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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라트비아어: Latvija 라트비야 , 영어: Latvia, 문화어: 라뜨비야)는 북유럽에 있는 공화국으로서, 공식 명칭은 라트비아 공화국(라트비아어: Latvijas Republika 라트비야스 레푸블리카 , 영어: Republic of Latvia)이다. 북쪽은 에스토니아, 동쪽은 러시아, 남쪽은 리투아니아와 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발트 해와 리가 만에 닿아 있다. 수도는 리가(Riga)이다. 18세기부터 제정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립하였으나 1940년 8월 소련 에 강제 점령 병합되었다. 1991년 소련 8월 쿠데타 실패 후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독립국가연합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민족구성은 라트비아인이 58%이며,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국민소득의 48.6%를 서비스업이, 23.9%를 제조업이, 22.8%를 농업이 차지하고 있다.[1]
역사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라트비아의 역사 입니다.
기원전 2000년 경부터 핀우그르계의 리브인들과 레트족이라고 불리는 발트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말부터 독일인들이 리가만 연안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1201년 이들에 의하여 리가 시가 건설되었다.
1558년 러시아의 이반 4세가 리보니아 전쟁을 일으키자, 이 지역을 지배하던 독일 기사단은 라트비아를 리투아니아의 보호령으로 양도하였고, 1561년 리투아니아의 보호를 받는 리보니아 공국과 쿠를란트(Courland) 공국이 성립하였다.
그 후 1600년부터 1629년까지 이 지역을 둘러싸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이 전쟁을 벌였다. 스웨덴은 1621년 리가를 점령하였고, 1629년 리보니아 공국은 스웨덴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쿠를란트-젬갈레 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향 하에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예카프스 케틀레르스(Jekabs Ketlers) 공작이 지배하던 시대(1642-1682)에는 동방의 네덜란드를 만들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발전을 꾀하였다. 이 시기에는 쿠를란트 공국의 선단이 대서양을 누비고 다녔으며, 서인도 제도의 토바고와 아프리카의 감비아에 해외식민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1700년부터 1721년까지 계속된 스웨덴과 러시아 제국간 북방전쟁의 결과 리보니아 지역이 러시아의 지배에 들어갔고, 이어 쿠를란트 역시 1795년 폴란드 분할의 결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가 독일에 패하자,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라트비아는 농지개혁을 실시하고 경제, 문화, 교육 전반에 있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1934년에 일어난 쿠데타로 초대 대통령이었던 카를리스 울마니스(Kārlis Ulmanis)가 4대 대통령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2] 과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을 맺어 중앙유럽을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만들었다.[2][3] 이 의정서에서 라트비아는 소련의 영향권에 두기로 인정받았다.[3]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뒤, 소련은 1940년 6월 중순, 발트 3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소련의 내무인민위원회 요원은 라트비아의 국경 초소를 급습하였고,[4][5] 라트비아군을 몰아낸 뒤 소비에트 간부단으로 대신하였다.[4][6] 의회와 여타 정부 부처의 공직자를 뽑는 선거에서는 명부에 후보자가 한 명씩밖에 없었는데,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분 아래에 치러진 선거의 공식 결과에서 친(親)소련 후보가 97.6%의 표를 얻었다.[4][7] 그렇게 구성된 의회는 곧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소련의 승인을 얻어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4] 국제 사회는 소련의 발트 3국 병합을 불법으로 보고 비난하였다.[8][9]
1941년 6월 하순에 나치 독일군은 소련군을 몰아내고 1944년까지 라트비아를 점령했다.
소련으로의 편입 과정에서 약 13만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외국으로 망명하였고, 1953년까지 약 12만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죽거나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한편 약 75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러시아보다 산업환경이 좋은 라트비아로 이주하여, 라트비아인의 비율은 총인구의 52% 선으로 감소하기에 이르렀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였다. 1999년에는 제6대 대통령으로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Vaira Vīķe-Freiberga)가 선출되어 라트비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으며, 친미, 친서방 정책을 펴고 있다. 2012년 2월에 러시아어를 제2의 공용어로 지정하는 것을 정해놓은 투표가 실시되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러시아어를 제2의 공용어로 지정하는 것에 반대표를 던졌다.[10][11] 2012년 8월 28일에 라트비아의 국방장관이 소련군 기념비를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계 정치인들이 반발했다.[12]
행정 구역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라트비아의 행정 구역 입니다.
라트비아는 2009년 7월 1일을 기해 새로 개편된 행정 구역에 따라 110개 지방 자치체(라트비아어: novadi)와 9개 직할시(라트비아어: Republikas pilsētas)로 나뉜다.
지리 [ 편집 ]
발트 해 동쪽에 있는 라트비아는 동유럽 평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국토 전체가 매우 평탄한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저지대로, 비옥하며 숲이 우겨져 있다. 주위에는 다우가바 강, 리엘루페 강, 가우야 강이 있다. 해안선의 길이는 총 531km이다.
기후 [ 편집 ]
습윤한 대륙성 기후이다. 그러나 발트 해와 접하고 있어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띤다. 여름에는 따뜻하고 봄과 가을에는 아주 온화하지만 겨울은 북쪽에 있어 다소 춥다. 강수량은 8월에 가장 많다. 러시아 일대의 북쪽 기압골의 영향으로 겨울이 되면 칼바람이 몰아치거나 눈보라가 치는 일도 많으나, 북위 60도에 가까운 위도를 감안하면 상당히 기온이 높은 편으로 같은 위도의 러시아 내륙에 비하면 훨씬 따뜻하다.
주민 및 인구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라트비아의 인구 입니다.
2011년 시점에서 주민은 라트비아인이 62.1%, 러시아인이 26.9%, 벨라루스인이 3.7%, 우크라이나인이 2.3%, 폴란드인이 2.4%, 리투아니아인이 1.4%, 라트갈레인인 포함한 기타가 2%이다. 300여명 정도 밖에 남아 있지않은 소수 민족 리보니아인도 대부분이 라트비아에 산다.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2005년 현재 1.29명이다 [1]. 1998년에는 1.1명까지 떨어진 적도 있었다. 2005년 현재 천명당 출산율은 9.3명, 천명당 사망율은 14.2명이어서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무국적자 문제 [ 편집 ]
라트비아 이민귀화국에 의하면, 라트비아인구는 약 230만명이지만, 라트비아 국적자는 약 180만명, 외국 국적 보유자가 3〜4만명이다. 그리고 나머지 약 45〜50만명의 소련 시절부터 귀화하지 않고 영주해 온 이민은 무국적자로 취급되고 있다. 그들은 문자그대로 국적이 어느 나라인지도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 시절의 라트비아에서 태어나서 한번도 외국으로 나간 적이 없는 경우에도, 귀화하지 않는 한 라트비아 국적자가 될 수가 없고, 다른 나라의 국적보유조건이 충족되어 있는 것도 아닌 것 또는 생활의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을 희망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나라에게나 국민으로서의 취급을 받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선거권을 시작으로 한 다양한 시민권행사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며, 인도적인 관점에서 라트비아에서 가장 중대한 정치문제의 하나로 해결을 갈망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러시아(무국적자의 대부분은 러시아계 주민)뿐만 아니라 유럽의 인권담당기관으로부터도 여러 번에 걸쳐서 개선을 재촉받고 있지만, 비라트비아계 주민의 라트비아 사회로의 귀화에 위기감을 가지고 있는 라트비아 당국은 아직까지도 해결책을 보이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한편으로 무비자로 러시아 방문이 가능하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역사적 사실로서는, 1991년에 라트비아가 소련으로 독립한 때에 소련으로의 병합(1940년)이전의 국민과, 그 직계자손으로만 자동적으로 라트비아국적의 여권이 수여되었다. 그 이외의 소련 시절에 라트비아로 이민온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한 러시아인에게 수여되지 않았지만,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러시아인 자녀에게는 한쪽 부모의 요청만으로 국적이 부여되어 있다. 그들은 귀화하지 않고 계속 영주해서 소련 정부가 발급한 여권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1997년부터 라트비아 정부가 발급한 Alien Passport(무국적 여권)으로의 전환이 의무로 지게 되어 무국적자라고 정의되게 되었다.
언어 [ 편집 ]
라트비아는 다민족, 다언어국가이지만 라트비아어가 라트비아의 국어, 공용어이다. 독립 직후부터 라트비아어의 사용을 의무화하는 등 민족주의적인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라트비아어가 공용어이나, 리가 등 도시에서는 러시아어 사용자(러시아인, 벨라루스인 등)가 많고 높은 러시아어 사용률에 의해서 러시아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81.2%의 주민이 러시아어에 능통하며, 37.5%가 모국어로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있다. 수도인 리가에서도 러시아어 사용자가 시 인구의 절반에 달한다. 그 때문에 러시아인들과 갈등을 겪고 있다.
모어화자의 비율은 공용어인 라트비아어가 58.2%, 러시아어가 37.5%이다. 라트비아인의 71%가 러시아어를 말할 수 있으며, 러시아인의 52%가 라트비아어를 말할 수 있다. 국적 취득의 조건에 라트비아어 습득이 의무로 지게 되어 있어서, 러시아계 주민에 의한 라트비아어 화자가수가 증가했다.
발트 3국 중에서 가장 러시아인이 많기 때문에, 러시아어 인구도 많다. 특히 수도 리가에서는 인구의 41.7%(2008년)의 러시아인이며, 인구의 절반 가까지를 차지하며, 라트비아인(42.3%)과 거의 같은 수가 되고 있다. 러시아어 이외의 외국어 습득률도 높다. 세대에 의해서 말할 수 있는 언어가 다르며, 중고년층은 러시아어, 라트비아어에 더해서 독일어가, 청소년층은 러시아어, 라트비아어와에 영어를 말할 수 있는 비율이 높지만, 청소년은 독일어를 말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젊은 세대나 지방에 사는 라트비아인을 중심으로 러시아어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늘고 있지만, 여전히 러시아어의 존재는 매우 크다. 영화관이나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자막이 병기되어 있으며, 라트비아에서 출판, 발행되는 신문이나 잡지에 있어서도 라트비아어판과 러시아어판이 존재하는 경우도 다수있다.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러시아어판쪽이 종류와 양 모두 풍부하다.
이들 사실은 지금도 예전 점령국의 모어가 자국에서 많이 활개치고 있다고 느끼는 라트비아계 주민에게 있어서는 위협이다. 한편으로 라트비아어가 국제언어로 통용되지 않는 동안, 최근의 러시아, CIS여러나라의 경제활동의 활성화를 배경에 그 지역에서 러시아어를 습득하는 경우는 영어를 공부하는 것과 함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라트비아계 주민도 있으며, 러시아에 대한 태도는 다른 라트비아계 주민과 똑같지 않다.
라트비아 국내에서 취직하는 경우에 조차 그다지 전문성, 국제성을 따를 수 없는 단순한 직종이라도, 고객의 3〜50%가 러시아어 화자라는 상태이기 때문에, 라트비아어에 더해서 러시아어를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취직조건이 되는 경우도 많고, 일상생활에서는 라트비아어밖에 말하지 않는 경우라도 러시아어를 공부한다.
라트비아에 진출하는 외국기업도, 현지에서 다국어를 말하는 비율이 높은 것(기본은 라트비아어, 러시아어 + 다른 언어)을 바탕으로 현지로 진출한 뒤에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정도 러시아어가 쉽게 영향력을 잃지 않는 요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 본국은 물론, 러시아어권이라고 부르는 나라, 지방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이며, 관광객이나 새로운 사업획득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또, 서방측의 자본도 라트비아를 EU내에서 러시아와의 창구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라트비아는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되고 있다.
화자는 소수이지만 서부에서는 라트비아어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라트갈레어가 사용된다. 또한 핀우그르계의 토착소수민족인 리보니아인이 사용하는 리보니아어도 있으나, 2013년에 마지막 화자의 사망으로 제2모국어로 쓰는 사용자들을 제외하면 소멸되었다. 라트갈레어, 리보니아어는 법률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고 있다. 그 외에도 리투아니아어, 독일어 등이 일부 사용된다.
종교 [ 편집 ]
종교 구성 (라트비아) 루터교 34.3% 가톨릭교 25.1% 정교회 19.4% 그 외 기독교 1.2% 그 외 및 무종교 20%
과거 라트비아인은 스웨덴과 독일 북부의 영향으로 개신교의 루터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련 통치와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루터교 신앙은 크게 위축되었다. 루터교 신도가 가장 많으며, 소련 시절 러시아인의 이주가 많았으므로, 러시아 정교회 신도도 상당수 남아 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향으로 남부지방에는 로마 가톨릭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정교회 교단으로 라트비아 정교회와 라트비아 자치 정교회가 존재한다.
경제 [ 편집 ]
서비스업이 라트비아 경제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데, 교육, 행정, 교통과 통신, 소매와 도매상에 관련된 일들이다. 공업에는 라트비아 근로자들의 6분의 1 적게 고용되어 있으며, 섬유와 의류, 교통 수단, 목재 제품의 공업과 식품 가공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인구의 10분의 1은 농업에 종사하는데, 소와 염소를 사육하고 감자, 보리, 귀리, 밀, 호밀 등을 생산한다.
통신 [ 편집 ]
다른 발트3국과 같으며, 도시에서는 인터넷접속환경이 잘 정비되어 있다. 특히 공중무선인터넷접속망은, 리가를 중심으로 접속가능지역이 급속히 확대되어 있는 것외에, 광섬유망도 정비되기 시작되고 있다.
군사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라트비아의 군사 입니다.
이 나라의 방위는 국방부(Latvijas Nacionālie bruņotie spēki, 약칭 NBS)가 맡는다.
육군 (Latvian Army)
국가방위대 (Zemessardze, 영어로 National Guard)
해군 (Latvijas Jūras Spēki, 영어로 Latvian Naval Forces)
공군 (Latvijas Gaisa spēki, 영어로 Latvian Air Force)
국경 경비대 (Border Guards)
문화 [ 편집 ]
공휴일에는 다채로운 전통 의상을 입고 축제를 벌이는 편이다. 라트비아인들은 민속 특히 민요에 깊은 전통을 담고 있다. 아이스하키가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이며, 그 외에도 썰매 종목(봅슬레이, 스켈레톤)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라트비아의 대표적인 스포츠 선수로는 스켈레톤 선수인 토마스 두쿠르스, 마르틴스 두쿠르스가 있다. 많은 라트비아인들은 발레, 오페라, 드라마 등을 즐기는 편이다.
외교관계 [ 편집 ]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은 라트비아와 1991년 수교하였다. 2015년 9월 15일 주한라트비아대사관 이 개관하였다. 라트비아가 발트3국 중 처음으로 한국에 주한공관을 낸 것이다.
러시아와의 관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소련의 공화국으로 합병되었던 역사적인 이유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와는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으며, 소련으로부터 합병된 압레네 지역으로 인해 러시아와 갈등을 겪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이를 경계하기 위해 북대서양 조약기구 및 유럽 연합에 가입을 하였다.
그 외의 나라와의 관계
에스토니아나 리투아니아와의 관계도 좋은 편이며, 이 외의 각 서방 국가와도 좋은 관계이다.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라트비아 [ 편집 ]
대한민국 [ 편집 ]
해외 [ 편집 ]
라트비아(Latvia)
통계 자료
국명: 라트비아공화국
면적: 64,589평방km
인구: 262만
수도: 리가(인구874,100)
인종: 라트비아인 57%, 러시아인 30%, 벨라루스인 4%, 우크라이나인 3%, 폴란드인 3%
언어: 라트비아어, 러시아어, 소수민족언어들
종교: 루터교, 로만카톨릭, 러시아정교
정체: 공화국
지리 및 기후
라트비아의 지리적 위치와 면적은 발틱 국가들에서 중간에 해당한다. 북쪽의 에스토니아 보다 크고 남쪽의 리투아니아 보다는 작은데, 하여튼 발트 3국은 동쪽의 이웃나라인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비해 아주 작다. 서쪽과 북서쪽으로는 발트해와 접해 있고, 발트해 안쪽으로 엄지손가락 모양의 리가만이 라트비아 북부 해안 쪽으로 들어와 있다. 동부 라트비아의 비제메(Vidzeme)고지에는이 나라에서 제일 높은 지점인 가이지나 칼른스(Gaizina kalns)가 있으며, 그 높이는311m이다. 라트비아의 약 40%를 차지하는 산림지대에는 엘크, 사슴, 야생멧돼지, 여우, 스라소니, 불곰 등이 많이 살고 있다. 내륙 운하에는 비버와 수달피, 해안가에는 물개가 산다. 또한 라트비아는 흰 황새 6500쌍의 서식처이다(서유럽 전체의 흰 황새 숫자 보다 6배 많다). 리가의 서쪽 가우야강 계곡에 라트비아 유일의 국립공원이 있다. 수많은 자연보호지가 있고 그 중 3곳이 서부 라트비아의 쿠르제메(Kurzeme)에 있다. 11월 초부터 해동기인4월까지는 기온이 섭씨4도 이상 거의 오르지 않으며, 하루에 겨우 몇 시간 밖에 해가 나지 않는다. 6월에서 8월의 낮 시간에는 보통 14도에서 22도 정도까지 기온이 오른다. 7월과 8월은 가장 더운 시기이지만 소나기가 지속적으로 온다.
역사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지는 적어도 BC 9000년이지만, 현재 라트비아주민의 첫 시조는 아마도 BC3000년에서 2000년 사이에 들어온 피노-우그리족 수렵인으로 추정된다. 현대 라트비아인의 조상들인 발트 족은 BC 2000경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기원후 몇 세기 동안 이 지역의 부족들은 게르만족 및 로마제국과 상거래를 했다. 그 후 그들은 바이킹과 러시아인들과 때로는 무역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을 하기도 했다. 12세기까지 피노-우그리족과 발트 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졌고 모두 자연숭배의 종교의식을 행했다. 로마교황의 북구 이교도에 대항한 십자군 소집령에 따라 게르만 선교단이 이 지역에 들어오지만, 13세기까지 성과는 별로 없었다. 리보니안 결사단(Livonian Order)이라 알려진 붉은 검과 십자가 문장이 그려진 흰 망토를 입은 십자군단이 1290년까지 이 지역을 강제로 개종시킨다. 라트비아는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끊임없이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발트 지역에서 개신교 스웨덴과 카톨릭인 폴란드-리투아니아간의 다툼은1592년 진정된다. 리가를 포함한 라트비아 동부 대부분은 스웨덴의 지배에 들어간다. 스웨덴의 통치기는 압제에 시달리던 라트비아의 긴 역사에서 문명화 기회를 갖게 한 호의적인 일로 회고되고 있다. 17세기 스웨덴 왕은 농노신분의 라트비아 농부들에게 보통교육을 시켰다. 라트비아인에게 교역, 전문직업, 상업, 지적인 영역 등에 참여를 허용함으로써, 농노해방은 라트비아의 민족적 회생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말 러시아화 정책의 비우호적이고 억압적인 과정에도 불구하고 라트비아는 서서히 스스로 주권을 갖는 자주국가로 부상했다. 라트비아는 세계 2차대전시 독일에 점령되었으나,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바로 7일전인 1918년 11월 18일, 농부, 중산층, 사회주의자 그룹이 독립을 선언하였고 농민당의 지도자 카를리스 울마니스(Karlis Ulmanis)가 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자와 볼셰비키 및 발틱 독일정당 사이의 분쟁은 러시아가 라트비아 공화국과 영속적인 독립을 보장한다는 평화조약을 맺는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1930년대 초 라트비아는 권위주의로 빠지고 1939년 8월23일(나치독일과 소련이 불가침협정을 체결하였을 때) 소련의 영향권 밑에 들어간다. 1940년 8월까지 소련의 군사점령 하에 있었고, 공산당은 ‘선거’에 승리하며 라트비아는 소비에트연방에 속하는 하나의 공화국으로 ‘받아들여’진다. 전제국가화와 숙청이 시작되고 일 년 안에 3만5천의 라트비아인이 사형, 추방, 혹은 망명한다. 독일이 소련을 침입하였고 1941년 라트비아를 점령한다. 많은 라트비아인들이 나치를 해방자로 생각하였고 독일군대에 지원하지만 라트비아의 유태인 9만 명은 거의 모두 처형되었다. 많은 라트비아인이 1944년과 1945년 붉은 군대의 재 점령을 피해 서방으로 망명하기도 하였지만, 2세계대전 당시 총45만에 가까운 라트비아인이 손실되었다. 그리고 1945년-1949년 스탈린 치하에서 17만5천이 사형 혹은 강제추방 당했다. 소련의 가혹한 라트비아지배가 다소 느슨해지는 최초의 조짐은 1980년 후반 미하엘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재건)를 고무하기 시작했을 때이다. 수 십 년간의 쓰라린 울분이 자치를 요구하는 대중집회로 나타났다. 1988년 라트비아 정부요원들이 대중집회와 정치모임에 참가하였고, 한편 민주적인 개혁을 위한 전면적인 압력은 대규모의 호응을 얻었다. 1990년 봄 민족주의자들은 라트비아국회에서 다수당이 되며, 2차 세계대전 이전의 헌법을 회복시키고 완전한 독립을 위한 과도기를 선포한다. 1991년 초 국민투표의 결과에서 다수가 소비에트연방에서 탈퇴하기를 원하였고,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에 대항한 쿠테타가 일어난 이틀 뒤인 8월 21일 라트비아는 완전한 독립국가임을 선포한다. 이는 서방국가들의 지지를 받았고 1991년9월 6일 마침내 소련도 독립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2주가 지나지 않아 라트비아는 UN에 가입한다.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지는 적어도 BC 9000년이지만, 현재 라트비아주민의 첫 시조는 아마도 BC3000년에서 2000년 사이에 들어온 피노-우그리족 수렵인으로 추정된다. 현대 라트비아인의 조상들인 발트 족은 BC 2000경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기원후 몇 세기 동안 이 지역의 부족들은 게르만족 및 로마제국과 상거래를 했다. 그 후 그들은 바이킹과 러시아인들과 때로는 무역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을 하기도 했다. 12세기까지 피노-우그리족과 발트 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졌고 모두 자연숭배의 종교의식을 행했다. 로마교황의 북구 이교도에 대항한 십자군 소집령에 따라 게르만 선교단이 이 지역에 들어오지만, 13세기까지 성과는 별로 없었다. 리보니안 결사단(Livonian Order)이라 알려진 붉은 검과 십자가 문장이 그려진 흰 망토를 입은 십자군단이 1290년까지 이 지역을 강제로 개종시킨다. 라트비아는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끊임없이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발트 지역에서 개신교 스웨덴과 카톨릭인 폴란드-리투아니아간의 다툼은1592년 진정된다. 리가를 포함한 라트비아 동부 대부분은 스웨덴의 지배에 들어간다. 스웨덴의 통치기는 압제에 시달리던 라트비아의 긴 역사에서 문명화 기회를 갖게 한 호의적인 일로 회고되고 있다. 17세기 스웨덴 왕은 농노신분의 라트비아 농부들에게 보통교육을 시켰다. 라트비아인에게 교역, 전문직업, 상업, 지적인 영역 등에 참여를 허용함으로써, 농노해방은 라트비아의 민족적 회생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말 러시아화 정책의 비우호적이고 억압적인 과정에도 불구하고 라트비아는 서서히 스스로 주권을 갖는 자주국가로 부상했다. 라트비아는 세계 2차대전시 독일에 점령되었으나,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바로 7일전인 1918년 11월 18일, 농부, 중산층, 사회주의자 그룹이 독립을 선언하였고 농민당의 지도자 카를리스 울마니스(Karlis Ulmanis)가 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자와 볼셰비키 및 발틱 독일정당 사이의 분쟁은 러시아가 라트비아 공화국과 영속적인 독립을 보장한다는 평화조약을 맺는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1930년대 초 라트비아는 권위주의로 빠지고 1939년 8월23일(나치독일과 소련이 불가침협정을 체결하였을 때) 소련의 영향권 밑에 들어간다. 1940년 8월까지 소련의 군사점령 하에 있었고, 공산당은 ‘선거’에 승리하며 라트비아는 소비에트연방에 속하는 하나의 공화국으로 ‘받아들여’진다. 전제국가화와 숙청이 시작되고 일 년 안에 3만5천의 라트비아인이 사형, 추방, 혹은 망명한다. 독일이 소련을 침입하였고 1941년 라트비아를 점령한다. 많은 라트비아인들이 나치를 해방자로 생각하였고 독일군대에 지원하지만 라트비아의 유태인 9만 명은 거의 모두 처형되었다. 많은 라트비아인이 1944년과 1945년 붉은 군대의 재 점령을 피해 서방으로 망명하기도 하였지만, 2세계대전 당시 총45만에 가까운 라트비아인이 손실되었다. 그리고 1945년-1949년 스탈린 치하에서 17만5천이 사형 혹은 강제추방 당했다. 소련의 가혹한 라트비아지배가 다소 느슨해지는 최초의 조짐은 1980년 후반 미하엘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재건)를 고무하기 시작했을 때이다. 수 십 년간의 쓰라린 울분이 자치를 요구하는 대중집회로 나타났다. 1988년 라트비아 정부요원들이 대중집회와 정치모임에 참가하였고, 한편 민주적인 개혁을 위한 전면적인 압력은 대규모의 호응을 얻었다. 1990년 봄 민족주의자들은 라트비아국회에서 다수당이 되며, 2차 세계대전 이전의 헌법을 회복시키고 완전한 독립을 위한 과도기를 선포한다. 1991년 초 국민투표의 결과에서 다수가 소비에트연방에서 탈퇴하기를 원하였고,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에 대항한 쿠테타가 일어난 이틀 뒤인 8월 21일 라트비아는 완전한 독립국가임을 선포한다. 이는 서방국가들의 지지를 받았고 1991년9월 6일 마침내 소련도 독립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2주가 지나지 않아 라트비아는 UN에 가입한다. 경제
국내 총생산 GDP : US$ 337 억
1인당 국내 총생산 GNP : US$ 11,895
연성장률: 6%
인플레이션: 7.4%
주요산업: 식품, 목재가공, 섬유, 농업
주요무역상대국: 러시아, 독일, 스웨덴, 리투아니아, 핀란드, 영국
문화
국제적으로 알려진 라트비아 예술가나 작품은 거의 없다. 이 나라의 문학은 19세기 안드레이스 품푸스(Andrejs Pumpurs)가 민속전래이야기에 바탕을 둔 민족서사시인 곰살해자라는 뜻의 라츠플레시스(Lacplesis)로 시작되었다. 만약 훨씬 덜 모호한 언어로 글을 썼다면 라트비아문학의 거장인 야니스 라인스(Janis Rainis)는 세익스피어나 괴테 만큼 인정받았을 것이라고 라트비아인들은 주장한다.다이나스(dainas)라고 알려진 라트비아의 운문은 종종 짧고 시적이며 일본의 하이쿠(haiku)와 비교된다. 19세기에 민족서정시와 노래의 방대한 집성이 크리스야니스 바론스(Krisjanis Barons)에 의해 이루어졌다. 실제로 140만 민족서정시와 3만 곡의 노래가 라트비아어로 쓰여졌다. 최초의 주요 라트비아의 화가는 야니스 로젠탈스(Janis Rozentals)로 20세기 초에 농촌풍경과 초상화들을 그렸다. 빌헬름스 푸르비티스(Vilhelms Purvitis)와 야니스 발터스(Janis Valters)는 당시의 탁월한 풍경화가였다. 라트비아 집시사회의 지도자인 카를리스 루데비치(Karlis Rudevics)는 그가 번역한 집시의 시와 전설의 영감을 받은 뛰어난 회화작품으로 유명하다. 라트비아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발틱어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두 언어 중 하나이며, 라트비아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로 생각하고 있다. 라트비아의 국민 중 단지 반 정도만 제일언어로 라트비아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서부와 동부는 방언이 심해 중부의 표준 라트비아어와는 많이 다르다.라트비아인은 레트(Letts or Latgals), 셀로니아(Selonians), 세미갈리아(Semigallians), 쿠우르(Cours) 등의 부족을 조상으로 한다. 7대 도시에서 라트비아족이 러시아인 보다 수적으로 열세하다. 20만 라트비아인이 주로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독일, 영국, 미국 등의 서방국가에 살고 있다.. 라트비아에서는 훈제음식(특히 생선)과 낙농제품, 계란, 감자, 곡물이 대중적이다. 훈제된 넙치, 장어, 청어, 정어리 등이 주식을 이루는 음식들이고 특별히 저장 처리된 칠성장어는 라트비아의 진미음식이다. 스프와 소시지 역시 대중적이다. 여름과 가을에는 신선한 열매로 만든 파이와 케이크가 풍성하다. 라트비아의 주요 맥주는 알다리스(Aldaris)이지만, 가장 마셔보고 싶은 술은 진하고 독한(45도)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으로 불쾌할 정도로 강한 맛을 지닌 흑색 혼합음료이다. 이것은1755년부터 라트비아에서 유일하게 제조되고 있다. 축제 및 행사
1873년 라트비아에서 첫 번째 국가적인 음악제(Song Festival)가 열린 이래 연중행사 중 가장 감동적인 행사의 하나로 발전해왔다. 축제는 매5년마다 열리는데 대규모 합창단이 수도에 있는 거대한 야외원형극장에서 노래할 때 그 절정에 이른다.큰 행사인 하지 축제는6월 23일에 시작하는데 사람들은 이때 시골의 호수나 소나무 숲에 모여 축제를 벌인다. 특별한 맥주, 치즈, 파이 등을 마련하며, 풀을 엮어 만든 화환을 매달아두는 한편, 행운을 가져오고 사악한 영혼으로부터 가족을 지켜준다고 믿는 꽃과 향내 나는 풀을 집 주변에 달아 둔다. 가다티르구스(Gadatirgus)는 대규모의 미술 및 공예전시회로 6월 첫 째 주 리가에서 열린다. 음악, 댄스, 전시회, 퍼레이드 등의 행사가 있는 발틱국제민속제(Baltika Annual International Folklore Festival)는 1987년부터 발틱 국가들의 수도에서 돌아가며 개최되고 있으며 보통 6월 중순 일주일 동안 열린다. 다음 행사는 2000년 리가에서 열린다.그 외의 음악제로는 국제오르간음악제(International Festival of Organ Music)가 수도에서 6월에 있다. 오페라음악제(Opera Music Festival)가 7월 시굴다(Sigulda)에서, 고대음악제는 8월 바우스카(Bauska)성에서, 리이파야의 록음악제(Liepajas Dzintars)는 8월 중순 리이파야에서 열린다. 8월14일에서 16일 사이 아글로나(Aglona)에서 로만카톨릭의 최대 행사인 예수승천일(Ascension Day)축하행사가 있다.
여행자 정보
비자: 체코, 덴마크, 에스토니아, 핀란드, 헝가리,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리투아니아, 노르웨이, 폴란드, 스웨덴, 영국 등의 시민권자를 제외한 모든 나라 사람들은 비자가 필요하다. 건강상 유의사항: 진드기에 의한 뇌염에 주의(만약 숲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생각이라면 예방주사 맞기를 권한다.)
시간대: 그린위치 표준시 보다 2시간 빠르다.
전압: 220볼트, 50헤르츠
도량형: 미터법
관광객: 일년에10만 명 이상
경비 및 환전
통화: 라츠 Lats (plural: lati)
일반경비:
일반경비:
저렴한 식사: US$2-10
중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US$10-25
최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US$25 이상
저렴한 숙박: US$3-20
중급호텔: US$20-80
고급호텔: US$80 이상
스칸디나비아국가와 비슷한 물가를 고려하면 라트비아 여행은 꽤 비싼 편이다. 아마도 숙박비지출이 가장 클 것이다. 다행히 육상교통비는 아직까지 저렴한 편이다. 빠듯하게 예산을 잡은 여행자라면 하루에 US$30로 그럭저럭 지낼 수 있지만, 몇 번 식당에 가거나 안락한 숙박을 한다면 쉽게 그 두 배의 비용이 든다. 라트비아에서 호화롭게 지내려면 여느 서유럽 나라들과 비슷한 비용이 든다. 여행자수표의 현금화는 리가, 다우가프필스(Daugavpils), 시굴다 등의 도시바깥에서는 어려울 수 있지만, 모든 도시에서 부동화폐를 교환할 수 있다. 미국 달러와 독일 마르크는 가장 쉽게 환전할 수 있으며, 발틱 국가나 서유럽 화폐도 환전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현금자동지급기, 상점, 레스토랑, 호텔 등에서 주요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 라트비아에서는 18%의 부가가치세가 붙기 때문에 가격에 부가가치세가 포함되어 있는지를 주의하여 살펴야 한다. 팁은 의무사항이 아니지만 계산서를 반올림하여 웨이터에게 5내지10%의 팁을 주는 것이 관례이다. 만일 웨이터가 잔돈이 없다고 하면서 팁을 주도록 유도하면 카운터에 지불해서는 안 된다. 벼룩시장에서는 흥정을 할 수도 있지만 에누리는 약간 밖에 할 수 없다.
여행 시기
봄에서 여름(4월부터9월)사이가 가장 좋은 여행시기이다. 이때가 좋은 날씨, 긴 낮 시간, 신선한 음식, 나라전체에서 열리는 많은 민속제를 즐길 수 있는 시기이다. 질척거리고 추운 이 기간 전후의 몇 주를 꺼려하지만 않는다면 이 때가 야외활동을 하기에 최적의 날씨이다. 겨울(11월부터 3월말까지)은 아주 혹독하게 추울 수도 있으나, 연극공연과 음악회가 많이 열리고 스키어들에게 더 없이 좋은 때이다. 7월과 8월은 여행성수기이므로 호텔은 자주 완전히 만원이 된다. 주요 여행지
리가(Riga)
리가는 다른 발틱국가의 수도인 탈린이나 빌니우스처럼 예쁘지도 건축학적으로 흥미롭지도 않지만, 대단히 활기찬 대도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도시에는 러시아인의 수가 라트비아인을 능가하기 때문에 인종간의 긴장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을 알아 차릴 수 있다.리가는 다우가바(Daugava)강 양쪽에 위치하며 도시의 입구인 리가만의 남동쪽 모서리에서 약15km 떨어져있다. 수세기전의 게르만양식 건물들이 역사구역인 옛날 리가 베츠리가(Vecriga) 전역을 덮고 있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성 피터교회의 나선모양 탑을 오르면 이 곳 여행의 하이라이트 가운데 하나인 주변경치를 공중에서 볼 수 있다. 1330년 리보니안결사단(Livonian Order)의 본부로 리가성은 지어졌었지만 지금은 라트비아 대통령의 거처이다.리가의 구시가지 동쪽에는 19세기풍의 공원과 넓은 가로수길이 있다. 1935년 세워진 자유의 기념물(Freedom Monument)은 이 지역의 상징이다. 옛 리가를 둘러싸고 있는 신시가지는 19세기와 20세기 초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이 혼재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옛 리가의 남쪽에는 체펠린기구비행기의 격납고가 여러 곳 있었고, 활기 넘치는 중앙시장은 현대 도시생활의 중심이자 생활수준을 알 수 있는 적절한 기준이 된다.2차대전때 리가의 유태인 강제이주지구는 마스카바스(Maskavas) 교외에 있었는데 지금은 리가의 유일한 유태교회와 유태인 박물관이 이 곳에 있다. 옛 리가의 동쪽8km 지점에 있는 자동차박물관을 놓치지 말고 보기를 권한다. 고르키, 스탈린, 후루쉬초프, 브레즈네프 등 과거 소련지도자들이 소유했던 자동차들과 존경 받지 못하는 그들의 실물크기 모형들이 볼만하다.여름이면 돔광장(Doma laukums)으로 테이블과 의자들이 쏟아져 나와서 광장은 값싼 카페, 맥주노점, 심야 바 등이 가득채워지는 유흥장소로 바뀐다. 리가에서 외식을 결정하기가 어렵지만 진정옛날 분위기로 돌아가고 싶다면, 옛 리가에 신선하지 않은 빵, 플라스틱 컵, 충충한 갈색벽, 굉장히 싼 가격의 보드카 등이 있는 소련스타일의 카페가 있다.
유르말라(Jurmala)
해변이란 이름의 유르말라는 리가의 서부해안을 따라 20km 이어져 있는 일련의 작은 마을과 휴양지들을 포함한다. 해변, 모래언덕, 숲, 박물관, 미술관, 레스토랑, 펍, 여인숙 등이 있어, 잠시 쉬며 노독을 풀기에는 최고이다. 게다가 전혀 혼잡하지않고 가기도 쉽다. 리가에서 한 시간에 여러 번의 기차편이 있고, 리가 기차역의 정면에 유르말라를 오가는 특별 택시가 있다. 만일 차를 몰고 유르말라에 가면 통행세를 지불해야 한다.
시굴다 (Sigulda)
이 지방에서 ‘라트비아의 스위스’라고 알려진 시굴다와 그 주변은 줄지어선 위풍당당한 중세의 성들과 가우야계곡의 가장 아름다운 지류를 따라 흩어져있는 전설을 지닌 동굴들이 멋있는 경치를 뽐낸다. 시굴다는 가우야국립공원의 주진입로이며 미성년자를 위한 건강휴양지이자 동계스포츠의 중심지이다. 옛 시굴다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옛날 십자군 기사단이 거주했던 곳에 19세기에 새로 지어진 시굴다성은 지금은 요양소로 쓰인다. 구트마니스 (Gutmanis)동굴과 빅토르의 동굴은 지역 민속학연구에 중요하다. 시굴다는 리가 동쪽53km에 있으며 버스와 기차편이 자주 있다.
바우스카(Bauska)
바우스카의 시골마을의 주요 볼거리는 1443년에서1456년 사이에 지어진 리보니안 기사단의 요새였던 성이다. 이 인상적인 건축물은 16세기와 17세기에 있었던 수 차례의 전쟁으로 파손되어 재건축되었지만, 1706년 북구대전쟁 (Great Northern War)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린다. 재복구는1976년에 비로소 다시 시작한다. 성의 박물관은 지금 16-17세기 미술품 약간과 복구작업시에 발굴한 다양한 고고학적 자료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고대음악제(Ancient music festival) 가 성 안과 주변의 높은 운동장에서 열린다.바우스카에서 불과 서쪽 12km에는 라트비아에서 건축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18세기 룬달레(Rundale) 궁전이 있다. 이 궁은 18세기에 이태리 출신의 바로크시대 천재건축가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에 의해 설계되어 지어졌다. 그는 상 페테스부르그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많이 건축했었다. 바우스카는 리가-빌리우스 주도로의 리가 남쪽 65km지점에 있다. 기차는 다니지 않지만 매일 여러 편의 버스가 있다.
쿨디가(Kuldiga)
쿨디가는 라트비아의 쿠르제메(Kurzeme)지방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답고 역사적인 도시이다. 이곳은 도심에서 북으로2.5km 지점에 있는 고대 요새의 옛터에 의해 입증되는 쿠우르(Cours)족의 정착지로 중요했었다. 17세기 마을 공회당, 18세기의 곡물창고, 로만카톨릭, 러시아정교, 루터교회들, 1807년에 만든 물레방아, 조각공원, 지역박물관 등이 있다. 쿨디가의 벤타(Venta)강에서 낚시나 수영을 즐길 수 있으며, 강에 있는 폭포의 2m 높이가 라트비아의 지형이 평평한 만큼 대단하게 느껴진다. 더 대단한 것은 폭포의 너비가 275m에 걸쳐 있으므로 유럽에서 가장 폭이 넓은 폭포이다. 쿨디가는 리가 서쪽 150km에 있고 버스로 연결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 둔다가(Dundaga)
영화 크로커다일 던디(Crocodile Dundee)의 기원을 3개의 호수사이에 있는 이 작은 마을에서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의 중심에 1995년 시카고의 라트비아 영사관이 둔다가에 기증한 거대한악어상이 있다. 이 동상은 2차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렐리아로 망명하여 아웃백(Outback)에서 악어를 잡으며 일생을 보낸 아르비츠 폰 브루멘페츠(Arvids von Blumenfelds)라는 이 지역출신에게 헌정되었다. 이 둔다가 출신의 영웅이 이룬 업적에 기초하여 영화가 만들어졌다.땅신령의 결혼을 방해하는 비극적인 실수를 저지른 한 어여쁜 소녀를 죽을 때까지 둔다가성에 감금하여 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소녀의 혼령이 아직도 성에 남아있어 보름달이 뜰 때면 나타난다고 말한다. 둔다가는 리가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리가만에서 내륙으로20km 지점에 있어서 자동차로 가는 것이 최선이다.
마짜라차(Mazsalaca)
이 작은 마을에는 13세기 루터교회나 목공예 박물관이 있으나 그것으로 유명하지는 않다. 마짜라차는 이리로 변한 사람과 연인들에 관한 이야기로 유명하다. 철교에서 강 아래쪽으로 약2 km, 도심에서 그 두 배 거리에 있는 늑대인간 소나무(Werewolf Pine)는 만일 보름달 아래서 이리 모습으로 변하기 바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소나무 뿌리 사이를 네발로 기어 다니면, 사람이 이리가 된다고 믿어진다. 별로 유효하게 다양하지 못한 육체적 욕구에 관해서 의문을 가지는 연인들이라면 얼마나 그들이 서로에게 잘 맞는 지를 알아보러 근처의 꿈의 계단(Stairway of Dreams)으로 향할 수 있다. 서로의 불행에 운수 나쁜 피해자라면 악마의 동굴(the Devil’s Cave)에 잠시 들러 거기서 샘물을 한 모금을 마시면 놀라운 치료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마짜라차는 리차 북서쪽의 비제메(Vidzeme)지역 북부에 있는 살라차(Salaca) 강가에 있다. 비록 단선의 저속 기차이지만 하루에 한번 이 북쪽 마을까지 오는 리가와 연결되는 교외선 철도상에 있다.
아글로나 바실리차(Aglona Basilica)
아글로나 바실리차는 라트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이며 건국이래 로만카톨릭의 제일 중요한 성당이다. 이 교회는 1699년에 건축되었으나 1993년 교황 요한 파울 2세의 방문을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안뜰에 둘러싸여 버렸다. 바실리차는 라트갈레(Latgale) 고지의 서부지역을 가로지르는 다우가프필스-레젝크네(Daugavpils-Rezekne) 사이의 주도로 상에 있는 아글로나 마을에서 북으로 8km에 있다. 이 지역에 가려면 자동차나 자전거 심지어 카누로 가는 것이 이상적인 방법이다. 다우가프필스에서 아글로나로 가는 버스 편은 아주 드물다. 레저스포츠
가우야계곡은 동계스포츠의 중심지로 시굴다에 봅스레이 경기장이 있고 발미에라(Valmiera)에는스키점프대가 있다. 리가에 있는 야외스케이트장은 기온이 영하 3도 이하로 내려가면 개장한다. 카누타기는 가우야, 살라차, 아바파(Abava) 등의 강과 라트갈레 호수지역이 매우 인기가 있다. 가우야 국립공원은 시굴다에서 조직하는 승마유람을 하면서 돌아볼 수 있다. 개인회사들이 리가의 남쪽 20km에 있는 발도네 (Baldone)에서부터 안내자를 동반하는 조류관찰여행을 제공한다. 라트비아로 가는 길
국영항공사인 발틱에어(Air Baltic)는 스칸디나비아항공(SAS)과 협력관계이며, 리가와 코펜하겐, 프랑크푸르트, 제네바, 함부르그, 헬싱키, 키에프, 런던, 민스크, 모스크바, 스톡홀름, 탈린, 빌니우스, 바르샤바 등지를 연결한다. 리가와 북미, 오스트레일리아, 아시아 간에 직항 편은 없다. 라트비아는 아직까지 받지않는 출국세를 언젠가 받아낼 것을 생각만 하고 있지만 일단 관광객이 몰려온다면덴마크,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폴란드,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 벨라루스,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등에서는 리가까지 직행버스로 갈 수 있다. 기차여행을 좋아하다면 베를린-상페테스부르그 노선이 라트비아의 남동부 다우가프필스 를 통과하므로 이용할 수 있다. 또 리가와 모스크바, 상페테스부르그, 민스크 사이에 기차편이 있고, 다우가프필스와 헤르니피치(Chernivtsi)도 기차로 연결된다. 만일 바다공기를 마시고 싶다면 독일의 트라베뮌드(Travemünd), 스웨덴의 스톡홀름과 슬리테(Slite), 에스토니아의 사아레마아(Saaremaa)섬에 있는 로우마싸아레(Roomassaare) 등에서 리가로 가는 직항 페리를 이용할 것을 권한다 국내 교통편
리가공항은 시 중심에서 서쪽으로 14km에 있는 유르말라에 있고 버스나 택시로 연결된다.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로 가는 교통편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버스와 그 보다는 적지만 기차로 에스토니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 갈 수는 있다. 버스, 기차 모두 값은 싸지만 느리다. 리가에는 광범위한 도심전차, 트롤리(무궤도버스), 버스로 연결된 포괄적인 교통망이 있다.주요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거리가 대단히 멀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와 자전거를 이용하는 여행이 라트비아에서는 인기가 있다. 대부분의 자동차대여 회사는 리가와 공항에 사무소를 갖고 있다. 자동차운전은 우측통행이며, 주요 도로를 따라 24시간 영업하는 주유소들이 있다. 9일 동안 동부 라트비아의 비제메와 동부의 라트갈레를 자전거로 순회하고, 3일을 리가와 그 주변을 돌아보는 여행을 라트비아 여행자클럽을 통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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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ㆍ사고 현황
[테러, 인질 등에 대한 상황 및 정세]ㅇ 라트비아는 1991년 구소련으로부터 분리 독립 후 2004년 EU 및 NATO 가입, 2014년 유로존 가입, 2016년 OECD 가입 등 서구 세계로의 편입 노력을 가속화해 오고 있어 갑작스런 전쟁이나 테러 등 위험은 매우 낮은 상황입니다.[범죄현황 등 치안상태]ㅇ 라트비아의 기본적인 치안상황은 안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여행자가 많은 관광지, 주요기차역 등에서는 소매치기 사건이 종종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안전사고]ㅇ 여행자들을 상대로 한 소매치기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아래 사항 등에 대한 주의가 요망됩니다.
– 들고 다니는 핸드백 보다는 착용할 수 있는 배낭을 이용하시고 현금 등 주요 소지품은 외부로 드러나는 주머니에 휴대하지 마시고 내부 주머니에 분산하여 휴대하는 것이 좋습니다.
– 외출 시에는 가급적 귀중품 등 불필요한 물건을 휴대치 말고 간소한 차림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현금 휴대는 최소한으로 하고 여권은 신분증이므로 항상 휴대하시기 바랍니다.
자연재해
유의해야할 지역
ㅇ 특히, 심야에 유흥업소를 이용하실 때에는 여권, 휴대폰 도난에 대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기타 질병 현황]ㅇ 특별한 전염병이나 풍토병은 없으나 여름철 야외(공원, 숲속 등)에서 활동하실 경우에는 진드기에 물릴 것을 대비해 긴팔 긴바지를 입으시는 것이 좋습니다.ㅇ 라트비아는 태풍, 지진 등 자연재해가 거의 발생하지 않지만, 라트비아 일부지역에서는 봄철 홍수가 발생하기도 합니다.ㅇ 여름철에도 기온이 대체로 높지 않으며, 아침, 저녁으로 갑자기 날씨가 추워질 수 있으므로 따뜻한 옷을 준비하시는 것이 좋습니다.ㅇ 수도 리가의 중앙시장, 기차역에서는 현지인들을 상대로 한 소매치기도 수시로 발생하기 때문에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는 소지품 분실에 대한 주의가 필요합니다.ㅇ 수도 리가 구시가지에 있는 유흥업소에서는 종종 외국인을 상대로 사기 사건이 발생합니다. 현지인, 특히 젊은 여성이 주류를 대접하겠다고 하여 접근 후 계산서를 받으면 원래의 가격보다 수배 많은 가격을 청구하는 유형의 사기 사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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