하자는 아름다운 계획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타고난 난봉꾼이 아니고 그렇다고 구제불능의 게으름뱅이도 아니다. 나이 스무 살에 그따위 생각이나 하는 한심한 인간이라고 여길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 내가 먼저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고 대꾸해주고 싶다.” 그런가 하면, 남미 페루 출신으로 현대 스페인어권의 대표적인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성석제보다 한술 더 떠서 장편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노트’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에곤 실레의 그림을 병치하며 현대사회의 성과 사랑의 풍속도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간다. 인간 쾌락의 백과사전이라 불릴 정도로 에로티시즘의 정수로 꼽히는 이 소설은 낮에는 평범한 보험업자이지만, 밤에는 도색작가이자 예술 애호가이고, 그림 수집가인 리고베르토씨의 성적 환상이 투영되어 있다. 이야기는 루크레시아라는 여주인과 열네 살짜리 의붓아들 폰치토라는 소년, 그리고 그 아버지 리고베르토의 삼각구도로 진행되는데, 폰치토는 자신을 에곤 실레로 동일시하고, 아름다운 계모 루크레시아로부터 에곤 실레의 그림 속 여인들의 포즈와 분위기, 표정 등등을 포착한다. 남미 특유의 현란함에 천부적인 이야기꾼 요사의 예술적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 소설은 에곤 실레의 그림들과 맞물려 화려하고 퇴폐적이며 도발적인 분위기로 가득하다. 소설의 서두부터 독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크레시아 부인은 문을 열러 갔다. 문틈으로 보이는 루크레시아 부인은 산 이시드로 올리바르 공원의 허옇게 말라 비틀어진 나무들을 배경으로 서 있는 초상화 속 인물 같았다. 폰치토의 노란색 고수머리와 푸른 눈이 보였다.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박민규의 소설이 사랑한 그림, ‘라스 메니나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아니 ‘라스 메니나스’. ‘라스 메니나스’는 박민규 신작 장편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표지를 장식한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 그림의 제목이자 이 소설 첫 장의 제목이다. 세상의 모든 연애소설이 그렇듯 이 소설의 첫 문장 역시 짧고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이런 첫 문장들은 언젠가 한 번쯤 써본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언젠가 자신의 청춘의 어느 장면을 보는 듯 친숙하면서도 낯설다. “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었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그러니까 이 첫 문장 속의 ‘그녀’를 찾아가는 추억의 여행이자 추억 속의 ‘그녀’를 위한 헌사다. 그녀는 누구인가. 우리는 연애소설의 주인공들을 기억하고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마담 보바리’의 엠마 보바리, ‘롤리타’의 롤리타,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 ‘리진’의 리진…. 작가들은 소설의 여주인공을 창조하면서 절대미의 기준을 독창적으로 제시해왔다. 또한 우리는 연애소설의 공식도 잘 알고 있다. 세상의 남성들은 절대미의 그녀들을 가슴에 품고, 소유하려고 하고, 세상의 여성들은 절대미의 그녀들에 의해 은밀히 웃거나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첫 문장 ‘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다’는 연애소설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이야기를 쫓아가다보면 여주인공의 공식은 철저히 배반된다. 눈을 맞으며 서 있던 그녀라는 첫 문장의 실루엣은 우리의 가슴을 뒤흔들지만, 사실 그가 사랑한 그녀는 누구도 사랑할 것 같지 않은 못생긴 여자. 그러니까 이 첫 문장은 소설의 화자인 성공한 중년의 작가가 스무 살 무렵에 사랑했던 못생긴 그녀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못생긴 그녀를 떠올리게 한 것은 한 편의 음악,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다. 박민규가 제목을 따온 이 음악은 사실은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를 본 뒤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음악. 그러니까 태초에 ‘라스 메니나스’가 있었고, 그리고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있었고, 또 그리고 박민규의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있고, 그 소설의 첫 장 ‘라스 메니나스’가 있는 것이다. 소설을 둘러싼 원전(原典)의 출처가 서로 쫓고 쫓기듯이 맞물리며 퍼즐 맞추기처럼 보이는데, 이들로부터 하나의 모티브를 추출하자면, 세상의 눈부신 여자들 옆에 들러리 선 ‘못생긴 여자’다.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표지를 감싸고 있는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의 우리말 번역은 ‘시녀들’이다.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화를 17세기의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리는 아틀리에를 액자식으로 재현한 그림이다. 당시 유럽의 화가들은 왕실 또는 바티칸 소속으로 왕과 왕녀, 교황과 순교자들의 초상을 그리는 데 그들의 첫 번째 임무가 주어졌다. 그런데 이 벨라스케스는 당시의 관례와는 다르게 ‘왕녀 마르가리타’를 제목으로 하지 않고, ‘시녀들’을 내세웠다. (화가의 또 다른 그림으로 단독 초상화 ‘왕녀 마르가리타’가 그려져 유럽의 내로라하는 미술관 벽에 걸려 있긴 하다). 유럽의 왕궁에는 어린 왕녀의 시중을 들며 즐겁게 해주기 위한 구성원들이 있는데, 시녀들과 난쟁이 그리고 개가 빠지지 않는다. 박민규 소설의 여주인공 그녀는 화폭의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 왕녀 마르가리타의 시중을 들고 있는 시녀들, 그중에서도 그림 전면의 오른쪽 옆 구석에 서 있는 뚱뚱하고 못생긴 난쟁이 시녀로부터 환기된 스무 살 무렵의 첫사랑이다. “라벨을 듣는다. 또다시 재생되는 그날의 음악처럼 나는 그 벌판과…눈과…나무들과…그녀를 떠올린다.” 작가가 고백한 대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길고 긴 연서(戀書)를 쓰는 마음으로 ‘못생긴 여자와, 그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다룬 소설’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연애소설이나 영화, 그림 등 예술의 역사는 단 한 번도 못생긴 여자에 대해 눈길을 돌린 적이 없다고 단언하고, 이 소설이야말로 미(美)의 소수자들인 못생긴 그녀들을 위한 것이라고 과감하게 쓰고 있다. 그런데 벨라스케스가 ‘라스 메니나스’를 그린 17세기와는 달리, 현대 모더니즘의 역사는 고정된 미의 답습이 아니라 추(醜)의 이면에 깃들어 있는 숭고의 미를 발견해내는 혁명의 역사가 아니던가. 박민규의 희귀한 연애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니 어느 시인의 전언처럼 왼쪽 가슴께가 저며 온다. (후기: 소설을 읽는 내내 음악이 함께 했다.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아니다. 이 소설을 위한 백그라운드음반 ((BGM) Mushroom- ‘눈물’ ‘그런, 그녀’ ‘슈크림’ 어쿠스틱 기타연주 ‘눈물’. 추억의 결정(結晶)처럼 투명하고, 알싸하다. 음악이 흐르는 한,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박민규 지음/ 예담/ 2009년 – 함정임, 소설가 · 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함정임의 핫 픽션 터치] – 신동아, 2009.10.01 통권 601호(p638~642)
– Maurice Ravel / Pavane Pour Une Infante Defunte(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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